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56화: 확인자의 이름
두 번째 홈이 밝아지는 동안 첫 번째 홈의 불씨는 북쪽을 향해 뛰었다.
라시안의 목 아래에 번진 검은 흔적도 그 박자에 맞춰 꿈틀거렸다. 총서기관이 황태자의 팔을 잡으려 했다.
“동쪽 접견실로 옮기겠습니다. 이곳에 두면 장치가 그를 완전히 묶습니다.”
“새로운 목적지와 귀환 위치와 책임자를 적으십시오.”
카일은 라시안의 동의서를 펼쳤다.
“지금 적힌 조건을 바꿀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황궁의 이동은 내 명령으로—”
“그 명령이 라시안의 동의보다 먼저입니까?”
라시안이 벽에서 등을 떼었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목소리는 분명했다.
“나는 여기 남겠습니다.”
그는 새 서류에 직접 적었다.
‘현재 목적지: 황궁 지하 봉인실.’
‘귀환 위치: 황태자 동쪽 접견실.’
‘수령자: 없음.’
‘본인은 위 조건을 바꾸지 않은 채 조사에 남는 데 동의함.’
카일은 마렌에게 문서를 넘겼다.
“작성 시각과 장소를 적으십시오. 에단은 이 동의를 증언합니다.”
에단은 총서기관이 반박하기 전에 공동 기록판에 서명했다.
“라시안이 직접 거부하지 않는 한 누구도 그를 다른 수령자에게 넘기지 않겠습니다.”
카일은 레오나와 마렌과 도렌을 보았다.
“우리는 북부로 갑니다. 귀환 위치는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 공동 귀환 위치입니다. 수령자는 없습니다.”
도렌이 이동표의 칸을 확인했다.
“돌아올 장소는 적었지만 우리를 받는 사람은 적지 않았습니다.”
“그게 맞습니다.”
레오나가 칼집을 고쳐 잡았다.
“나는 동행합니다.”
“황궁에 남는 편이 안전할 수도 있습니다.”
“교주님이 없는 곳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건 경호가 아니라 습관입니다.”
“그럼 습관을 경호로 만들겠습니다. 북부에서 교주님이 힘을 쓰는 순간을 감시하겠습니다.”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라시안의 동의서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열여섯 번째 종 전까지 귀환하지 못할 경우 에단은 라시안의 이름·현재 위치·귀환 위치를 재확인한다.’
라시안이 그 문장을 읽었다.
“돌아오십시오. 확인할 사람이 없으면 규칙도 사라집니다.”
카일이 금속판을 품에 넣는 순간 지하 벽 안쪽에서 라시안의 목소리가 울렸다.
“귀환 위치를 비워라.”
라시안이 숨을 멈췄다.
“나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압니다.”
카일은 그 문장을 라시안의 발화가 아닌 것으로 기록하게 한 뒤 북쪽으로 향했다.
북부 초소까지 가는 길에 말 세 마리를 갈아탔다.
카일은 금속판을 감추지 않았다. 마렌은 표면의 빛과 박자를 적었고 도렌은 이동표의 수령자 칸이 비어 있는지 확인했다. 레오나는 앞장서서 눈길을 살폈다.
해가 산 뒤로 넘어갈 무렵 서쪽 돌담이 보였다. 라우렌과 유르는 생존자들을 흰 재의 선 뒤에 세워 두고 있었다.
“안쪽에 가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생존자가 말했다.
라우렌은 돌담을 향한 걸음을 막았다.
“이름과 상태를 먼저 확인합니다. 귀환 위치를 비우면 밖에 있는 사람까지 안쪽의 일부가 됩니다.”
카일은 돌담 가까이에 서서 말했다.
“안쪽 사람은 이름과 역할과 상태를 말하십시오. 현재 위치도 말할 수 있다면 함께 말하십시오. 수령자는 없습니다.”
열여섯 번째 숨이 지나자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렌. 기록관.”
마렌이 적었다.
“이름과 역할 진술. 발화자의 신원은 미확인.”
카일이 물었다.
“현재 상태는?”
“미도착.”
도렌이 얼굴을 찌푸렸다.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그렇게 말합니까?”
“기록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카일이 다시 물었다.
“현재 위치를 말하십시오.”
“북부 수도원 하부.”
“그건 기록에 적힌 확인 위치입니다. 지금 있는 곳을 말하십시오.”
같은 대답이 반복됐다. 목소리는 하렌이라는 이름과 장부의 문장을 말했지만 자신의 기억이나 몸 상태는 말하지 못했다.
그때 안쪽에서 거친 숨소리가 겹쳤다. 금속을 긁는 소리와 함께 돌담 아래 흙이 갈라졌다.
손 하나가 밖으로 밀려 나왔다. 손목에는 세 갈래 절개처럼 보이는 흉터가 있었다.
레오나가 검을 뽑았지만 칼끝은 손에 대지 않았다.
“손을 내밀어도 됩니다. 아직 밖으로 나오지는 마십시오.”
손 너머에서 지친 목소리가 들렸다.
“귀환 위치를 먼저 적으십시오.”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입니다.”
“그건 밖에 있는 사람들의 위치입니다. 내가 거기로 돌아오는 데 동의하면 수령자가 됩니까?”
“수령자는 없습니다. 돌아올 위치만 있습니다.”
카일은 이동표 뒷면에 같은 문장을 적어 돌담 틈으로 밀어 넣었다.
손이 종이를 움켜쥐었다.
“그렇게 적는 사람이 안쪽에 들어오면 다음 칸이 열립니다.”
카일은 손목의 검은 흔적을 보았다.
“당신은 하렌입니까?”
“하렌이라고 불리던 기록관입니다. 열여섯 칸을 관리했습니다.”
“왜 안에 갇혔습니까?”
“귀환 위치가 비어 있는 칸에 수령자 이름을 넣으라는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그 뒤 내 이름이 첫 번째 칸에 들어갔습니다.”
돌담 안쪽에서 장치의 목소리가 다시 끼어들었다.
“첫 번째 수취인. 하렌. 미도착.”
“저건 내가 아닙니다.”
이번에는 두 목소리가 분명히 나뉘었다. 카일은 하렌으로 불린 남자의 말과 장치의 반복을 별도로 기록했다.
카일은 돌담 틈 앞에 무릎을 굽혔다.
“검은 선을 몸에서 분리하겠습니다. 기억을 되돌리거나 상처를 치료한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염만 떼어 낼 겁니다.”
“선이 사라지지 않으면 어디로 갑니까?”
“다른 곳으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그럼 누군가가 확인자가 됩니다.”
“내가 감당하겠습니다.”
레오나가 카일의 팔을 붙잡았다.
“표적이 됩니다.”
“그래도 안으로 들어갈 사람은 나뿐입니다.”
라우렌은 공동 귀환 위치를 지키고 있었고 마렌은 기록을 해야 했다. 유르와 도렌은 생존자들의 명단과 이동표를 놓을 수 없었다.
카일은 손 너머의 남자에게 물었다.
“동의합니까?”
“내 이름이 하렌인지 확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선이 나를 기록으로 바꾸는 일만 멈춰 주십시오.”
“동의로 기록합니다.”
카일이 손목에 손가락을 댔다.
파멸의 별의 힘이 번졌다. 검은 선은 살을 찢지 않고 피부 밑에서 떨어져 나왔다.
차가운 장면들이 카일의 정신을 스쳤다. 열여섯 개의 빈 칸. 수령자 이름을 넣으라는 명령. 귀환 위치를 지우는 손.
그것이 남자의 기억인지 장치가 보여 준 환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카일은 장면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선만 붙잡았다.
“떼어 내십시오.”
남자의 동의가 떨어지자 카일은 힘을 당겼다.
검은 선이 끊어졌다.
동시에 카일의 목 아래가 타들어 갔다. 그의 목소리가 한 박자 늦게 겹쳤다.
“귀환 위치를 비워라.”
레오나가 검을 세웠다.
“교주님?”
“내가 말한 게 아닙니다.”
검은 흔적은 카일의 손목을 타고 목 아래에서 멈췄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확인한 순간 네가 다음이다.
카일은 대답하지 않고 남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몸이 절반쯤 밖으로 나왔을 때 돌담 안쪽에서 금속음이 울렸다. 첫 번째 불씨가 꺼졌다.
대신 카일의 발밑에 검은 선이 새로 생겼다.
마렌이 숨을 삼켰다.
“금속판에 글자가 나타납니다.”
‘확인자: 카일.’
그 아래에 두 번째 문장이 번졌다.
‘두 번째 수취인: 카일.’
‘귀환 위치: 공란.’
라우렌과 유르가 남자를 받아냈다. 수령자 칸은 끝까지 비워 두었다.
하렌으로 불린 남자가 힘겹게 눈을 떴다.
“내 앞에서 확인한 사람도 그렇게 됐습니다. 자기 이름을 적고 안으로 들어간 뒤 다음 날 사라졌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기록에 남지 않았습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목소리였다. 카일은 그 말만큼은 장치의 반복과 구분할 수 있었다.
같은 시각 황궁 지하 봉인실에서 에단은 라시안에게 이름과 귀환 위치를 다시 확인하게 했다.
“라시안. 오레스 제국의 황태자. 현재 황궁 지하 봉인실에 있습니다. 귀환 위치는 황태자 동쪽 접견실입니다.”
라시안이 문장을 끝내자 두 번째 홈의 불빛이 낮아졌다.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열여섯 번째 박자가 지나자 홈의 글자가 흔들렸다.
‘두 번째 수취인: 라시안.’
그 아래에 새 문장이 나타났다.
‘확인자: 카일.’
에단은 즉시 기록판을 들었다.
“확인된 건 글자가 바뀐 사실뿐입니다. 카일의 인계는 아직 확정하지 않습니다.”
라시안은 자신의 동의서를 다시 펼쳤다.
“나는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의 귀환 위치도 적혀 있습니까?”
에단은 대답하지 못했다.
북부에서 카일은 이동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렌으로 불린 남자의 상태에는 ‘생존 반응 확인. 기억과 신원은 추가 대조 필요’라고 적혀 있었다. 귀환 위치는 돌담 아래로 정해져 있었다.
카일 자신의 이름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금속판에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확인자의 귀환 위치를 말하라.’
레오나가 카일의 팔을 잡았다.
“밖으로 나가십시오. 지금 당장.”
“내가 나가면 하렌의 귀환 위치가 다시 비게 됩니다.”
“그가 서명한 위치는 이곳입니다.”
“그는 수령자가 아닙니다. 대신할 사람도 없습니다.”
카일은 흰 재로 자신의 발밑에 원을 그렸다. 장소를 적으면 그곳이 장치의 새 입구가 될 수 있었다. 적지 않으면 자신이 인계되고 남자의 귀환 위치도 흔들릴 수 있었다.
황궁의 에단은 공동 기록판에 라시안의 귀환 위치가 유지되고 있음을 적었다. 북부의 금속판에는 반대로 카일의 빈 칸이 검게 번졌다.
돌담 안쪽에서 카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귀환 위치를 비워라.”
하렌으로 불린 남자가 낮게 말했다.
“대답하지 마십시오.”
“대답하지 않으면?”
“두 번째 인계가 끝납니다.”
카일은 펜을 들었지만 종이에 대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적은 순간 다음 칸은 열렸다. 이제 그는 하렌을 데려온 사람이 아니라 장치가 데려갈 두 번째 사람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