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55화: 첫 번째의 귀환
첫 번째 홈이 붉어진 순간 봉인실의 공기가 꺼졌다.
소리와 온기가 바닥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라시안의 기침도 총서기관이 숨을 삼키는 소리도 끊겼다.
카일은 손을 들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십시오.”
열여섯 홈의 첫 번째 칸에서 검은 실이 흘러나왔다. 실은 바닥에 글자를 새겼다.
첫 번째 수취인: 하렌.
상태: 미도착.
귀환 위치: 공란.
두 번째 홈의 검은 선이 라시안의 발끝으로 뻗었다. 흰 재로 그어 둔 경계에서 멈췄지만 멈춘 척만 하는 듯 가늘게 떨렸다.
총서기관이 라시안의 팔을 잡으려 했다.
“황태자를 위로 옮겨야 합니다. 이곳에 두면 장치가—”
레오나의 칼집이 그의 손목을 밀어냈다.
“동의서에 이름을 적으셨습니까?”
총서기관의 입술이 굳었다.
카일은 라시안의 동의서를 철판 위에 펼쳤다.
“목적지는 황궁 지하 봉인실입니다. 귀환 위치는 황태자 동쪽 접견실이고 수령자는 없습니다. 지금 옮기려면 새 목적지와 책임자와 귀환 위치를 적으십시오.”
“장치가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부르는 것과 데려갈 권리가 있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라시안은 바닥의 선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라시안. 오레스 제국의 황태자. 현재 황궁 지하 봉인실에 있습니다. 제 귀환 위치는 황태자 동쪽 접견실입니다.”
그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나는 장치의 수령자가 아닙니다.”
“그대로 적으십시오.”
마렌이 붓을 움직였다. 문장이 내려앉을 때마다 두 번째 홈의 빛은 조금씩 낮아졌다.
첫 번째 홈은 더 붉어졌다.
카일이 총서기관을 보았다.
“하렌을 아십니까?”
총서기관의 오른쪽 눈 밑이 떨렸다. 별의 눈에 보인 것은 거짓의 흔적이 아니었다. 숨기고 싶은 기억이 건드려졌을 때 생기는 균열이었다.
“황실 기록에 그런 이름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럼 장부를 보여 주십시오.”
총서기관의 손이 품 안으로 들어갔다. 얇은 쇠 상자의 모서리가 드러났다.
“보안 기록입니다.”
“하렌의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만 대답하십시오.”
총서기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단이 기록판을 들었다.
“총서기관은 하렌이라는 이름이 나타난 뒤에도 장부의 존재 여부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거부를 직접 보았습니다.”
첫 번째 홈에서 금속을 긁는 소리가 났다. 붉은 선이 총서기관의 발밑까지 갔다가 하렌이라는 글자로 돌아왔다.
총서기관은 마침내 쇠 상자를 꺼냈다.
“원본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조건입니다.”
“그 조건과 당신의 이름을 공동 기록판에 적으십시오.”
총서기관은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적었다.
봉인실 옆 공동 기록실에는 오래된 장부와 봉인된 상자가 쌓여 있었다.
카일은 철판 네 개를 세웠다.
“이름과 역할과 기록 날짜와 현재 위치를 나눕니다. 확인되지 않은 것은 빈 칸으로 남깁니다.”
총서기관이 쇠 상자를 열었다. 장부 첫 장에는 ‘북부 회수 설비 제16구역’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었다. 그 아래에는 사람이 쓴 이름이 있었다.
‘기록관 하렌.’
라시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렌은 기록관이었습니까?”
“오래전 북부 회수 설비에서 사람과 물자의 이동표를 관리했네.”
도렌이 장부의 열여섯 칸을 세었다.
“수취 전 대기 양식과 같습니다.”
“양식이 같다는 건 추정이지.”
“그렇게 적겠습니다.”
카일이 장부의 뒤쪽을 가리켰다.
“하렌은 무엇을 보고했습니까?”
총서기관은 세 갈래 절개가 찍힌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누락된 귀환 위치가 반복된다고 보고했네. 이름이 남은 사람도 수령자 칸이 계속 열렸다고 했지.”
“보고서는 저 안에 있습니까?”
총서기관은 침묵했다.
카일은 곧바로 문장을 적었다.
‘총서기관은 하렌의 보고서가 봉인된 봉투의 존재를 인정함. 발행자와 날짜는 미확인.’
“봉투를 열지 않으면 내용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보고서를 알고 숨겼다는 사실은 기록할 수 있습니다.”
에단이 장부 가장자리를 살폈다.
“이건 태양신전의 봉인이 아닙니다. 황실 보안 인장입니다.”
“사람이 사라진 기록을 공개하면 제국 전체가 흔들렸을 거네.”
“그래서 이름을 봉인했습니까?”
에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총서기관은 대답 대신 접힌 종이를 꺼냈다. 숫자 두 자리는 검게 지워져 있었고 발행자는 없었다.
‘첫 번째 수취인: 하렌.’
‘상태: 미도착.’
‘확인 위치: 북부 수도원 하부.’
마렌이 물었다.
“현재 위치입니까?”
“기록 당시의 확인 위치입니다.”
카일이 바로잡았다.
“현재 위치라고 적지 마십시오. 확인된 건 기록 속 이름과 당시 위치뿐입니다. 하렌의 생사는 모릅니다.”
총서기관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렌은 그곳으로 들어간 뒤 돌아오지 않았네.”
“그 사실을 직접 확인했습니까?”
총서기관은 입을 다물었다.
그때 바닥 아래에서 금속음이 울렸다. 첫 번째 홈의 붉은 반응이 벽을 타고 장부의 하렌이라는 글자에 닿았다.
도렌이 물러섰다.
“기록에 반응했습니다.”
“그렇게 단정하지 마십시오. 선이 글자에 닿았다는 사실만 적습니다.”
카일은 장부 옆에 철판을 놓았다.
‘하렌: 확인 대상. 현재 위치 미확인. 귀환 위치 미지정. 수령자 없음.’
검은 선의 끝이 떨렸다.
카일은 그 떨림을 바라보다가 봉인실로 돌아섰다.
라시안의 호흡은 더 짧아져 있었다. 손목의 검푸른 선도 팔꿈치를 지나 어깨 쪽으로 번졌다.
“장치가 하렌을 부르는 동안 내 몸이 악화되는 건 우연입니까?”
“동시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연결됐다고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럼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지 않습니까?”
“당신의 이름과 역할과 귀환 위치는 확인됐습니다. 장치가 당신을 수령자로 바꿀 권리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라시안은 기침했다. 입술에 피가 묻었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피가 식기 전에 선을 삼켜라. 네가 아프지 않게 만들 수 있다.
‘네가 원하는 건 치료가 아니다.’
카일은 라시안에게 다가갔다.
“검은 선의 일부를 흡수하면 호흡이 나아질 수도 있습니다. 사라진 것을 되돌리지는 못합니다. 힘을 쓰는 데 동의합니까?”
“하면 무엇이 남습니까?”
“모릅니다.”
“그럼 하지 마십시오.”
카일은 손을 내렸다.
“그 선택을 기록합니다.”
첫 번째 홈의 글자가 다시 떠올랐다.
첫 번째 수취인: 하렌.
확인 위치: 북부 수도원 하부.
두 번째 수취인: 라시안.
인계 대기.
라시안은 장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장치의 수령자가 아닙니다.”
이번에는 카일이 아니라 라시안이 먼저 말했다.
카일은 하렌의 임시 기록과 라시안의 동의서를 나란히 놓았다.
“하렌은 현재 인물이라고 확정하지 않습니다. 라시안도 수령자라고 확정하지 않습니다. 귀환 위치 없는 이송은 없습니다.”
도렌이 문장을 읽었고 마렌이 시각을 적었다. 에단과 레오나가 각각 증인과 차단자로 서명했다.
첫 번째 홈의 선이 임시 기록에 닿았다. 글자를 지우지는 못하고 종이 가장자리만 맴돌았다.
열여섯 번의 금속음이 연속해서 울렸다.
두 번째 음에 라시안의 검은 선이 짙어졌다. 열세 번째 음에 총서기관이 숨긴 봉투의 밀랍이 갈라졌다.
총서기관이 봉투로 달려갔지만 레오나가 앞을 막았다.
“모두가 보는 곳에서 여십시오.”
봉투에서 찢긴 보고서가 미끄러져 나왔다. 마렌이 보이는 글자를 읽었다.
“첫 번째가 안에 있으면… 두 번째는….”
그 뒤는 찢겨 있었다.
총서기관이 눈을 감았다.
“하렌은 그 문장을 끝내지 못했네.”
“누군가 끝을 없앴을 수도 있습니다.”
에단이 말했다.
카일은 보고서 옆에 적었다.
‘하렌의 보고서로 보이는 종이에 미완성 문장이 있음. 작성 완료 여부와 훼손자는 미확인.’
금속판의 첫 번째 홈에서 검은 선이 빠져나왔다. 선은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향했다. 카일은 그 앞에 흰 재를 뿌렸다.
“방향만 확인합니다. 목적지는 아직 모릅니다.”
선은 재를 넘지 못하고 금속판 가장자리에 북쪽을 가리키는 홈을 남겼다.
라시안이 물었다.
“하렌이 북부에 있을 가능성은요?”
“기록 당시의 위치와 현재 위치는 다릅니다. 확인해야 합니다.”
첫 번째 홈의 불씨가 꺼졌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붉은 점 하나가 북쪽을 향해 뛰었다.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에서 라우렌은 부러진 단장 휘장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휘장 안쪽의 세 갈래 절개에서 검은 가루가 흘러나왔다. 유르가 돌담을 바라보았다.
“안에서 소리가 납니다.”
생존자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라우렌은 돌담 아래의 공동 귀환 위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귀환 위치를 비우면 밖에 있는 사람도 방향을 잃습니다. 이름과 상태와 위치를 먼저 확인합니다.”
그는 돌담을 향해 말했다.
“안쪽 사람은 이름과 역할을 말하십시오. 수령자는 없습니다.”
열여섯 번째 숨이 지나간 뒤 마른 기침이 흘러나왔다.
유르가 속삭였다.
“수도원 기록실에서 들었던 소리와 같습니다.”
라우렌은 철판에 적었다.
‘확인된 사실: 돌담 안쪽에서 마른 기침이 들림.’
기침 뒤에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렌… 기록관….”
생존자들이 술렁였다.
“이름과 역할을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목소리의 주인이 하렌이라는 증거는 아닙니다.”
라우렌이 물었다.
“하렌이라면 귀환 위치를 말하십시오.”
돌담 안쪽에서 금속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귀환… 위치….”
갈라진 목소리는 두 사람의 입이 겹친 것처럼 들렸다.
돌 사이의 흙이 갈라지며 세 갈래 절개가 드러났다. 절개 안쪽에서 첫 번째 불씨가 켜졌다.
라우렌은 휘장을 집지 않았다.
“안쪽 사람은 움직이지 마십시오. 귀환 위치는 이곳입니다. 수령자는 없습니다. 나오려면 이름과 역할과 상태를 말하십시오.”
돌담 틈으로 오래된 종이 한 조각이 밀려 나왔다.
그 위에는 검게 번진 글자가 하나만 남아 있었다.
‘두 번째.’
동시에 황궁 지하에서 금속판의 두 번째 홈이 밝아졌다.
카일은 북쪽을 향한 선을 바라보았다.
“북부로 돌아갑니다.”
에단이 라시안의 동의서를 들었다.
“그의 귀환 위치는 접견실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물어야 합니다.”
카일은 첫 번째 홈과 두 번째 홈을 번갈아 보았다.
“하렌을 확인하는 동안 라시안의 귀환 위치를 누가 지킬 수 있는지.”
돌담 안쪽에서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번째가 깨어난다.”
이번에는 라우렌도 그 말을 들었다.
하렌을 확인하려면 공동 귀환 위치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라시안의 장치는 이미 다음 인계를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