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54화: 기록된 두 번째
황도로 돌아오는 사흘 동안 검은 선은 끊기지 않았다.
라우렌에게서 받은 금속판은 북부 수도원부터 남쪽을 가리켰다. 산길을 내려올 때는 희미한 흔적이었지만 황도 외곽의 돌다리가 보이자 두 번째 홈이 낮게 떨렸다.
마렌이 판을 철판 위에 올렸다.
“반응 시각을 기록하겠습니다. 열세 번째 박자부터 떨림이 시작됐습니다.”
“황도에 들어온 뒤의 위치도 적으십시오. 판이 도시를 가리킨다는 해석은 아직 하지 마십시오.”
카일은 판에서 손을 뗐다. 손목 안쪽의 검은 흔적이 꿈틀거렸다.
파멸의 별이 낮게 웃었다.
―가까워졌다. 두 번째가 기다린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도 내가 데려간다는 뜻은 아니다.’
북문 앞에는 에단이 서 있었다. 그의 뒤로 황실 연락소의 기록관 셋과 무장한 근위병 열두 명이 줄을 맞췄다.
“도착하자마자 포위부터 합니까?”
레오나가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포위가 아니라 통제입니다. 황태자의 상태가 오늘 새벽부터 악화됐습니다.”
에단은 카일에게 다가왔다.
“밤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손목의 선이 팔꿈치까지 올라갔습니다. 궁정은 금속판과 도렌을 즉시 넘기라고 했습니다.”
“수령자와 귀환 위치는 적었습니까?”
“황궁 지하 의무실. 수령자는 황실 의관.”
총서기관의 대리인이 한 걸음 나섰다.
“황태자의 치료를 위한 임시 지정입니다. 지금 장부를 따질 때가 아닙니다.”
카일은 북문 돌기둥에 공동 기록판을 세웠다.
“임시 지정은 책임자의 이름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의관의 이름과 이동 목적지와 귀환 위치를 적으십시오.”
마렌이 일행의 이름을 적었다. 도렌은 자신이 외부 인계자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을 다시 진술했다. 금속판은 북부 수도원에서 발견됐고 발행자와 날짜를 모른다는 내용도 남았다.
기록관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시간을 끌면 황태자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싶다면 무엇을 어디로 옮기는지 먼저 남기십시오.”
황궁 쪽에서 종이 울렸다.
열여섯 번째 울림에 맞춰 금속판의 두 번째 홈이 밝아졌다. 에단의 얼굴도 굳었다.
“황태자가 의식을 잃었다는 전갈입니다.”
마렌은 두 시각을 나란히 적었다.
‘확인된 사실: 금속판의 두 번째 홈이 열여섯 번째 종에 반응함. 에단이 황태자의 의식 소실을 전함. 추정: 두 현상에 관련성이 있을 수 있음.’
카일은 판을 덮지 않았다.
“황태자에게 갑니다. 하지만 이 물건은 공동 기록실을 거칩니다. 누구도 단독으로 가져가지 않습니다.”
에단이 길을 열었다.
“내가 입회하겠습니다.”
“당신도 황태자를 수령자로 부르지 마십시오.”
에단은 잠깐 침묵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공동 기록실의 벽에는 황실 명부와 오래된 지도가 걸려 있었다.
총서기관은 정식 명부 한 장을 펼쳤다. 붉은 인장 아래에 황태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라시안.
마렌은 북부 수도원에서 확인한 문장을 옆 철판에 옮겼다.
‘두 번째 수취인: 라시안.’
총서기관이 두 글자를 두드렸다.
“이름이 같고 확인 위치가 황도 지하입니다. 더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북부 표기에는 발행자와 날짜가 없습니다. 황실 명부에는 수취인이라는 역할도 없습니다. 대상이 같다는 건 추정입니다.”
“황태자의 이름을 누가 더 가지고 있겠습니까?”
“그 질문은 증거가 아닙니다.”
도렌이 입을 열었다.
“교육받을 때 들었습니다. 대기자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수령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름이 비어 있는 동안만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누가 가르쳤는지는 모른다고 했지 않습니까?”
“모릅니다. 그래서 사실과 추정을 나눠 말하는 겁니다.”
마렌은 북부 문서의 표기와 황실 명부의 이름과 도렌의 진술을 서로 다른 칸에 적었다.
에단이 오래된 황궁 지도를 펼쳤다.
“황도 지하에 폐쇄 봉인실이 있습니다. 열여섯 홈이 있는 시설로 분류됐지만 정확한 위치와 접근 기록은 총서기관의 보안 장부에 있습니다.”
총서기관은 지도를 접어 품 안에 넣었다.
“보안 구역의 위치는 공개할 수 없습니다.”
“그럼 황태자를 그곳으로 보내지 마십시오.”
카일은 금속판을 접시 위에 올렸다.
“라시안 본인의 동의 없이 진찰도 이동도 하지 않습니다. 기록 속 이름과 현재 인물이 같은지 확인하려면 당사자의 이름과 역할과 위치를 직접 듣겠습니다.”
“황태자의 목숨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약속하지 않겠습니다. 이 판을 흡수하면 증상이 사라진다고 말하는 순간 황태자는 치료 대상이 아니라 제 신도의 증거품이 됩니다.”
에단의 눈빛이 흔들렸다. 카일이 기적을 쉽게 약속하지 않는 까닭을 조금은 알아들은 표정이었다.
총서기관이 지도의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접견은 허락하겠습니다. 단 금속판은 여기 두고 가십시오.”
두 번째 홈이 다시 떨렸다.
“그 요구도 기록에 남깁시다. 누가 물건의 단독 수령자가 되려 했는지도요.”
총서기관은 지도를 놓지 못했다.
황태자 접견실에는 약초 냄새와 식은 재 냄새가 함께 남아 있었다.
라시안은 침대에 기대 앉아 있었다.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검푸른 선이 이어졌고 목 아래의 흔적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진해졌다.
“카일. 북쪽에서 무언가를 가져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금속판 하나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같은 사람인지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겠습니다.”
“확인하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기록의 대상일 가능성이 생깁니다. 수령자가 되는 건 아닙니다.”
라시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곧바로 기침이 터졌다. 의관이 다가왔지만 라시안은 손을 들어 막았다.
“내가 말하겠습니다.”
카일은 레오나를 문 옆에 세우고 마렌에게 기록판을 들게 했다. 금속판과 황실 명부는 서로 다른 철판 위에 놓았다.
“이름을 말해 주십시오. 원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라시안. 오레스 제국의 황태자. 현재 황궁 동쪽 접견실에 있습니다.”
목소리가 끝나자 금속판의 두 번째 홈에서 가느다란 검은 선이 흘러나왔다. 선은 명부가 아니라 접견실 바닥을 향했다.
마렌이 붓을 멈췄다.
“반응이 시작됐습니다.”
“원인은 적지 마십시오.”
카일은 흰 재를 뿌리고 철판을 세웠다. 선이 재에 닿자 검은 빛이 튀었다. 라시안의 손목 자국도 같은 순간 부풀었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한 조각이면 충분하다. 저 선을 먹어라. 두 번째가 깨어난다.
‘깨어나는 건 내가 아니라 네 쪽일지도 모른다.’
카일은 손을 뻗지 않았다.
“라시안. 이 반응을 멈추기 위해 제가 힘을 쓰는 것에 동의합니까?”
“당신의 힘은 사람을 고치는 힘이 아닙니까?”
“오염을 일부 덜어낼 수는 있습니다. 사라진 것을 돌려놓지는 못합니다. 지금 선을 삼키면 증상이 줄어들 수도 있지만 무엇이 남는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라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하지 마십시오.”
카일은 즉시 손을 내렸다.
“그 선택을 기록하십시오.”
마렌이 적었다.
‘라시안은 제한 정화에 동의하지 않음. 금속판의 반응은 지속 중.’
라시안은 바닥을 기는 선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매일 밤 열여섯 번째 종이 울린 뒤에 누군가 제 이름을 부릅니다.”
“누군지 보았습니까?”
“아니요. 목소리만 들었습니다. 들을 때마다 이 선이 짙어졌습니다.”
“무슨 말을 했습니까?”
“두 번째가 늦었다고 했습니다.”
마렌은 그 말을 따로 적었다.
‘라시안의 진술: 열여섯 번째 종 뒤에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음. 문장: 두 번째가 늦었다. 장치의 음성인지는 미확인.’
총서기관이 창백해졌다.
“황태자를 즉시 지하 의무실로 옮겨야 합니다.”
“그 의무실이 열여섯 홈 봉인실과 같은 위치라면 더더욱 안 됩니다.”
카일은 라시안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당신은 어디로 가고 싶습니까?”
“내 이름을 부르는 곳을 확인하겠습니다.”
“거부할 수 있습니다.”
“거부하면 계속 이 방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건 선택이 아니라 대기입니다.”
라시안은 침대 옆의 빈 서류를 집었다.
“동의서를 쓰겠습니다. 목적지는 황궁 지하 봉인실. 귀환 위치는 이 방으로 적으십시오.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누가 나를 데려갔는지 모두가 알 수 있게요.”
카일은 라시안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 조건을 지키겠습니다.”
지하 계단은 궁정 지도에 정확히 그려져 있지 않았다.
총서기관은 앞장서면서도 매 열여섯 걸음마다 멈췄다. 마렌은 계단의 수와 멈춘 시각을 적었고 레오나는 뒤쪽 문이 닫히지 않게 쇠막대를 걸었다.
“라시안은 황태자 접견실로 돌아갑니다. 누구도 다른 곳으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카일이 기록판을 들었다.
총서기관이 돌아보았다.
“황궁에서 황태자의 이동을 허가하는 사람은 나입니다.”
“그 문장을 서류에 적으십시오. 수령자라면 이름을 적고 책임을 지면 됩니다.”
총서기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계단 끝에는 세 갈래 절개가 난 검은 철문이 있었다. 금속판을 가까이 가져가자 두 번째 홈에서 선이 흘러나왔다. 선은 라시안이 아니라 문 아래의 틈으로 빠졌다.
“문을 열기 전에 관측자를 정합니다.”
카일이 말했다.
“마렌은 박자를 기록하고 도렌은 양식을 대조하십시오. 레오나는 문턱을 차단합니다. 에단은 황실 명부의 증인입니다. 라시안은 본인이 원하는 때에만 한 걸음 나옵니다.”
철문에는 잠금쇠가 없었다. 총서기관이 손을 대기도 전에 안쪽에서 금속이 미끄러졌다.
첫 번째 박자에 문이 열렸다. 두 번째 박자에 안쪽 벽에 열여섯 개의 홈이 드러났다. 가운데 두 홈만 검게 젖어 있었다.
“북부 수도원 기록실과 같은 구조입니다.”
마렌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확인된 건 홈의 수와 검은 흔적입니다. 구조가 같다는 건 아직 추정입니다.”
세 번째 박자에 바닥의 글자가 떠올랐다.
두 번째 수취인: 라시안.
그 아래에 다른 문장이 이어졌다.
인계 대기.
라시안이 한 걸음 물러났다. 검은 선이 그의 발끝까지 닿았지만 철판과 흰 재 앞에서 멈췄다.
“저 문장을 지우면 됩니까?”
“지우는 건 기록을 없애는 일입니다. 먼저 누가 썼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카일은 글자 옆에 발행자와 날짜와 수령자 칸을 그렸다. 세 칸 모두 비어 있었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비어 있는 칸은 네 것이다. 이름을 채워라.
카일은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검은 흔적이 목 아래에서 욱신거렸다.
“이 문서의 수령자는 없습니다.”
그는 라시안의 동의서와 황실 명부를 문 밖 철판에 나란히 놓았다.
“라시안은 귀환 위치가 있는 당사자입니다. 장치의 인계 대상이 아닙니다.”
도렌이 같은 문장을 읽었다.
검은 선이 문 아래에서 흔들렸다. 열여섯 번째 홈이 밝아지며 깊은 곳에서 기침이 들렸다.
그 기침은 라시안의 것이 아니었다.
문 안쪽에서 라시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일. 첫 번째를 데려오면 두 번째가 깨어난다.”
라시안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나는 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카일은 그 사실을 기록하게 했다.
“확인된 사실. 문 안에서 라시안과 같은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라시안은 발화하지 않았다고 진술했습니다.”
열여섯 개의 홈 중 꺼져 있던 첫 번째 홈이 천천히 붉어졌다.
카일은 북부 초소의 서쪽 돌담과 라우렌의 부러진 휘장을 떠올렸다. 첫 번째라는 이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아직 몰랐다.
다만 문은 이미 다음 사람을 정해 둔 듯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북부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