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53화: 두 번째 수취인
검은 문 안쪽의 네 불빛이 라우렌의 이름을 향한 채 멈춰 있었다.
서쪽 돌담 아래에 선 생존자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라우렌은 부러진 단장 휘장을 내려다보다가 검은 문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제가 두 번째라면 안으로 가겠습니다.”
“안 됩니다.”
카일은 라우렌과 문 사이에 철판을 세웠다.
“당신은 귀환 호위대의 책임자입니다. 문이 당신을 수령자로 부른다고 해서 그 역할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제 목숨 하나로 세 사람이 돌아올 수 있다면요?”
“그건 귀환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검은 선이 라우렌의 발끝을 향해 뻗었다. 레오나가 검을 내밀었지만 칼날은 선을 베지 못했다. 선은 칼날을 피해 라우렌의 서약서로 기어갔다.
마렌이 기록판을 움켜쥐었다.
“선이 이름에서 서약서로 이동했습니다.”
“직접 본 사실로 적으십시오. 수령자로 인정했다는 해석은 뒤에 따로 두고요.”
카일은 서약서를 철판 위에 펼쳤다. 종이 아래에는 세 가지 조건과 귀환 호위대라는 역할이 적혀 있었다. 그는 서약서 옆에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를 공동 귀환 위치로 적었다.
“이 기록의 수령자는 없습니다. 라우렌은 호위 책임자이며 누구의 소유도 아닙니다.”
도렌이 그 문장을 읽었다.
“귀환 위치는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 수령자 없음. 라우렌은 호위 책임자이며 누구의 소유도 아님.”
검은 선이 서약서의 가장자리를 맴돌았다. 네 불빛 중 두 개가 라우렌에게서 떨어졌다. 남은 불빛 하나는 서약서의 빈 칸을 파고들려 했고 다른 하나는 카일의 금속판을 향했다.
카일은 금속판을 문턱에 내려놓았다.
산맥 능선과 작은 점이 새겨진 판이었다. 점 위로 검은 빛이 스며들더니 판의 가장자리에 없던 홈 하나가 드러났다. 홈 안쪽에는 숫자 2와 비슷한 절개가 있었다.
“목적지는 사람으로 적지 않습니다. 위치로 적습니다.”
‘확인된 내용: 금속판의 점이 검은 문에 반응함. 추정: 점은 북부 수도원 잔해를 가리킴.’
검은 선이 라우렌에게서 물러나 금속판의 홈으로 스며들었다. 문 안쪽에서 낮은 소리가 울렸다.
“두 번째를 데려와라.”
라우렌의 손이 검자루 위에서 굳었다.
“저를 두고 가시겠습니까?”
“당신을 두고 가는 게 아닙니다. 당신에게 맡기는 겁니다.”
카일은 생존자와 부상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의 귀환 위치를 지키십시오. 이름과 상태를 다시 확인하고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사람은 움직이지 마십시오. 수령자와 귀환 위치가 비어 있는 명령서는 따르지 마십시오.”
라우렌은 생존자들이 보는 앞에서 같은 서약을 다시 말했다. 검은 문은 반응하지 않았다.
해가 능선을 넘기 전 카일은 레오나와 마렌과 도렌만 데리고 북부 수도원으로 향했다.
유르는 초소에 남아 라우렌과 함께 서쪽 돌담의 귀환 위치를 지켰다. 카일은 초소와 수도원 사이의 돌무더기마다 흰 천 조각을 묶었다.
“돌아갈 길을 잃으면 이 표식을 따라갑니다.”
산길은 오래전에 끊겨 있었다. 열여섯 번째 돌을 지난 곳에서 낡은 수레 하나가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바퀴에는 흙이 묻지 않았고 수레 아래에는 세 갈래 절개가 찍힌 검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마렌이 먼저 멈췄다.
“상자를 열기 전에 위치를 적겠습니다.”
수레 안쪽의 빈 양식 한 장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위쪽에는 ‘수취 전 대기’가 찍혀 있었고 아래에는 이름과 역할을 적는 칸이 있었다. 수령자 칸은 비어 있었다.
도렌의 표찰이 종이 쪽으로 끌려갔다.
도렌은 두 손으로 표찰을 붙잡았다. 검은 선이 그의 손목을 돌아 표찰 뒤쪽에 매듭을 만들었다.
“놓지 마십시오.”
레오나가 말했다.
“놓으면 제가 수령자가 됩니다.”
카일은 도렌이 알고 있는 것과 추정하는 것을 나눠 물었다.
“그 문장을 어디서 배웠습니까?”
“회수 교육에서 들었습니다. 대기자는 이름이 비어 있는 동안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대기자가 수령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누가 가르쳤습니까?”
“얼굴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회색 설비복을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검은 선이 도렌을 수레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레오나는 선을 자르지 않고 수레 바퀴와 돌을 밧줄로 묶었다. 마렌은 열세 번째 돌부터 선이 움직인 시간을 적었다.
카일은 철판을 상자 옆에 세웠다.
“공동 귀환 위치는 남쪽으로 열여섯 번째 표식입니다. 관측자는 마렌. 기록 보조는 도렌. 차단은 레오나. 수령자는 없습니다.”
도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문장을 읽었다.
선이 멈췄다. 그러나 종이 아래에 남은 검은 막은 철판의 모서리를 타고 올라왔다.
파멸의 별이 손바닥 안쪽에서 웃었다.
―이번에는 전부 먹어라. 대기자를 비우면 길이 열린다.
‘길을 여는 것과 사람을 지우는 건 다르다.’
카일은 검은 막의 가장 얇은 부분만 손끝으로 끌어당겼다. 차가운 것이 손가락에서 팔로 흘러들었다. 목 아래까지 올라온 검은 흔적이 턱밑으로 한 마디 더 번졌다.
카일은 즉시 손을 놓았다.
“제한 흡수입니다. 남은 오염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검은 선은 양식에서 떨어져 상자의 세 갈래 절개 안으로 스며들었다. 상자 안에는 같은 양식이 열여섯 장 들어 있었다. 첫 번째 칸은 검게 칠해졌고 두 번째 칸에는 북부 수도원을 표시한 점이 찍혀 있었다. 점 아래에서 가느다란 선 하나가 남쪽으로 뻗었다.
“이 양식은 북쪽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도렌이 말했다.
“확인된 건 점과 선입니다. 선의 목적지는 아직 모릅니다.”
카일은 상자를 증거 봉투에 넣어 봉인했다. 수레는 그 자리에 두었다.
북부 수도원 잔해는 해가 진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종탑은 반쯤 무너져 있었고 안뜰에는 검은 재가 얇게 쌓여 있었다.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금속판의 점만 일정한 간격으로 빛났다.
마렌이 손을 들었다.
“빛이 열여섯 번 깜박였습니다.”
열여섯 번째 빛이 꺼지자 종탑 아래에서 종이 울렸다.
첫 번째 울림에 돌바닥의 틈이 열렸다. 두 번째 울림에 검은 선이 문간으로 흘렀다. 열세 번째 울림부터 선은 일행의 발밑을 따라 움직였다.
레오나가 카일의 앞을 막았다.
“이번에는 누구를 노립니까?”
선은 도렌의 표찰과 레오나의 검집과 마렌의 기록판을 차례로 스쳤다. 사람을 고르는 움직임처럼 보였지만 확정할 수는 없었다.
카일은 셋을 다른 위치에 세웠다.
“이름부터 말합니다. 역할과 현재 위치는 붙이지 마십시오.”
“카일.”
“레오나.”
“마렌.”
도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검은 선이 그의 표찰을 감고 있었다.
“도렌.”
카일이 낮게 불렀다.
“이름만 말하십시오.”
“도렌.”
“한 번 더.”
“도렌.”
그의 목소리가 흔들릴 때마다 선의 매듭이 느슨해졌다. 도렌은 표찰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나는 수령자가 아닙니다.”
검은 선이 다시 팽팽해졌다.
카일은 도렌의 선언을 사실로 기록하지 않았다.
열여섯 번째 종이 울렸다. 종탑 뒤의 벽이 안쪽으로 밀리며 좁은 계단을 드러냈다.
유르가 남긴 표식은 계단 입구까지 이어졌다. 카일은 흰 재로 퇴로를 표시했다.
“내려갑니다. 목적지는 수도원 지하 기록실로 추정합니다. 수령자는 없습니다.”
계단 아래에는 열여섯 개의 홈이 난 금속판이 놓여 있었다. 한가운데 홈 두 개만 검게 젖어 있었다. 카일은 라우렌이 건넨 금속판을 그 위에 맞췄다.
판이 홈에 들어가자 바닥 아래에서 얇은 빛이 올라왔다. 고정된 금속판 표면에 눌려 있던 글자가 드러났다.
첫 번째 수취인: 하렌.
두 번째 수취인: 라시안.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더 있었다.
상태: 미도착.
확인 위치: 황도 지하.
마렌의 붓이 허공에서 멈췄다.
카일은 황태자의 불안정한 호흡과 목 아래에 번진 검푸른 선을 알고 있었다. 그 병이 북부 수도원의 기록에 적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이름 옆에 선을 그었다.
“표기된 이름입니다. 현재 황태자 라시안과 동일하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마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서의 발행자와 날짜도 없습니다.”
“그것도 적으십시오. 이름을 찾았다고 사람을 찾은 건 아닙니다.”
도렌은 두 기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렌은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첫 번째 칸이 검게 지워져 있습니다. 회수 절차가 끝났다는 표시일 수도 있습니다.”
도렌의 말은 추정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불빛이 꺼지고 네 번째 불빛이 밝아진 장면과 맞물리자 무시할 수도 없었다.
기록실 가장 안쪽에서 마른 기침이 들렸다.
레오나가 검을 들었다.
“사람이 있습니다.”
두 번째 기침이 이어졌다. 짧고 거친 호흡이었다. 카일의 머릿속에 황궁에서 들었던 라시안의 숨소리가 스쳤다.
파멸의 별이 손목 안쪽에서 낮게 속삭였다.
―두 번째가 저 아래 있다. 문을 열어라. 병든 살을 먹으면 너는 더 강해진다.
‘확인하지 않은 병을 먹을 수는 없다.’
카일은 기록판을 들어 올렸다.
“안쪽 사람은 이름과 상태를 말하십시오. 이름을 모르면 역할과 위치만 말합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검은 선 하나가 금속판의 두 번째 홈에서 남쪽으로 빠져나갔다. 계단 벽을 뚫은 선은 황도를 향하는 길처럼 이어졌다.
마렌이 숨을 삼켰다.
“선의 방향은 남쪽입니다.”
“방향만 기록하십시오. 황도라고 확정하지 마십시오.”
카일은 라시안의 이름을 철판으로 덮었다. 검은 선이 철판 아래에서 세 번 떨렸다.
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번째를 데려와라.”
이번에는 목소리가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가까웠다.
레오나가 계단 아래를 노려보았다.
“안쪽을 확인하겠습니다.”
“아니.”
“안에 사람이 있다면 구해야 합니다.”
“사람이 있다는 것과 라시안이라는 건 아직 다른 사실입니다.”
카일은 계단 입구와 기록실 사이에 철판을 세우고 흰 재로 경계를 만들었다.
“오늘은 아무도 데려가지 않습니다. 라우렌에게 맡긴 귀환 위치를 비워 둘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건 기록과 방향뿐입니다.”
그는 이동표의 수령자 칸에 선을 긋고 적었다.
‘수령자 없음. 확인 대상: 기록에 적힌 라시안이라는 표기. 확인 방법: 황도에서 생존자와 문서의 동일성 대조.’
도렌이 그 문장을 읽었다. 검은 선은 잠시 멈췄다가 철판 가장자리를 타고 위로 올라왔다.
“문이 화를 냅니다.”
“문이 화를 낸다는 건 추정입니다.”
카일은 올라오는 선을 손으로 막지 않았다. 파멸의 별에게 먹이를 주지도 않았다. 선은 철판 위에 남쪽을 가리키는 가느다란 흠집만 남긴 채 멈췄다.
기록실 바닥 아래에서 네 번째 불빛이 켜졌다.
그 빛과 함께 기침이 한 번 더 들렸다. 이번에는 라시안이 황궁에서 숨을 고를 때마다 내던 소리와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
“황도로 돌아갑니다.”
레오나가 계단을 보았다.
“안쪽을 두고요?”
“두고 가는 게 아닙니다. 수령자로 넘기지 않는 겁니다.”
카일은 라시안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검은 문이 먼저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북부 수도원 아래에서 남쪽으로 뻗은 선이 천천히 맥박쳤다.
황도에 있는 두 번째 수취인이 눈을 뜨기라도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