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52화: 성기사단의 충성
검은 문이 열여섯 번째 박자에 걸린 뒤에도 닫히지 않았다.
문 안쪽의 네 불빛은 사람의 눈처럼 카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존자 아홉 명은 서쪽 돌담 아래에 모였고 레오나는 그들과 문 사이를 가로막았다.
“문턱을 넘지 마십시오.”
카일이 말했다.
“안쪽에 있는 사람은 이름과 상태를 말하십시오. 말할 수 없다면 역할과 위치만 말합니다.”
첫 번째 불빛이 흔들렸다.
“부상자 셋. 북부 초소 지하 통로 안쪽입니다.”
“귀환 위치는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입니다. 수령자는 없습니다.”
카일은 마렌에게 시선을 보냈다.
“직접 들은 문장과 불빛에 대한 추정을 나눠 기록하십시오.”
도렌이 기록판을 들어 올렸다.
“관측자는 마렌. 확인자는 도렌. 차단과 호위는 레오나. 수령자는 없음.”
문 안쪽에서 돌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검은 선 하나가 문턱을 지나 도렌의 표찰을 향했다. 흰 재의 경계 앞에서 선은 멈췄다.
레오나가 검을 뽑았다.
창백한 손이 문틈으로 뻗어 나왔다. 손목에는 검은 실이 감겨 있었고 매듭에는 세 갈래 절개가 새겨져 있었다.
“손부터 확인합니다. 무기를 들고 나오지 마십시오.”
첫 번째 부상자가 문턱을 기어 나왔다. 흰 망토는 찢겨 있었고 다리에는 검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뒤에서 두 성기사가 그를 부축했다.
세 사람은 검을 안쪽에 내려놓고 차례로 나왔다. 마렌은 이름과 상태를 받아 적었다.
마지막으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의 갑옷에는 태양신전의 문양이 남아 있었지만 가슴의 금빛 장식은 반으로 부러져 있었다. 어깨에는 단장의 표식이 붙어 있었다.
“라우렌입니다. 전 태양신전 성기사단장입니다.”
레오나의 검끝이 그의 목 앞으로 올라갔다.
“전 단장이 왜 검은 문 안에 있었지?”
“돌아가야 한다고 적힌 사람들을 확인하러 들어갔습니다.”
그의 대답보다 오래된 피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라우렌은 무기를 내려놓은 채 철판 앞에 앉았다.
카일은 부러진 단장 휘장과 접힌 문서를 철판 위에 올려놓았다. 라우렌은 휘장에 손을 대지 않았다.
“문서의 발신자는 누구입니까?”
“태양신전 북부 행정실의 봉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정식 명령서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기사들을 데려갔습니까?”
“북부 수도원 잔해의 주민과 물자를 회수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귀환 위치는 없었고 수령자 칸에는 ‘두 번째 수취인’이라는 말만 남아 있었습니다.”
마렌의 붓이 멈췄다.
라우렌이 문서의 반쪽을 돌려 보였다. 검게 번진 글자 사이로 문장이 드러났다.
‘첫 번째가 안에 있으면 두 번째는—’
그 아래에는 다른 필체가 겹쳐 있었다.
‘두 번째 수취인에게 인계할 것.’
수취인의 이름은 비어 있었다.
도렌이 낮게 말했다.
“대기자는 결국 수령자가 된다.”
라우렌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 문장은 성기사단의 교육에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회수한다고 배웠습니다. 수도원에 도착한 뒤 그 말의 뜻을 알게 됐습니다.”
“사람을 물건처럼 옮기라는 명령이었습니까?”
레오나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 명령을 받았습니다.”
“따랐나?”
“처음에는.”
라우렌은 부러진 휘장을 내려다보았다.
“수도원 앞까지 사람들을 몰고 갔습니다. 그곳에서야 명령의 목적을 의심했고 수행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단장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럼 왜 휘장을 갖고 있지?”
“제가 어디까지 따랐는지 숨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카일은 별의 눈으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보인 것은 죄책감의 균열뿐이었다. 무죄의 증거는 아니었다.
“수도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검은 불빛 하나가 꺼졌습니다. 문 안의 사람들은 서로의 이름을 잊기 시작했습니다. 한 명은 자신이 왜 칼을 들었는지 몰랐고 다른 한 명은 제 이름을 부르지 못했습니다.”
라우렌은 검은 실이 감긴 손목을 내밀었다.
“이 실을 끊으려다 문 안으로 끌려갔습니다. 세 번째 불빛 앞에서 누군가 하렌이라는 이름을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하렌인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하렌을 본 게 아니라 하렌이라는 말을 들은 겁니다.”
카일이 마렌에게 말했다.
“둘을 나눠 적으십시오.”
“이 문이 무엇인지 압니까?”
“모릅니다. 다만 사람을 안으로 넘긴 뒤 이름과 역할을 자기 칸에 넣는 장치처럼 보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돌아갈 위치를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왜 다시 나왔지?”
“당신이 귀환 위치를 말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문을 열었다고 생각합니까?”
“문을 연 건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의 문장이 안쪽의 명령과 달랐습니다.”
카일은 라우렌의 이름 옆에 수령자 칸을 만들지 않았다.
새벽빛이 산맥 아래로 번질 때 생존자들은 서쪽 돌담 앞에 모였다.
부상한 성기사 셋은 벽에 기대 앉았고 유르는 이름과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라우렌은 부러진 휘장을 돌 위에 올려놓았다.
“왜 모두를 불렀습니까?”
“충성은 어두운 방에서 받지 않습니다.”
카일은 기록판을 세웠다.
“누구에게 무엇을 약속하는지 듣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한 생존자가 라우렌을 보며 물었다.
“당신들이 우리를 데려가려 했습니까?”
“처음에는 그 명령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늦음 때문에 사라진 사람이 있습니다.”
라우렌은 변명하지 않았다.
레오나가 칼자루를 눌렀다.
“그래도 왜 무릎을 꿇겠다는 거지?”
“성별교의 깃발 아래서 사람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걸 봤습니다. 수령자 없는 귀환 위치를 세우는 것도 봤습니다. 내가 알고 있던 성스러운 명령보다 이 규칙이 사람을 더 많이 돌려보냈습니다.”
라우렌은 카일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셀레스티알. 나는 라우렌이며 한때 태양신전 성기사단장이었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나에게 맹세하지 마십시오.”
라우렌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사라지면 원칙도 사라지는 충성은 받지 않습니다. 강제 개종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십시오. 민간인의 식량과 노동을 징발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십시오. 전투원과 피난민과 포로와 오염된 물건을 한 장부에 섞지 않겠다고 맹세하십시오.”
카일은 빈 종이를 내려놓았다.
“이 세 가지를 어기면 검을 내려놓으십시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기록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라우렌은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맹세합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성기사단장의 이름으로 명령하지 않겠습니다. 내 검은 귀환 호위대의 첫 번째 검으로만 쓰겠습니다. 누군가를 데려갈 때는 이름과 목적지와 귀환 위치를 먼저 기록하겠습니다.”
부상한 성기사 셋도 각자의 이름을 적었다. 그들은 라우렌의 부하가 아니라고 밝혔지만 오늘의 서약에 증인으로 남겠다고 했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카일은 그 침묵이 싫지 않았다. 믿음은 박수보다 오래 생각한 뒤 고개를 드는 쪽에 가까웠다.
“조건을 지키는 동안만 충성을 받겠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라우렌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순간 지하에서 낮은 금속음이 울렸다.
첫 번째 박자에 생존자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두 번째 박자에 라우렌의 휘장 안쪽에서 검은 가루가 떨어졌다. 세 번째 박자에 검은 문이 다시 열렸다.
카일은 라우렌을 문에서 멀리 세웠다.
“아무도 문턱으로 가지 마십시오.”
문 안쪽의 불빛 하나가 라우렌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향해 움직였다. 검은 선이 돌바닥을 기어와 빈 수령자 칸을 채우려 했다.
마렌이 외쳤다.
“라우렌의 이름 옆에 선이 닿습니다!”
카일은 흰 재를 선 앞에 뿌렸다. 선은 재를 넘지 않고 종이 가장자리를 따라 돌았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새로운 검이 네 것이 되었다. 문에 넘겨라. 그러면 두 번째도 돌아온다.
‘검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카일은 라우렌의 서약서를 철판 위에 올렸다.
“이 문서는 공동 기록입니다. 수령자는 없습니다.”
도렌이 같은 문장을 읽었다.
“귀환 위치는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 수령자 없음. 라우렌은 귀환 호위대의 책임자이며 누구의 소유자도 아님.”
선이 멈췄다.
문 안쪽의 첫 번째 불빛이 꺼졌다. 네 번째 불빛은 하얗게 밝아졌다.
“반응이 바뀌었습니다.”
마렌이 말했다.
“동시에 일어난 사실과 원인에 대한 추정을 나눠 적으십시오.”
카일은 문턱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빈 칸에 글자가 번지는 것만 바라보았다.
‘두 번째를 데려와라.’
라우렌이 숨을 삼켰다.
“그 문장은 수도원에서도 봤습니다.”
그는 휘장 안쪽에서 얇은 금속판을 꺼냈다. 산맥의 능선과 폐허의 위치가 새겨져 있었고 한곳에 작은 점이 찍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두 번째 수취인의 위치입니다.”
“철판 위에 놓으십시오. 위치와 소지자를 분리해 기록합니다.”
라우렌은 그대로 따랐다.
북부 초소 바깥에서 생존자들이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지하에서는 불빛 하나가 다시 흔들렸다.
카일은 닫히지 않은 검은 문과 서약서와 북부 수도원의 점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전 성기사단장의 충성은 손에 넣었다. 그 대가로 문은 새로운 사람을 요구했다.
“라우렌.”
“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지 않습니다.”
라우렌의 얼굴이 굳었다.
“저를 믿지 않으십니까?”
“믿음과 호위는 다른 문제입니다. 당신은 밖에서 길을 기록하십시오. 나는 문이 누구를 두 번째라고 부르는지 확인하겠습니다.”
검은 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번째를 데려와라.”
이번에는 네 불빛 모두가 라우렌의 이름을 향했다.
산맥 너머 북부 수도원 잔해에서 꺼진 불빛 하나가 다시 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