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48화: 수령자 없는 이송
인계표의 검은 선이 멈춘 줄 알았던 순간이었다.
빈 이동표의 수령자 칸 아래에서 가느다란 선 하나가 다시 움직였다. 선은 글자가 되지 못하고 귀환 위치 칸을 향해 비스듬히 뻗었다.
총서기관이 그 위로 봉인된 문서를 펼쳤다.
“황실 명령이오. 외부 인계자 도렌과 인계표를 황실 심문실로 옮긴다.”
문서 아래에는 붉은 직인이 찍혀 있었다. 수령자 칸에는 ‘황실 심문실’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카일은 문서와 이동표 사이에 빈 철판을 세웠다.
“방의 이름은 수령자가 아닙니다.”
“황실 심문실이 물건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오?”
“방은 물건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열고 누가 확인하고 누가 돌려보낼지는 방이 정하지 못합니다.”
총서기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직인이 있소.”
“직인은 책임자의 이름이 아닙니다.”
카일은 이동표의 네 칸을 짚었다.
“이동자와 관측자와 수령자와 귀환 위치가 정해지지 않으면 이동하지 않습니다.”
“황실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것이오?”
“명령의 마지막 칸이 비어 있다고 기록하는 겁니다.”
레오나가 카일의 옆에 섰다. 그녀는 칼을 뽑지 않고 빈 철판을 들어 경비들의 창끝과 이동표 사이에 세웠다.
“선을 넘는 사람은 역할과 위치를 말하십시오.”
“나는 총서기관이오.”
“수령자입니까?”
총서기관이 입을 다물었다.
마렌의 붓이 종이를 긁었다.
‘총서기관이 이송 명령을 제시함. 수령자 칸에는 기관명만 기재됨. 개인 수령자와 귀환 책임자는 확인되지 않음.’
그때 인계표의 검은 선이 한 뼘 더 길어졌다. 선 끝은 도렌이나 카일이 아니라 이동표의 귀환 위치 칸을 향했다.
“움직였습니다.”
도렌이 낮게 말했다.
“당신의 이름을 쓴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카일은 인계표를 보지 않았다. 파멸의 별이 손바닥 안쪽에서 굶주린 목소리를 냈다.
―빈칸을 네 이름으로 채워라. 책임이 생기면 주인도 보인다.
‘책임이 생기는 게 아니라 주인이 만들어질 뿐이다.’
카일은 마렌에게 말했다.
“원본은 움직이지 마. 빈 양식 두 장을 가져와.”
마렌은 깨끗한 이동표 두 장을 가져왔다. 카일은 두 양식을 외부 인계표와 작은 철문에서 멀리 떨어진 철판 위에 놓게 했다.
첫 번째 양식의 수령자 칸에는 ‘황실 심문실’을 적었다. 두 번째 양식은 수령자 칸을 비워 두었다. 두 양식의 귀환 위치 칸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한 번만 측정합니다. 표의 거리와 등불의 높이를 맞추십시오.”
카일은 물그릇과 가는 실을 양식 양쪽에 배치했다.
오르단이 첫 번째 양식 앞에 섰다.
“황실 심문실이 수령자요.”
미르는 두 번째 양식 앞에서 말했다.
“수령자는 비어 있습니다.”
“기관명과 빈칸을 읽은 발화만 기록합니다.”
열세 번째 박자부터 마렌이 세었다.
열네 번째 박자에 첫 번째 양식의 물그릇 수면이 흔들렸다. 열다섯 번째 박자에는 가는 실이 등불 쪽으로 기울었다.
열여섯 번째 박자에 두 번째 양식의 귀환 위치 칸 옆에서 먼지가 한 줄 움직였다.
마렌이 두 양식의 위치를 번갈아 확인했다.
“첫 번째 양식은 수면과 실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 양식은 귀환 위치 칸 옆의 먼지가 이동했습니다.”
“잉크를 이해한 겁니다.”
미르가 말했다.
“그렇게 쓰지 마십시오.”
카일이 막았다.
“두 표는 잉크와 위치가 다릅니다. 지금 확인한 건 그 조건에서 나타난 변화뿐입니다.”
반복 측정을 지시하려던 카일의 손이 멈췄다. 더 세면 관측이 아니라 장치에 문장을 가르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그때 도렌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첫 번째 표가 사라진 뒤에야 끈을 당겨야 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 문장은 어디서 들었습니까?”
“교육에서요.”
“누가 가르쳤습니까?”
“모릅니다.”
도렌은 손목을 움켜쥐었다.
“첫 번째 표가 사람인지 물건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표가 사라지기 전에 끈을 당기면 대기자가 수령자로 바뀐다고 했습니다.”
오르단과 미르가 동시에 반박하려다 멈췄다. 둘 다 그 문장을 모른다고 말했지만 대기자의 수령 전환이라는 뜻은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북쪽 배수 덮개 아래에서 끈이 당겨지는 소리가 났다.
회색 천 조각이 금속판의 절개에 걸린 채 안쪽으로 한 뼘 움직였다.
도렌이 흰 재 선을 넘으려 했다.
“제가 잡겠습니다.”
레오나의 검집이 그의 무릎 앞을 막았다.
“멈추십시오.”
“잡지 않으면 표가 넘어갑니다.”
“당신은 관측 위치에 있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지키는 것과 당기는 것은 다릅니다.”
도렌은 손목을 내밀었다. 붉은 자국은 인계표 끈의 폭과 비슷했다.
“저 자국이 생긴 날에도 끈을 잡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뒤에서 제 손을 끌었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없었습니다.”
“그게 지금 표를 가져온 사람이라는 증거는 없소.”
총서기관이 말했다.
“그래서 사람이라고 쓰지 않습니다.”
카일은 경비를 보았다.
“외부 끈이 움직인 시각과 도렌의 손 위치만 적습니다.”
레오나는 경비들의 창을 낮췄다.
“바깥으로 나가려는 사람은 이동표에 이름을 적습니다. 들어오려는 사람은 역할을 먼저 말합니다.”
“바깥에 사람이 있다면 놓치게 되오.”
총서기관이 소리쳤다.
“지금 나가면 안쪽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영영 모르게 됩니다.”
카일은 긴 철판 두 개를 가져오게 했다. 하나는 배수 덮개와 인계표 사이에 세웠고 다른 하나는 도렌의 손과 끈 사이에 세웠다.
도렌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렇게 막으면 끈이 제 손목을 대신할 겁니다.”
“근거는요?”
“그렇게 배웠습니다.”
카일은 도렌을 흰 재 안에 남겼다.
“모른다는 건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도 당신의 손을 끈 대신 표에 대지는 않습니다.”
열세 번째 박자가 시작되었다.
열네 번째 박자에 배수 덮개 아래 금속판이 떨렸다. 회색 천 조각의 끝이 첫 번째 철판에 닿았다.
열다섯 번째 박자에 외부 인계표의 검은 선이 빈 수령자 칸에서 빠져나왔다. 선은 도렌의 손목을 스치지 않고 이동표의 귀환 위치 칸을 향했다.
오르단이 몸을 숙였다.
“지금이오. 회수 담당자가 표를 가져가야 하오.”
그의 손이 인계표를 향하자 레오나의 검집이 손등 앞을 막았다.
“발신자와 수령자와 반환 조건은요?”
오르단은 입을 다물었다.
열여섯 번째 박자에 검은 선이 귀환 위치 칸 옆에서 길게 갈라졌다. 인계표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렌이 즉시 적었다.
‘오르단의 손은 표에 닿지 않음. 검은 선은 도렌의 손목을 지나지 않고 귀환 위치 칸 방향으로 번짐.’
도렌의 손은 끝까지 끈에 닿지 않았다.
총서기관이 붉은 직인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귀환 위치라도 내가 정하겠소. 황실 심문실에서 기록고로 돌려보내면 되지 않소.”
“누가 돌려보냅니까?”
“내가 명령하오.”
“명령자는 이동자가 아닙니다.”
카일은 직인과 이동표를 번갈아 보았다.
“방의 이름과 명령자의 말만으로는 수령자와 귀환 책임을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황실의 권한을 빼앗고 싶은 거지.”
“권한은 남깁니다. 누가 들고 있는지 적자는 겁니다.”
카일은 수령자 칸에 붓을 대지 않았다. 대신 옆 여백에 적었다.
‘수령자 미확정으로 이동 보류. 귀환 위치와 귀환 책임 미확정.’
총서기관의 직인이 종이를 향해 내려왔다.
레오나가 그의 손목 앞에 빈 철판을 세웠다.
“직인을 찍는 사람의 위치를 먼저 기록하십시오.”
총서기관의 손이 멈췄다.
그 순간 작은 철문 안쪽에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번째……”
미르가 입술을 달싹였다.
“두 번째 수취인은—”
“끝까지 말하지 마십시오.”
카일이 잘랐다.
마렌이 다시 박자를 세었다.
열네 번째 박자에 작은 철문 안쪽의 가죽막이 부풀었다.
열다섯 번째 박자에 북쪽 덮개 아래의 얇은 금속판이 두 번 떨렸다.
열여섯 번째 박자에 빈 양식의 귀환 위치 칸에 묻은 먼지가 아래로 떨어졌다.
총서기관의 직인은 종이에 닿지 않았다.
구리관을 지난 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돌아—”
뒤의 음은 금속 떨림에 묻혔다.
북쪽 회랑 바깥에서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검은 끈은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을 향해 한 번 당겨졌다.
도렌의 눈이 커졌다.
“귀환 위치가 안쪽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단정하지 마십시오.”
카일의 목소리도 낮아졌다.
빈 수령자 칸의 검은 선은 귀환 위치 칸을 지나 기록고 아래의 작은 철문 방향으로 이어졌다.
파멸의 별이 웃었다.
―이번에는 네가 돌아갈 차례다.
‘돌아가는 건 사람이 아니라 표다.’
카일은 빈칸을 채우지 않았다.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기록고 안쪽과 북쪽 회랑 바깥을 동시에 봅니다. 귀환 위치를 확인하기 전까지 누구도 이동하지 않습니다.”
총서기관이 물었다.
“그동안 도렌은 어떻게 하겠소?”
카일은 흰 재 안의 도렌을 보았다.
“공동 증언자로 남습니다. 수령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작은 철문 안쪽에서 세 번의 두드림이 났다.
이번에는 북쪽 배수 덮개 아래의 금속판도 같은 횟수로 떨렸다.
하지만 바깥에서 응답한 사람은 없었다.
카일은 움직이지 않은 직인과 멈춘 검은 선 사이에 빈 철판을 세웠다.
아직 누구도 표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도 돌아갈 위치만 먼저 정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