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44화: 역할을 묻는 문
작은 철문 안쪽에서 숨이 끊기는 소리가 났다.
한 번 들이마시고 멈췄다가 얕게 내쉬는 소리였다. 사람의 호흡처럼 들렸지만 좁은 관을 지나는 바람도 같은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총서기관은 기다리지 않았다.
“경비 둘을 부르시오. 철문을 뜯어 안을 확인하겠소.”
“문을 뜯으면 소리의 위치와 공명 조건을 잃습니다.”
카일은 철문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안에 사람이 있다면 더 조심해야 합니다. 통로가 무너지면 구할 사람까지 잃습니다.”
“그대는 아직도 장치와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소.”
“그래서 구분할 절차를 세우는 중입니다.”
카일은 레일과 철문 사이에 빈 철판을 놓았다. 철판의 앞뒤로 흰 재를 가늘게 뿌렸다. 사람의 발이 어느 쪽에 있었는지 남기기 위한 선이었다.
마렌은 장부를 펼치지 않고 새 기록지를 꺼냈다.
“이번에는 이름을 적지 않겠습니다.”
“역할과 위치와 발화를 나눠 적어.”
카일이 말했다.
“보관 담당자. 기록 담당자. 회수 담당자. 확인자 순서로 묻는다.”
오르단의 눈이 철문으로 향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가 장부의 확인자 칸을 보았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보관 담당자.”
마렌이 철문을 향해 말했다.
안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기록 담당자.”
이번에도 침묵이었다.
세 번째 질문을 하려는 순간 철문 안쪽에서 긁는 소리가 두 번 이어졌다.
“회수 담당자.”
긁는 소리가 멎었다. 대신 문 아래에서 가느다란 금속음이 났다.
“확인자.”
이번에는 대답 대신 철문 깊은 곳에서 마른 숨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렌의 펜촉이 허공에서 멈췄다.
“단어에 반응했다고 적을까요?”
“아니. 질문 뒤에 긁는 소리와 금속음과 공명음이 각각 있었다고 적어.”
카일은 철문을 바라보았다.
“뜻을 이해했다고 쓰는 순간 우리가 장치의 입이 됩니다.”
오르단이 낮게 웃었다.
“역할을 묻는 옛 절차를 알고 있군.”
레오나가 검집을 세웠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문서에 흔히 나오는 표현이오.”
“현행 문서에는 없소.”
세르단의 말에 오르단의 웃음이 사라졌다.
카일은 그를 바로 몰아붙이지 않았다. 사기꾼에게 가장 비싼 증거는 상대가 스스로 내놓은 말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당신이 가진 역할을 따로 확인하죠.”
카일은 철그릇을 가져오게 했다. 오르단의 금속패는 철그릇 안에 놓였고 흰 재가 그 주변을 둘렀다.
“패를 문에 대지 않습니다. 말한 역할과 패의 위치와 문 반응을 따로 적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옛 잠금을 열 수 없소.”
“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르단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떨렸다.
미르를 철문에서 세 걸음 떨어진 곳에 세웠다. 오르단은 반대쪽 벽 앞에 두었다. 레오나는 두 사람 사이에 섰고 마렌은 세 위치를 한 장의 기록지에 표시했다.
“각자 역할을 말하십시오.”
카일이 지시했다.
미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동행 서기관입니다.”
철문은 조용했다.
“봉인 전달관입니다.”
오르단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철그릇 안의 패는 움직이지 않았다. 문 안쪽에서도 반응이 없었다.
오르단이 숨을 삼킨 뒤 말했다.
“회수 담당자입니다.”
금속패의 가장자리에서 검은 점이 천천히 젖었다.
철문 안쪽에서 세 번 긁는 소리가 이어졌다.
레오나가 검집을 오르단의 손 앞에 들이밀었다.
“움직이지 마.”
“패는 내 손에서 떨어져 있소.”
“그래서 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세르단이 철그릇과 문 사이의 거리를 확인했다.
“패가 반응한 시각과 철문 소리가 난 시각은 같습니다.”
“같은 원인인지는 모릅니다.”
카일이 말했다.
“둘 다 따로 적습니다.”
마렌은 붓을 움직였다.
‘오르단이 회수 담당자라고 말한 뒤 패 가장자리의 검은 점이 젖음. 세 번의 긁는 소리 관찰. 발화와 장치 반응의 인과는 미상.’
미르가 철문 쪽으로 한 발 나섰다.
“수취인이 확인되기 전에는 안쪽에서 응답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철문 안쪽에서 짧은 숨이 되돌아왔다.
미르의 얼굴이 굳었다.
“그 말도 현행 교육에 없소.”
세르단이 말했다.
“옛 절차입니다.”
오르단이 끼어들었다.
“오래된 보관 장치에는 이런 공명 구조가 있을 수 있소.”
“그렇다면 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카일이 물었다.
“관측된 것은 철문과 소리뿐이오.”
“질문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레오나의 시선이 오르단에게 꽂혔다.
오르단은 잠시 침묵했다.
“수취 전 대기 공간일 가능성이 있소.”
그 말이 끝나자 철문 아래 바닥 홈에서 낮은 울림이 났다.
총서기관이 앞으로 나섰다.
“열어 보시오.”
“손가락 한 마디 너비만 확인합니다.”
카일은 기록고 담당자를 불렀다.
“문 바깥 레버를 찾으십시오. 위치를 기록하고 열여섯 번째 박자 뒤에 한 번만 움직입니다.”
총서기관이 반발했지만 마렌이 기록지를 들어 보였다.
“책임자는 누구로 적을까요?”
총서기관의 입이 닫혔다.
열세 번째 박자에 철그릇의 패가 미세하게 떨렸다.
열네 번째 박자에 철문 아래 세 갈래 홈의 먼지가 한쪽으로 밀렸다.
열다섯 번째 박자에 철문 안쪽에서 사람의 숨과 비슷한 소리가 세 번 이어졌다.
열여섯 번째 박자.
바닥 안쪽에서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카일은 손을 뻗지 않았다.
기록고 담당자가 바깥 레버를 아주 조금 당겼다.
철문이 손가락 한 마디 너비만 열렸다.
문 바로 뒤에는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문 뒤의 벽에 얇은 구리관이 고정되어 있었고 관 끝에는 낡은 가죽막이 붙어 있었다. 가죽막은 미세하게 들썩이며 숨과 비슷한 소리를 만들었다.
마렌이 사각거울을 문틈 아래로 밀었다.
“몸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쓰지 마.”
카일이 말했다.
“구리관과 가죽막이 보입니다. 안쪽의 깊이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회색 천 조각 하나가 구리관 뒤에 묶여 있었다. 천에는 세 갈래 실밥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매듭을 풀다 만 것처럼 끝부분이 잘려 있었다.
그 아래에서 낡은 봉투가 미끄러져 나왔다.
봉투는 문턱에 걸렸다. 안쪽에서 민 것인지 경사가 만든 움직임인지 알 수 없었다.
오르단이 몸을 숙였다.
레오나가 그의 어깨를 막았다.
“역할과 위치를 말하십시오.”
“나는 봉투를 회수해야 하오.”
“그 역할을 누가 부여했습니까?”
오르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일은 빈 철판을 봉투 앞에 밀어 넣었다. 봉투가 철판 위로 올라오자 마렌이 바깥 표면을 기록했다.
“봉인끈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봉투 아래쪽에 검은 습기가 한 점 있습니다.”
카일의 손바닥 안쪽이 뜨거워졌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열어라. 안쪽에 남은 숨을 먹으면 답이 보인다.
‘사람의 숨은 먹지 않는다.’
―저것은 사람의 숨이 아니다.
‘그래도 먼저 확인한다.’
카일은 철판 끝을 발끝으로 밀었다. 검은 점은 봉투 바깥쪽으로 돌다가 흰 재 앞에서 떨렸다.
“흡수하지 않습니다. 봉투는 열지 말고 외부 상태를 먼저 기록하십시오.”
총서기관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 안에 사람을 살릴 기록이 있을지도 모르오.”
“그 안에 사람을 죽일 장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카일은 봉투의 젖은 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둘 중 무엇인지 모를 때 손부터 대는 사람은 구조자가 아니라 추가 증거입니다.”
마렌이 봉투의 가장자리를 사각거울로 비췄다.
“안쪽 종이가 한 장 보입니다. 글자가 있습니다.”
“읽을 수 있나?”
“일부만요.”
마렌은 거울의 각도를 바꾸었다.
“‘확인자 이름 기재 금—’까지 보입니다. 뒤는 접혀 있습니다.”
세르단이 숨을 들이켰다.
“장부의 문장과 이어질 수 있소.”
“이어진다고 쓰지 않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같은 문장이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때 봉투의 검은 점이 번졌다.
점은 종이 위를 지나 철판 가장자리로 이동했다. 철판에 비친 카일의 손 그림자와 겹쳤다.
문 안쪽의 가죽막이 한 번 크게 부풀었다.
누군가 숨을 내쉰 것처럼 들렸다.
카일은 철문을 더 열지 않았다.
총서기관은 경비를 부르려 했지만 레오나가 문턱에 세운 흰 재를 가리켰다.
“문을 넘을 사람은 역할을 말하십시오.”
“황실 명령이오.”
“명령자의 이름과 목적과 위치를 기록하겠습니다.”
레오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카일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예전이라면 레오나는 그의 말 한마디에 문 안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는 문을 막고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먼저 묻고 있었다.
오르단이 봉투를 가리켰다.
“그건 회수 대상이오. 수취 전 대기 절차에 따라 전달관이 가져가야 하오.”
“수취인은 누구입니까?”
카일이 물었다.
오르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르가 입술을 열었다.
“두 번째 수취인은—”
그는 급히 말을 삼켰다.
철문 안쪽에서 구리관이 떨렸다.
가죽막 뒤에서 말처럼 들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확인자는 문밖에 있다.”
마렌이 펜을 들었다.
“말을 그대로 적을까요?”
“말처럼 들린 음성이라고 적어.”
카일은 봉투를 보았다.
안쪽 종이의 접힌 부분에서 검은 점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한 줄은 오르단의 철그릇 쪽으로 향했고 한 줄은 레일의 빈 열여섯 번째 홈 쪽으로 향했다. 마지막 한 줄은 카일의 발 앞에서 멎었다.
파멸의 별이 웃었다.
―이제 네가 확인자다.
‘아니.’
카일은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확인자가 아닙니다.”
그는 문과 사람 모두에게 들리도록 선언했다.
“나는 기록 책임 관측자입니다. 확인할 수 있는 것만 확인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남깁니다.”
검은 점이 멎었다.
열여섯 번째 빈 홈에서 낮은 금속음이 났다.
문 안쪽의 가죽막이 천천히 오므라들었다. 회색 천 뒤쪽에 사람 손바닥처럼 보이는 눌림이 생겼다. 손가락 다섯 개가 아니라 세 갈래의 검은 점만 천 표면에 번졌다.
마렌의 펜이 종이를 긁었다.
“손바닥 유사 눌림. 실제 손인지 확인하지 못함.”
카일은 봉투를 열지 않았다. 철문을 더 열지도 않았다.
“봉투와 패와 레일을 각각 봉인해. 세 기관에 같은 문장을 보내되 ‘두 번째 수취인’ 뒤에 글자가 끊겼다는 사실만 적어.”
오르단이 낮게 말했다.
“그 문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소.”
“그래서 끝까지 읽지 않는 겁니다.”
카일은 철문 안쪽의 구리관을 바라보았다.
“다음에는 안쪽에서 먼저 역할을 말하게 하죠.”
구리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닫힌 철문 너머에서 누군가 손가락으로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열여섯 번째 칸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선언 직후 금속음이 난 사실만 공동 기록에 남았다. 그 둘이 같은 원인인지 확인할 사람은 아직 문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