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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43화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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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기록고 아래의 빈 이름

북쪽 벽 안쪽에서 긁는 소리가 났다.

한 번 긁고 멎었다가 다시 세 번 이어졌다. 포로 보관실의 경비들이 동시에 창을 들었다.

총서기관은 벽을 가리켰다.

“부수시오. 안에 사람이 있으면 끌어내고 장치면 황실이 회수하겠소.”

카일은 벽보다 증거 상자를 먼저 보았다. 상자는 선반 위에 놓인 채 붉은 봉인끈을 유지하고 있었다. 열여섯 번째 칸에서 난 금속음은 멎었지만 북쪽 벽 안쪽의 소리는 아직 끊기지 않았다.

“벽을 부수면 소리의 위치를 잃습니다.”

“안에 사람이 죽어 가고 있을 수도 있소.”

“그렇다면 먼저 어디에서 숨을 쉬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오르단이 낮게 끼어들었다.

“이 회랑 아래에는 폐쇄 보관층이 없소. 현행 황궁 도면에도 그런 공간은 없습니다.”

그는 말한 뒤 한 박자 늦게 입을 다물었다.

카일은 그 지연을 기억했다. 모르는 사람이 도면을 부정할 때는 대개 바로 부정한다. 알고 있는 것을 감추는 사람은 자기 말이 어디까지 나갔는지 먼저 계산한다.

“폐쇄 보관층이라는 말은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오르단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럼 무엇을 확인하려는 거요?”

“방금 그 말을 어디서 배웠는지부터 기록해야겠죠.”

마렌이 이미 펜을 들고 있었다.

‘오르단이 북쪽 회랑 아래에 폐쇄 보관층이 없다고 발언함. 폐쇄 보관층이라는 표현의 최초 출처는 미상.’

카일은 증거 상자와 북쪽 벽 사이에 빈 철판을 세웠다. 철판 위에는 물그릇을 올리고 벽 아래에는 사각거울을 밀어 넣었다. 레오나는 상자 쪽에 선 경비와 벽 쪽에 선 경비를 나누어 세웠다.

“상자에 손대는 사람과 벽을 여는 사람을 나눠. 둘이 한쪽으로 몰리지 않게 해.”

“알겠습니다.”

세르단은 금빛을 모으지 않았다. 빛이 한쪽을 누르고 다른 쪽을 짙게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손을 내린 채 사각거울과 물그릇만 바라보았다.

마렌이 숨을 세었다.

열세 번째 박자까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열네 번째 박자에 물그릇의 수면이 벽 쪽으로 기울었다.

열다섯 번째 박자에는 벽 아래의 쇠받침이 한 번 떨렸다.

열여섯 번째 박자.

긁는 소리와 함께 바닥 안쪽에서 낮은 금속음이 울렸다. 증거 상자 안쪽의 패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자 밑 빈 홈과 같은 시각에 회랑의 바닥이 울렸다.

“두 반응은 같은 박자입니다.”

마렌이 말했다.

“같은 원인이라고 쓰지 마.”

“기록했습니다.”

카일은 벽의 중앙이 아니라 바닥 가까운 곳을 가리켰다.

“소리는 벽 안쪽이 아니라 바닥판 아래에서 시작됐습니다.”

총서기관이 경비를 불렀다.

“기록고 아래를 열겠소.”

“현행 열쇠만으로 열면 안 됩니다.”

카일이 말했다.

“누가 열었고 누가 안쪽을 보았는지 나눠 적어야 합니다. 오르단의 패와 증거 상자는 서로 다른 곳에 둡니다.”

총서기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대는 황실의 지하실 하나에도 자기 규칙을 세우려 하는군.”

“황실 규칙이 없어서 기록을 만드는 겁니다.”

도망칠 수 있는 통로라면 지금 확인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손을 넣는 순간 그 통로가 자신을 기다린 빈 칸이 될 수도 있었다.

카일은 벽을 부수지 않는 쪽을 택했다.


황실 기록고의 북쪽 끝에는 오래된 철문이 있었다.

문 위에는 현행 도장이 세 겹 찍혀 있었지만 가장 아래 도장은 일부가 긁혀 있었다. 문 오른쪽에는 자물쇠가 두 개 달려 있었다. 하나는 현재 황실 열쇠에 맞았고 다른 하나는 열쇠 구멍이 아니라 세 갈래로 갈라진 얕은 홈이었다.

총서기관은 황실 경비에게 첫 번째 자물쇠를 열게 했다.

“두 번째는 오르단의 패로 열면 되오.”

오르단이 패를 꺼냈다.

카일은 패가 홈에 닿기 전에 막았다.

“접촉하지 말고 가까이만 대십시오.”

“이 패는 절차를 증명하는 물건이오.”

“그러니 패가 반응하는지부터 증명해야 합니다.”

오르단은 패를 홈에서 한 뼘 떨어진 곳에 세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르가 한 걸음 나섰다.

“옛 잠금은 수취인이 확인된 뒤에만—”

그는 말을 삼켰다.

마렌의 펜이 멈췄다.

“문장 끝까지 말해 주십시오.”

“옛 절차를 추측했을 뿐입니다.”

“추측한 문장의 출처를 적겠습니다.”

미르는 입을 다물었다.

세르단이 문 오른쪽의 홈을 살폈다.

“이건 신전의 현행 봉인 홈이 아니오. 중심은 옛 자격패와 비슷하지만 가장자리는 세 번 잘려 있소.”

총서기관은 기록고 담당자를 불렀다.

“담당자가 문을 열고 총서기관은 입회합니다. 세르단 사제는 안쪽 봉인과 도구를 확인하십시오. 오르단과 미르는 문턱 밖에 두고요.”

“왜 내가 밖에 있어야 하오?”

오르단이 물었다.

“당신의 패가 현재 명부와 대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레오나가 문턱에 흰 재를 그었다.

“이 선을 넘는 사람은 이름과 역할을 말하십시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죄를 묻는 선이 아닙니다. 위치를 남기는 선입니다.”

낡은 열쇠가 첫 번째 자물쇠를 열었다. 안쪽에서 오래 묵은 금속 냄새가 흘러나왔다.

두 번째 자물쇠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록고 담당자가 문 안쪽의 작은 레버를 당기자 세 갈래 홈 아래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 금속판 하나가 바닥으로 내려갔다. 오르단의 패가 아니라 문 안쪽의 옛 수동 장치가 잠금을 풀었다.

문이 열리자 바닥 아래로 내려가는 짧은 계단이 나타났다.

현행 도면에는 표시되지 않은 계단이었다. 누락된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폐쇄 보관층은 창문 하나 없는 낮은 방이었다.

양쪽 벽에는 서류함이 늘어서 있었고 가운데에는 얕은 금속 레일이 놓여 있었다. 레일에는 홈이 열여섯 개 있었다. 열다섯 개의 홈에는 납작한 고정판이 들어갔고 열여섯 번째 홈만 비어 있었다.

증거 상자 밑에서 본 구조와 비슷했다.

“비슷하다고만 적습니다.”

마렌이 말하며 장부를 펼쳤다.

장부의 표지는 물에 젖었다가 말라붙은 것처럼 뒤틀려 있었다. 첫 장부터 여러 칸의 이름이 칼로 긁혀 있었다.

세르단이 낡은 표식을 살폈다.

“이 보관층은 신전 기록고의 부속으로도 쓰이지 않았소. 적어도 현행 장부에는 없소.”

총서기관이 서류함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황실의 비공식 창고였다는 뜻이오.”

“비공식이면 누가 책임졌는지부터 찾아야 합니다.”

카일은 장부를 가운데 철판 위에 놓게 했다. 누구도 원본의 페이지를 함부로 넘기지 못하게 하고 마렌이 사본을 만들었다.

열여섯 칸짜리 표가 나타났다.

첫 번째 줄에는 ‘회수 대상 둘’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었다. 그 아래 첫 칸은 옛 회수 표식과 닮은 중심 문양으로 시작했다. 둘째 칸에는 이름 대신 짧은 글자가 있었다.

‘확인자.’

글자 뒤는 칼로 길게 긁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수취 전 대기’라는 문장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 줄은 절반이 뜯겨 나갔지만 남은 글자는 읽을 수 있었다.

‘확인자 이름 기재 금—.’

마렌은 페이지를 덮지 않았다.

“보이는 부분만 옮깁니다. 잘린 글자는 추정하지 않습니다.”

카일은 오르단을 보았다. 그는 문턱 밖에 있었지만 장부의 둘째 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왜 확인자의 이름을 쓰지 않았습니까?”

“나는 작성자가 아니오.”

“질문은 작성자를 묻지 않았습니다.”

“옛 절차에서는 직책만 남기는 경우가 있었소.”

“그럼 확인자는 물건입니까 사람입니까?”

오르단의 답이 늦어졌다.

“그 구분을 하지 않는 절차였소.”

세르단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 절차는 현행 신전 교리와 맞지 않소.”

“그래서 현행 절차가 된 적이 없는 것 아니겠소.”

오르단이 말했다.

총서기관은 장부의 잘린 이름 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건 폐기해야 하오. 누가 언제 기록했는지도 없고 법적 효력도 없소.”

“법적 효력이 없는 것과 기록 가치가 없는 것은 다릅니다.”

카일이 장부 앞을 막았다.

“이름을 지운 사람이 책임선을 지우려 했다는 사실도 기록입니다.”

마렌은 장부의 표와 잘린 부분과 칼자국을 세 기관 사본에 옮겼다. 둘째 칸 아래에는 짧은 눌림 세 개가 있었다. 20년 전 담당자 칸에서 보았던 흔적과 닮았지만 같은 손이라고는 쓰지 않았다.

그때 방 안쪽의 레일이 한 번 당겨졌다.

열여섯 번째 홈 아래에서 금속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미르가 문턱을 넘으려 했다.

레오나의 검집이 그의 앞을 막았다.

“이 선을 넘으면 역할을 말하십시오.”

“장부를 꺼내야 합니다.”

“누가 꺼내라고 했습니까?”

미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본 것은 장부가 아니라 열여섯 번째 홈이었다.

카일은 레일과 장부 사이에 빈 철판을 밀어 넣었다. 흰 재는 철판 양쪽에 나누어 뿌렸다. 레일을 향한 사람의 손과 장부를 보는 사람의 눈을 따로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파멸의 별이 손바닥 안쪽에서 꿈틀거렸다.

―비어 있는 곳을 네 손으로 채워라.

‘빈칸은 손으로 채우는 게 아니야.’

―네가 아니면 누가 채우지?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렌이 열세 번째 박자를 세기 시작했다.

열네 번째 박자에 장부의 잘린 페이지가 아주 조금 들렸다.

열다섯 번째 박자에 철판 표면에 검은 선이 번졌다. 선은 레일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카일이 서 있는 방향으로 돌아왔다.

열여섯 번째 박자.

철판에 비친 등불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그 사이에 손바닥처럼 보이는 검은 윤곽이 잠깐 떠올랐다.

레오나가 카일의 손목을 붙잡았다.

“닿지 마십시오.”

카일은 이미 손을 내밀지 않고 있었다.

철판의 반사인지 장치 표면의 반응인지 구분할 수 없는 윤곽이 그의 손이 있을 법한 위치에 나타났다. 손가락 끝 세 곳에는 얇은 검은 점이 맺혔다.

마렌의 펜이 움직였다.

“열여섯 번째 박자에 손바닥 유사 윤곽이 나타났습니다. 실제 접촉은 없었습니다.”

“손 모양이라고 단정하지 마.”

“손바닥 유사 윤곽으로 적겠습니다.”

오르단이 숨을 들이켰다.

“그건 수취인의 확인을 요구하는 장치요.”

카일이 그를 돌아보았다.

“수취인이 누굽니까?”

오르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르가 레일의 끝을 가리켰다.

“슬라이드를 끝까지 당기면 확인자가—”

레오나가 이번에는 미르의 팔꿈치까지 밀어냈다.

“역할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미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카일은 철판을 발끝으로 더 밀었다. 검은 윤곽이 장부 쪽으로 향하지 못하고 레일 아래로 접혔다.

별이 굶주린 목소리로 웃었다.

―조금만 먹으면 안쪽의 답을 볼 수 있다.

‘답이 아니라 미끼일 수도 있어.’

―그럼 확인하면 된다.

‘확인은 손으로 하지 않는다.’

검은 점이 철판 끝에서 멎었다. 카일은 손바닥의 통증을 눌러 삼켰다. 이번에는 흡수하지 않았다.

그 순간 안쪽 문에서 긁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벽이 아니었다. 레일 아래에 이어진 작은 철문 안쪽이었다.

긁는 소리가 두 번 이어지고 멎었다.

방 안의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리고 철문 안쪽에서 짧은 호흡이 들렸다.

마렌의 펜이 멈췄다.

“사람입니까?”

총서기관이 속삭였다.

카일은 철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릅니다. 호흡처럼 들린 소리라고 적어.”

“안에 누가 있는지 물어야 하지 않습니까?”

마렌이 물었다.

카일은 잘린 장부의 둘째 칸을 보았다.

확인자 이름은 기재되지 않았다.

누군가 안에 있다면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빈 칸이 채워질 수도 있었다.

“이름을 묻지 마.”

카일이 낮게 말했다.

“다음에는 역할을 묻는다.”

철문 안쪽에서 다시 한 번 숨이 끊겼다.

열여섯 번째 칸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빈칸이 카일의 손 모양을 기억한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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