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41화: 사본의 세 번째 선
태양신전으로 보낼 사본의 봉인 안쪽에서 검은 점이 젖고 있었다.
마렌은 손가락을 대지 않았다. 봉인끈에서 두 뼘 떨어진 곳에 철판을 놓고 시각과 위치를 적었다.
“해가 뜬 뒤 일곱 번째 종입니다. 봉인끈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세르단 사제가 사본을 내려다보았다.
“그 사본은 본청으로 가야 하오.”
“누구의 손으로 옮깁니까?”
카일이 물었다.
“태양신전의 봉인 전달관이 맡을 것이오.”
말이 끝나기 전에 서쪽 회랑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황실 경비가 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회랑 반대편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앞선 남자는 금빛 가장자리가 있는 회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가슴에는 태양신전 문양이 붙어 있었고 손에는 붉은 밀랍으로 봉한 문서가 들려 있었다.
“봉인 전달관 오르단입니다. 본청 봉인감찰부의 회수 명령에 따라 대조용 사본을 인수하겠습니다.”
마렌은 문서를 받지 않았다.
“발신자와 수신자를 말해 주십시오.”
“문서에 적혀 있습니다.”
“읽어 주십시오.”
오르단의 입술이 굳었다.
“봉인감찰부. 회수 담당자. 대조용 사본.”
“사람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의 뒤에 선 서기관이 끼어들었다.
“신전의 직책이 이름보다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 직책을 확인할 원본 명부는요?”
“황궁에서 신전의 명령을 검증하겠다는 겁니까?”
“봉인물을 넘기는 절차를 적는 겁니다.”
마렌은 철판 위에 문장을 새겼다.
‘태양신전 봉인 전달관 오르단. 동행 서기관 미르. 회수 명령서의 원본 명부 대조 전. 사본 인수 보류.’
오르단은 허리에서 금속패를 꺼냈다. 중심 문양과 금속의 색은 세르단이 복구대에게서 빼앗은 패와 비슷했다. 그러나 가장자리에는 세 갈래의 절개가 나 있었다.
세르단이 패를 돌려 보았다.
“중심 문양과 금속은 옛 진품과 유사하오. 현재 파견 명부와 일치한다고는 말할 수 없소.”
“오래된 절차는 현행 명부에 모두 남지 않습니다.”
오르단은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사본보다 자신의 패를 돌려받지 못한 쪽을 더 신경 쓰고 있었다.
총서기관이 나섰다.
“그럼 황실에서 보관하면 될 일이오.”
“황실 단독 보관도 안 됩니다.”
카일이 문서 앞을 막았다.
“세 기관의 서명이 붙은 기록을 한 기관이 가져가면 기록이 아니라 압수가 됩니다. 반환 조건도 없는 명령서라면 더더욱요.”
총서기관의 얼굴이 굳었다.
라시안이 침상에서 기침을 삼켰다. 목 아래의 검푸른 선이 옅게 떨렸다.
“사본이 본청으로 가면 누가 열고 누가 기록하오?”
“신전의 봉인관이 대조하고 본청 장부에 남깁니다.”
“황실과 성별교는 그 장부를 볼 수 있소?”
오르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일은 사본과 라시안을 번갈아 보았다. 거부하면 은폐가 되고 넘기면 해석을 빼앗긴다.
“사본을 넘기는 대신 대조를 여기서 하죠. 신전의 도구와 서기관을 두고 황실 경비와 성별교 기록관이 함께 봅니다. 봉인에 손대는 순간마다 행동과 위치를 적습니다.”
“신전의 봉인을 황궁의 규칙으로 묶겠다는 겁니까?”
“환자가 여기 있으니까요.”
라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건으로 시행하시오.”
카일은 사본을 넘기지 않은 것이 승리가 아니라 시간을 산 것이라고 생각했다. 봉인 안의 검은 점은 그의 계산보다 빠르게 젖고 있었다. 시간을 번 대가는 언제나 새로운 관찰자였다.
오르단은 잠시 침묵하다가 동행 서기관에게 손짓했다.
“봉인 정렬판을 준비해.”
미르가 낡은 검은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중앙에 빈 원이 있고 가장자리에 홈 열여섯 개가 파인 금속판이 들어 있었다.
카일의 손바닥 안쪽이 욱신거렸다.
―이번에도 문이구나.
‘문서와 사람을 섞지 마.’
카일은 속으로 대꾸한 뒤 빈 철판을 가리켰다.
“사본에는 대지 않습니다.”
“정렬판은 봉인과 닿아야 반응을 읽습니다.”
“그럼 닿기 전의 반응부터 적죠.”
마렌이 사본과 정렬판 사이를 재었다.
“세 걸음입니다.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세르단은 정렬판 뒷면을 살폈다.
“현재 봉인감찰부의 도구와 다르오.”
“옛 도구를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관 주체는요?”
“기록을 확인해야 합니다.”
“보관 주체 미상. 현행 사용 권한 미확인.”
마렌이 그 대답까지 적었다.
레오나는 침상과 사본 사이에 섰다.
“누구도 흰 재 선을 넘지 마십시오.”
미르가 정렬판에 손을 얹었다. 판은 움직이지 않았다.
열세 번째 박자까지 조용했다.
열네 번째 박자에 정렬판 가장자리의 먼지가 한쪽으로 밀렸다.
열다섯 번째 박자에 원형 안쪽의 공기가 검게 흔들렸다.
열여섯 번째 박자에 금속판이 낮게 울렸다.
동시에 사본 봉인 안쪽의 세 갈래 점이 한곳으로 모였다.
라시안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호흡이 짧아졌습니다.”
도르반의 말이 떨어지자 카일이 외쳤다.
“손을 떼십시오.”
미르는 정렬판을 들어 올리려 했다.
레오나가 한 걸음 옮겨 그의 손목 앞을 막았다.
“멈춰.”
“도구를 회수하는 겁니다.”
“회수 주체와 위치를 먼저 기록합니다.”
마렌의 펜이 움직였다.
오르단은 정렬판을 노려보며 말했다.
“회수 대상의 응답입니다.”
“그 용어가 적힌 공식 문서가 있습니까?”
마렌이 물었다.
오르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정렬판의 홈 안쪽에서 얇은 검은 습기가 흘러나왔다. 사본의 봉인과 같은 원인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습기는 철판을 타고 라시안 쪽으로 향했다.
카일은 세르단이 빛을 모으려는 것을 보았다.
“신성을 쓰지 마십시오.”
“그럼 이대로 둘 셈이오?”
“경계를 만들 겁니다.”
카일은 빈 철판을 정렬판과 침상 사이에 밀어 넣고 흰 재를 덧그었다. 등불을 옮기자 유리판에 비친 반사가 철판과 그의 손을 겹쳐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사본을 건드리지 않고 철판 모서리에 손바닥을 댔다.
―사람에게 닿은 길만 끊어.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그 길의 끝에 사람이 있다.
‘그래서 전부 먹지 않는다.’
검은 습기가 철판을 타고 손목으로 스며들었다. 손바닥의 세 갈래 통증이 한 줄로 당겨졌다.
카일은 가장자리의 얇은 막만 붙잡았다. 별은 굶주린 짐승처럼 그것을 핥았다. 손목에서 올라온 검은 흔적은 쇄골 아래에서 멎었다.
“중앙 반응이 줄어듭니다.”
마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일은 낮게 선언했다.
“기록은 손으로 지우지 않는다. 길을 나누고 남은 것을 확인한다.”
그 문장은 즉석에서 만든 교리였다. 그러나 검은 습기가 흰 재 앞에서 멎자 회랑의 경비들이 숨을 삼켰다. 반사된 등불 속에서는 검은 선이 카일의 손에서 접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카일이 손을 떼자 정렬판의 가장자리와 오르단의 금속패가 같은 순간 젖었다. 패의 세 갈래 절개 중 한 곳에 검은 점이 맺혔다.
세르단이 말했다.
“패를 내려놓으시오.”
오르단은 패를 뒤로 숨겼다. 얼굴에서 처음으로 침착함이 사라졌다.
레오나가 검집에 손을 올렸지만 카일이 막았다.
“검을 뽑지 마.”
카일은 오르단의 손과 패를 바라보았다.
“패의 절개가 젖은 사실을 기록합니다. 그것이 사본의 반응인지 정렬판의 잔류물인지 판단하지 않습니다.”
마렌은 곧바로 적었다.
‘정렬판과 전달관 금속패의 검은 점이 같은 시각에 관찰됨. 물질의 동일성과 이동 과정은 미상.’
라시안의 호흡은 정렬판을 떼자 다시 길어졌다. 도르반은 호전으로 적었지만 병과 정렬판의 인과는 쓰지 않았다.
총서기관이 말했다.
“정렬판과 패는 황실에서 보관하겠소. 전달관은 신원 확인이 끝날 때까지 떠날 수 없소.”
세르단이 즉시 고개를 저었다.
“두 물건을 한 기관이 가져가면 대조할 수 없소.”
카일이 두 사람 사이에 섰다.
“정렬판은 이곳에 둡니다. 현장 원본 장부와 사본은 분리합니다. 패는 별도 봉인하고 세르단 사제가 현행 명부와 대조하십시오. 오르단은 공식 심문이 아니라 신원 대조가 끝날 때까지 황실 경비의 입회 아래 머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오.”
“그래서 신원 대조라고 적는 겁니다.”
라시안은 황실 보관용 문서에 서명했다. 세르단은 옛 문양과 현행 명부 불일치를 서명했다. 마렌은 세 부의 기록에 같은 문장을 옮겼다.
“세 갈래 반응은 관측됐습니다. 발화자와 원인과 대상은 미상입니다. 황태자의 호흡은 도구를 뗀 뒤 안정됐지만 병과 반응의 인과는 확정하지 않습니다.”
카일은 봉인끈을 새로 묶었다.
그때 오르단의 패 뒷면에서 숫자가 드러났다.
카일의 손바닥 안쪽이 다시 욱신거렸다. 같은 물건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다만 열여섯이라는 수와 세 갈래의 흠집이 또다시 한 방 안에 모였다.
정오가 가까워질 때까지 서쪽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황실 경비 하나가 치료실로 뛰어왔다.
“포로 보관실의 증거 상자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누가 움직였습니까?”
“아무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상자 안의 금속패 하나가 열여섯 번째 박자에 울렸습니다.”
카일은 다시 봉인한 사본을 보았다. 이번에는 봉인 안쪽의 검은 점이 움직이지 않았다.
파멸의 별이 손바닥 안쪽에서 속삭였다.
―둘 중 하나는 이미 안에 있다.
카일은 그 말을 기록하지 않았다. 별의 유혹인지 장치가 흉내 낸 문장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다음 확인 장소는 정해졌다.
서쪽 문 밖이 아니었다.
황궁 안쪽 포로 보관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