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40화: 연출된 정화
해가 뜨기 전 서쪽 문 안쪽의 잠금쇠가 한 번 더 울렸다.
이번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금속이 문 안쪽에서 눌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온 소리였다.
카일은 문을 열지 않았다. 바렌은 측정 줄 끝의 사각거울을 문 아래로 밀어 넣었고 마렌은 등불의 위치와 거울의 각도를 기록했다.
“배수 덮개는 그대로입니다. 검은 조각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선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사라진 것은 나누어 적어.”
마렌의 펜 끝이 움직였다.
그때 치료실 안쪽에서 라시안이 기침했다.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목 아래 검푸른 선이 한 번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총서기관이 말했다.
“이제 결정해야 하오. 황태자 전하를 옮기고 지하 통로를 전부 봉인하든가 성별교의 정화를 공식 발표하든가.”
“전부 봉인하면 측정할 수 없습니다.”
“그럼 정화가 성공했다고 발표합시다.”
세르단 사제가 그를 노려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정화하지 않았소.”
카일은 총서기관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오염보다 황실의 책임자로 기록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성공을 먼저 적어 두면 실패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넘길 수 있었다.
“정화를 시작합니다.”
“다만 성공이라고 먼저 적지는 않습니다. 환자의 동의와 중단 조건을 기록하고 관측 범위를 나눕니다.”
라시안이 힘겹게 눈을 떴다.
“무엇을 하려는지 말하시오.”
카일은 치료실 바닥에 놓인 네 개의 철판을 보았다. 점검구 앞. 수리판 아래. 동쪽 배수 홈. 서쪽 문턱.
“오염은 세 갈래로 갈라집니다. 한 갈래를 태양신성으로 누르면 나머지가 짙어집니다. 점검구와 수리판 사이에 빈 철판을 하나 더 두고 흐름을 그곳으로 유도하겠습니다.”
“그대가 끊을 수 있소?”
“확인된 범위 안에서만 시도합니다.”
카일은 거짓말을 삼켰다. 그가 하려는 일은 끊는 것이 아니라 먹는 일이었다.
도르반이 물었다.
“중단 조건은요?”
“황태자의 호흡이 두 번 연속 짧아지거나 검은 선이 목 위로 올라오면 중단합니다. 흰 재 선을 넘는 사람도 없어야 합니다.”
레오나가 문과 침상 사이에 섰다.
“제가 선을 지키겠습니다.”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넘는 사람이 있으면 막아.”
“알겠습니다.”
그녀는 검을 뽑지 않았다. 손만 검집 위에 올렸다.
마렌은 철판의 위치를 새 장부에 옮겼다. 바렌은 문 밖의 사각거울을 고정했고 세르단은 손끝에 작은 빛을 모았다.
바깥의 경비와 수행원이 안쪽을 바라보았다. 카일은 그들의 공포에 이름을 붙였다.
“이 의식의 이름은 세 갈래 정화입니다.”
“교리서에 없는 의식이오.” 총서기관이 말했다.
“그러니 기록해야 합니다. 오늘 확인한 범위에서만 시행하고 오늘 확인한 범위만 증명합니다.”
세르단은 점검구와 수리판 사이의 빈 철판을 가리켰다.
“어느 갈래를 누르겠소?”
“침상으로 이어지는 선이 아니라 수리판 방향의 선을 먼저.”
“방향은 확실하오?”
“아닙니다. 그래서 변화를 기록합니다.”
세르단은 불쾌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대는 의식 중에도 모른다는 말을 하는군.”
“모르는 걸 아는 척하면 검은 게 사람을 대신해 대답하니까요.”
마렌이 낭독했다.
“동궁 치료실. 황태자 본인 동의. 호흡 중단 조건. 성별교 교주와 기록 담당자. 태양신전 봉인감찰. 황실 경비 네 명. 외부 문 개방 없음.”
“시작합니다.”
세르단의 빛이 점검구 왼쪽 선을 눌렀다.
검은 습기가 움찔했다. 사라지지 않고 수리판 아래의 선이 가늘어졌다. 서쪽 문턱 철판의 가장자리도 젖었다.
바렌이 사각거울을 보았다.
“문 밖 배수 덮개 주변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카일은 열세 번째 박자를 기다렸다.
열네 번째에 물그릇의 수면이 문턱 쪽으로 기울었다.
열다섯 번째에 점검구 아래 검은 막이 철판의 흠집을 타고 올라왔다.
열여섯 번째에 모든 금속이 동시에 떨렸다.
검은 선 하나가 흰 재의 가장자리에 닿았다. 재를 넘지 못한 선이 옆으로 휘었다. 세르단이 누른 빛이 한쪽을 누르자 다른 쪽이 짙어졌다.
“거두십시오.”
카일이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소.”
“빛이 길을 바꾸고 있습니다.”
세르단은 이를 악물고 신성을 거두었다.
빛이 사라지자 검은 습기가 점검구와 수리판 사이의 빈 철판 위로 모였다. 라시안의 목 아래 선이 부풀었다.
도르반이 외쳤다.
“호흡이 짧아졌습니다.”
카일은 철판의 뒷면에 손바닥을 대었다.
파멸의 별이 웃었다.
―이제야 문을 열었구나.
‘문은 닫혀 있어.’
―네 몸이 문이다.
검은 습기가 철판을 타고 손목으로 스며들었다. 오래 굶은 짐승이 살을 물어뜯는 감각이었다.
―전부 삼켜라. 숨에 붙은 것까지 먹으면 조용해진다.
카일은 라시안을 보았다. 황태자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사람의 숨은 안 돼.’
그는 철판을 통해 흘러온 검은 막의 가장자리만 붙잡았다. 검은 것이 물에 풀린 먹물처럼 안쪽으로 말려들었다.
치료실 밖에 있던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등불의 불꽃이 거울에 반사됐다. 카일의 손목에 번진 검은 흔적과 철판 위의 습기가 하나의 별 모양으로 접혔다.
마렌이 말했다.
“중앙 철판의 표면 반응이 줄어듭니다.”
카일은 숨을 참으며 낮게 선언했다.
“별은 어둠을 먹고 사람에게 길을 돌려준다.”
그가 즉석에서 만든 문장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의식의 핵심으로 받아들였다.
검은 습기가 철판 위에서 보이지 않게 됐다. 대신 카일의 손목에서 팔 안쪽으로 흔적이 올라가고 있었다.
라시안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에는 기침으로 끊기지 않았다.
총서기관의 얼굴이 밝아졌다.
“성공이오. 기록관은 정화 완료라고—”
서쪽 문 안쪽 잠금쇠가 크게 들렸다.
바렌이 거울을 향해 몸을 숙였다.
“문 밖의 조각이 젖었습니다. 세 갈래 흠집 모두 어두워집니다.”
치료실 바닥의 검은 선이 문턱 방향으로 당겨졌다. 중앙에서 빠져나간 오염이 밖으로 옮겨 간 것인지 문 밖의 반응이 안으로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세르단이 다시 빛을 모았다.
“외부로 번지기 전에 눌러야 하오.”
“안 됩니다. 빛은 지금까지 바깥을 짙게 만들었습니다.”
카일의 손목 안쪽에서 별이 속삭였다.
―하나만 더 먹으면 된다.
그 말은 맞을 수도 있었다. 하나를 더 먹으면 문턱의 검은 습기가 줄어들 수 있었다. 대신 무엇이 함께 따라올지 알 수 없었다.
라시안의 호흡이 다시 흔들렸다.
“침상과 문턱 사이에 서. 아무도 안쪽으로 들이지 마.”
카일이 레오나에게 말했다.
“교주님은요?”
“세 번째 선을 닫는다.”
“또 직접 닿을 겁니까?”
질문이 날카로웠다. 레오나는 카일의 손목을 보았다. 검은 흔적이 소매 안쪽을 넘어 쇄골 쪽으로 번지고 있었다.
“전부 없애는 게 아니라 경계를 닫는 절차야.”
레오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문턱 앞에 양발을 세웠다.
마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열세 번째. 외부 조각 가장자리 변화. 열네 번째. 잠금쇠 상승. 열다섯 번째. 환자 호흡 불규칙.”
열여섯 번째가 오기 전에 검은 막에서 목소리가 났다.
“마지막 칸을 비워라.”
회수 담당자가 했던 말과 비슷했다. 그러나 사람의 것인지 장치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목소리가 들렸다고만 적어.”
카일이 말했다.
“문장과 발화자는 나누고.”
그는 남은 선 하나를 철판 두 장 사이에 가뒀다. 흰 재가 검은 막의 속도를 늦췄고 철제 고리가 바닥을 긁었다.
파멸의 별이 손바닥 안쪽에서 입을 벌렸다.
―네가 만든 의식이다. 네가 끝내라.
카일은 검은 선을 한 가닥만 끌어왔다. 손바닥에 닿는 순간 통증이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그는 비명을 삼키며 오염의 끝을 잘라 냈다.
검은 막은 별빛처럼 접혔다. 두 갈래는 끊겼지만 남은 한 갈래는 문 밖 배수 덮개 쪽에서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정화는 여기까지입니다.”
총서기관이 발끈했다.
“이제 와서 중단하면 실패로 보이오.”
“오늘 확인한 범위에서 두 갈래가 약화됐고 세 번째 갈래는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완전한 정화를 기대하오.”
“사람들이 기대한다고 오염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카일은 문턱과 침상을 번갈아 보았다.
“남은 걸 지우지 못했다고 적는 게 다음 사람을 살립니다.”
의식이 끝난 뒤 라시안의 호흡은 일정해졌다.
목 아래 검푸른 선은 옅어졌지만 손목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도르반은 호전이라고 적었고 완치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마렌은 철판 네 장을 확인했다.
“점검구와 수리판 쪽 표면 번짐은 줄었습니다. 동쪽 배수 홈은 불안정합니다. 서쪽 문턱과 외부 덮개는 여전히 반응합니다.”
“기록에 그대로 넣어.”
총서기관이 새 문서를 내밀었다.
“황실 발표문입니다. ‘성별교 교주가 지하 오염을 완전히 정화했으며 황태자의 생명을 구했다.’ 이 정도면 궁정의 혼란을 막을 수 있소.”
카일은 문장을 읽었다. 짧고 강했다. 사람들은 믿을 것이고 교단의 이름과 자신의 목도 당장 살아남을 것이다.
그는 펜을 들었다.
“완전히를 지우십시오.”
“교주.”
“관측 범위 내 두 갈래 약화. 세 번째 갈래 미확인. 환자 호흡 일시 안정.”
총서기관은 이를 악물었다.
세르단이 문서를 받아 읽었다.
“이 문구가 신전으로 가면 그대의 권능을 인정하는 꼴이 되오.”
“인정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봤습니다.”
“정화가 아니라 흡수였다고 밝혀지면?”
카일의 손이 멈췄다.
“그럼 신전의 기록에는 직접 본 사실만 쓰시오.”
세르단은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공식 용어는 정화요. 이곳의 사람들은 그렇게 부를 것이오.”
마렌이 세 부의 사본을 펼쳤다. 황실 보관용. 태양신전 대조용. 성별교 원본.
라시안이 침상에서 대답했다.
“내가 서명하겠소. 단 완치라는 말은 쓰지 마시오.”
“황태자 전하의 말도 기록합니다.”
사본에 봉인끈이 묶였다. 세 갈래 홈을 흉내 낸 표식은 누구도 그리지 않았다.
그런데 태양신전으로 보낼 사본의 봉인 안쪽에서 검은 점 하나가 번졌다.
마렌이 그것을 보았다.
“문서 표면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카일은 손을 뻗지 않았다. 손바닥 안쪽에 남은 세 갈래 통증이 맥박처럼 뛰고 있었다.
세르단은 사본을 들어 올렸다.
“신전 본청으로 보내겠소. 이 현상이 무엇인지 대조해야 하오.”
“태양신전이 지하를 다시 건드릴 가능성도 있습니까?”
카일의 질문에 세르단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은 대답보다 선명했다.
카일은 서쪽 문을 보았다. 잠금쇠는 다시 내려가 있었지만 문 밖 배수 덮개는 여전히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오늘의 정화는 성공했습니다.”
바깥에서 안도의 숨이 퍼졌다.
“그러나 성공한 범위가 남아 있습니다. 남은 범위를 확인하지 않는 자는 다음 정화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환호 대신 조용한 기록 소리가 돌아왔다.
사람들은 기적보다 기록을 믿기 시작했다. 기록에는 그의 손목과 쇄골의 검은 흔적도 언젠가 남을 것이다.
파멸의 별이 아주 작게 웃었다.
―다음에는 더 큰 문을 열자.
카일은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서쪽 문 밖 어딘가에서 금속이 세 번 울렸다.
이번에는 잠금쇠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태양신전으로 향하는 봉인 사본의 세 갈래 점이 동시에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