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39화: 문 밖의 기록
서쪽 문 아래의 검은 선이 다시 젖었다.
카일은 손을 대지 않고 문서의 목적지란도 집어 들지 않았다. 번짐이 생긴 문서는 철판 위에 두었다.
“위치는 그대로입니다.”
마렌이 문서 가장자리를 살폈다.
“물과 닿은 흔적은 없습니다.”
“그럼 문을 열 이유도 없어.”
총서기관이 차갑게 웃었다.
“밖을 보지 않고 안전을 판단하겠다는 거요? 문을 열어 경비를 보내면 될 일을 왜 복잡하게 만드오.”
“문을 열면 외부 흔적과 문턱 반응이 섞입니다.”
카일은 바렌을 보았다.
“사각거울을 준비해.”
바렌은 납작한 거울을 얇은 측정 줄 끝에 묶었다. 줄 중간에는 작은 황동 고리가 달려 있었다.
“고리가 흰 재 선을 넘으면 거울을 멈추겠습니다.”
“선에 닿으면 줄을 놓아. 거울을 찾겠다고 문을 열지는 않는다.”
레오나가 문 앞을 막았다.
“사람이 선을 밟으면요?”
“그 사람의 위치부터 기록합니다.”
“그리고요?”
“움직이지 않습니다.”
레오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하겠습니다.”
카일은 그 말이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이 불편했다. 레오나는 이제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호위가 아니었다. 그가 흔들릴 때 경계를 대신 확인하는 증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바렌이 거울을 문 아래로 밀었다. 등불은 안쪽에서만 비췄다. 기울어진 거울에 문 밖 돌바닥이 비쳤다.
검은 선은 문턱 바로 바깥에서 끝나지 않았다. 문 아래를 빠져나온 선은 낡은 돌 두 장 사이의 얕은 홈을 따라 작은 배수 덮개 아래로 향했다.
덮개에는 세 갈래의 흠집이 있었다.
그 옆에는 검은 조각 하나가 박혀 있었다. 밀랍처럼 보였지만 거울에 비친 색만으로는 물질을 판정할 수 없었다.
바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옛 배수 구조 같습니다. 도면의 끊긴 선과 방향이 비슷합니다.”
“비슷하다고 적어. 이어진다고 적지 마.”
마렌은 곧바로 기록했다.
‘서쪽 문 바깥 돌틈의 선은 얕은 홈을 따라 배수 덮개 아래로 향하는 듯함. 덮개에 세 갈래 흠집과 검은 조각이 보임. 기존 하부 통풍로 및 궁정 내 유물과의 동일성은 미상.’
세르단 사제가 긴 집게를 꺼냈다.
“검은 조각을 확인하겠소.”
“선에 닿기 전까지만.”
카일이 집게를 받아 바렌에게 건넸다.
“닿으면 채취하지 않습니다.”
집게 끝이 덮개에 가까워지자 홈 안쪽의 검은 선이 미세하게 부풀었다. 바렌은 즉시 손을 멈췄다.
열세 번째 박자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열네 번째 박자에 문턱 철판의 물이 안쪽으로 기울었다.
열다섯 번째 박자에 거울 속 세 갈래 흠집이 젖은 것처럼 어두워졌다. 물은 흐르지 않았고 검은 조각의 가장자리만 번졌다.
열여섯 번째 박자에 문 밖에서 작은 금속음이 났다.
철판과 거울 줄의 황동 고리가 동시에 떨렸다.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렌이 말했다.
“문턱 철판과 문 밖 덮개가 같은 박자에 반응했습니다. 선후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카일은 거울 속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도망칠 길은 돌틈과 덮개 아래로 이어지는 선에 불과했다. 그것은 안전한 출구가 아니라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위험의 입구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줄지 않았다.
“이제 개인 가방을 넘기시오.”
총서기관 뒤의 경비가 봉인 상자를 들고 있었다.
“서쪽 문으로 비공개 이동을 시도한 기록이 있습니다. 개인 여비와 신분 문서는 황실 조사를 위해 별도 보관해야 합니다.”
마렌이 상자를 보았다.
“개인 자산을 공용 기록에 합칠 수는 없습니다.”
“도주 준비의 증거로 봉인하겠다는 뜻이오.”
“보관 목적과 보관 주체와 반환 조건을 적으십시오.”
총서기관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록관이 황실의 조사를 가르치려 드는군.”
“어제도 같은 절차를 따랐습니다.”
마렌은 빈 문서에 선을 그었다.
‘개인 이동비 및 신분 문서. 공용금과 분리. 보관 목적·보관 주체·반환 조건 미정.’
카일은 가방을 열었다. 은화가 짧게 부딪혔다. 성별교의 구휼·증명·자립 항목에서 떼어 온 돈은 아니었다.
“내가 준비한 건 맞습니다.”
총서기관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황태자를 두고 떠나려 한 것도 인정하시오?”
카일은 빈 문서를 자기 앞으로 당겼다.
‘서쪽 문 통과를 위한 개인 이동 준비. 목적지 미정. 귀환 시각 미정. 황실 공식 명령 없음. 동궁 및 성별교 공용 자산과 무관.’
“결국 떠날 생각이었던 것 아니오.”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카일은 펜을 내려놓았다.
“문 밖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고 황태자의 병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태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았습니다. 그 사실은 숨기지 않겠습니다.”
라시안이 침상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목 아래의 검푸른 선은 그대로였지만 숨은 어제보다 덜 가빴다.
“그대가 남으라고 명령한 적은 없소.”
“전하.”
“떠날 판단과 떠날 준비를 했다는 사실은 다른 항목으로 적으라 했소. 그대가 내 목숨을 위해 무리한 선택을 했는지는 따로 확인할 일이오.”
총서기관이 끼어들었다.
“교주가 비공개로 빠져나가면 현장 지휘가 무너집니다.”
“그렇다면 공식 철수의 조건을 적으시오.”
라시안의 말에 마렌이 새 철판을 펼쳤다.
카일이 말했다.
“공식 철수라면 환자의 동의와 목적지와 동행자가 필요합니다. 귀환 또는 중단 조건도 있어야 합니다. 황실·태양신전·성별교가 같은 기록을 확인해야 하고요.”
도르반이 물었다.
“환자를 옮긴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지금은 이동하지 않습니다. 언제 이동을 공식 판단으로 부를 수 있는지 정하는 겁니다.”
레오나가 가방 옆에 섰다.
“개인 이동에는 목적지가 없습니다.”
카일이 그녀를 보았다.
“그래.”
“그럼 철수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누구를 남길지도 적으십시오.”
카일은 대꾸하지 못했다.
그는 도망치기 위해 가방을 만들었다. 누구를 데려갈지 정하지 않았고 누가 남을지도 세지 않았다. 떠나는 순간 남겨지는 사람은 반드시 생긴다는 계산을 문 밖으로 미뤄 두고 있었다.
카일은 문서 마지막 줄을 채웠다.
‘개인 이동 준비는 공용 철수 명령이 아님. 출발 시 동행자·잔류자·현장 기록 담당자를 별도로 확인할 것.’
레오나가 그 아래에 서명했다.
“동행뿐 아니라 잔류도 확인하겠습니다.”
총서기관이 봉인 상자를 닫았다.
“그 가방은 이곳에 두시오.”
“보관 조건을 정하지 않으면 넘기지 않습니다.”
카일은 가방을 흰 재 바깥의 별도 봉인지 위에 올렸다. 손에 쥐고 나갈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기록을 먼저 놓았다.
신분 문서는 얇은 유리판 아래에 넣었다.
목적지란이 보이도록 두고 그 옆에 빈 철판과 물그릇을 놓았다. 마렌은 시간을 적었고 바렌은 문 아래 거울의 위치를 확인했다. 세르단은 신성을 쓰지 않은 상태를 기준으로 남겼다.
“문서 봉인 전후의 번짐을 나눠 기록합니다.”
카일이 문턱 철판을 문서에서 세 걸음 떨어뜨렸다.
“문서가 반응을 부른다는 생각만으로 결론을 만들지 마.”
열세 번째 박자.
유리판 아래의 문서는 변하지 않았다.
열네 번째 박자.
문턱 철판 가장자리의 물이 검게 변했다.
열다섯 번째 박자.
거울 속 배수 덮개의 검은 조각이 빛을 삼켰다. 문 밖의 선은 덮개 아래로 더 들어가지 않았다.
열여섯 번째 박자.
문턱 철판과 황동 고리가 떨렸다. 문서의 종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렌이 확인했다.
“문턱과 외부 덮개의 동시 반응입니다. 문서 봉인 표면에는 새 변화가 없습니다.”
“문서가 현상을 부른다는 증거는 없군.”
“문서가 무관하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알고 있어.”
세르단이 문턱 철판을 가리켰다.
“최소한의 태양신성만 사용하겠소.”
“선행 기록을 남기고 한 번만 하십시오.”
세르단의 손끝에 금빛이 피었다. 빛은 안쪽의 검은 습기를 눌렀다. 습기는 사라지지 않고 문 아래 틈으로 밀렸다.
거울 속 검은 조각이 짙어졌다.
바렌이 숨을 삼켰다.
“외부 쪽이 진해졌습니다.”
“선이 옮겨 간 것인지 표면이 변한 것인지 구분해.”
마렌이 거울의 위치와 등불을 확인했다.
“현재는 외부 조각의 어두워짐만 확인됩니다. 이동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르단이 빛을 거두었다.
“신성은 제거하지 못했소.”
“처음부터 정화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카일의 손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이제 알았으니 먹어라.
파멸의 별이 뼈 사이를 긁었다.
―문 밖의 조각과 네 문서를 함께 삼키면 문은 조용해진다.
‘조용해지는 것과 안전해지는 건 다르다.’
―너는 살기 위해 문을 나가려 했다.
‘그래서 더 모르는 것을 먹지 않는다.’
카일은 철판을 문턱과 사람들 사이에 세웠다. 검은 습기가 철판 가장자리를 타고 번지려 했지만 흰 재에 닿자 속도가 늦어졌다. 그의 손은 철판에 닿지 않았다.
“흡수하지 않습니다.”
마렌이 ‘검은 습기의 직접 접촉 및 흡수 없음’이라고 적었다. 세르단은 그 말을 신성에 대한 지시로 받아들였고 레오나는 카일의 검은 손목을 보았다.
열여섯 번째 박자가 지난 뒤에도 아무도 문을 열지 않았다.
바렌은 거울을 회수할 때 줄을 당기지 않았다. 먼저 황동 고리를 흰 재 안쪽으로 옮긴 뒤 거울을 천천히 돌려왔다.
“배수 덮개와 검은 조각은 그대로입니다. 선은 관측 각도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마렌이 펜을 들었다.
“외부 선이 사라졌다고 적을까요?”
“관측 각도에서 보이지 않게 됐다고 적어.”
그 순간 문 밖에서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서쪽 문 안쪽의 잠금쇠가 아주 조금 들렸다.
경비 둘이 손을 뻗었다. 레오나가 먼저 문 앞을 막았다.
“멈춰.”
“외부에서 잠금쇠를 건드렸습니다.”
“잠금쇠를 당기지 마십시오.”
카일의 목소리가 복도를 눌렀다.
총서기관이 소리쳤다.
“문을 열어 확인해야 하오!”
“확인되지 않은 주체가 있다는 사실부터 기록합니다.”
“문밖에 사람이 있을 수도 있소.”
“그래서 더 열지 않습니다. 문을 열면 누가 손댔는지 확인하기 전에 경계가 무너집니다.”
레오나는 잠금쇠에서 손가락 한 마디 떨어진 곳에 검을 세웠다. 뽑지는 않았지만 누구도 그녀를 밀어낼 수 없었다.
도르반이 라시안의 손목을 확인했다.
“호흡은 유지됩니다. 다음 측정 전에는 이동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환자의 상태와 잠금쇠 움직임은 따로 적으십시오.”
마렌은 즉시 철판에 글을 새겼다.
‘서쪽 문 안쪽 잠금쇠가 외부 금속음 직후 한 칸 이동함. 손으로 당긴 사람 없음. 외부 주체·원인·문 개방 여부 미상.’
총서기관이 유리판 아래의 문서를 가리켰다.
“그 문서도 변했습니다.”
목적지란에는 글자가 생기지 않았다. 대신 가느다란 선 하나가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문 밖 배수 덮개의 흠집과 닮아 보였지만 카일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비슷하게 보인다고 적어.”
“같은 표식이라고는 적지 않겠습니다.”
“그래.”
총서기관이 낮게 물었다.
“교주가 떠나려던 문이 스스로 열리려 합니다. 그래도 남겠소?”
카일은 봉인된 가방을 보았다. 신분 문서와 개인 이동비가 있었다. 문 밖으로 나가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목적지는 여전히 없었다. 문 밖의 흔적과 배수 덮개와 잠금쇠가 누구의 뜻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나가는 것은 철수가 아니라 미확인된 힘의 안쪽으로 몸을 던지는 일이었다.
“해가 뜰 때까지 남습니다.”
레오나가 물었다.
“왜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그 뒤에는요?”
“기록을 보고 정한다.”
카일은 문고리와 라시안과 봉인된 가방을 차례로 보았다.
“다음 측정 시각을 정합니다. 환자의 중단 조건을 먼저 확인하고 문을 열지 않는 관측 방법을 추가합니다. 누구도 잠금쇠를 당기지 마십시오.”
마렌이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문 밖에서 금속음이 다시 한 번 울렸다.
이번에는 잠금쇠가 한 칸 더 올라왔다.
유리판 아래의 세 갈래 선도 동시에 젖었다.
카일은 손을 뻗지 않았다.
닫힌 문 너머에서 누군가 기다리는지 궁정 아래의 장치가 위로 올라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제 문은 카일이 나가고 싶을 때만 열리는 출구가 아니었다.
문 밖의 무언가가 안쪽을 향해 선택을 요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