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38화: 교주의 비상구
“교주님은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바닥 아래에서 울리던 금속음은 멎었지만 레오나의 목소리는 남아 있었다.
카일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마렌의 옆에는 작은 가방이 놓여 있었다. 개인 이동비와 신분 문서가 들어 있는 가방이었다.
“서쪽 문 밖.”
입 밖으로 나온 대답은 생각보다 빨랐다.
레오나의 손이 검집 위에서 멈췄다.
“혼자서?”
“확인하러 가는 거야. 밖에 마차가 준비됐는지 보고 문서가 통하는지도—”
“황태자 전하께 보고했습니까?”
카일은 입을 다물었다.
라시안은 침상에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든 것 같지는 않았다. 도르반은 그의 손목에 손가락을 대고 있었고 세르단은 검은 막이 묻은 철판을 봉인지 위에 올려 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마렌이 가방의 끈을 풀었다.
“개인 이동비는 공용금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문서에는 성별교의 공용 물자나 후원금이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걸 말하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확인되지 않은 명령은 따로 기록해야 하니까요.”
마렌은 빈 철판 한쪽에 작은 점을 찍었다. 조금 전 찍었던 점과 같은 표시였다.
레오나가 가방을 보았다.
“교주님이 먼저 나가면 사람들은 무엇을 기록합니까?”
“내 개인 이동이지.”
“성별교 교주의 이동입니다.”
“나는 성별교 전부가 아니야.”
“밖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카일의 가슴을 찔렀다.
카일은 황태자를 버리고 도망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는 위험한 궁정에서 한 발짝 물러나 살아남을 길을 찾는 중이었다. 살아남아야 성지도 지킬 수 있고 돈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가방 하나가 침상 옆에 놓이는 순간 그 계산은 다른 뜻을 갖기 시작했다.
“문까지 확인하고 돌아온다.”
“귀환 시각을 정하실 겁니까?”
“그것까지 기록해야 해?”
“교주님이 하신 말입니다.”
레오나는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치료실 문 옆으로 비켜섰다.
“같이 가겠습니다.”
카일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호위는 필요 없어.”
“호위가 아니라 확인입니다.”
마렌이 펜을 들고 뒤따랐다.
“역할과 위치를 적겠습니다.”
카일은 그제야 자신이 만든 규칙에 발목이 잡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한 사람의 말과 기억만으로 결론을 만들지 않았다. 시간과 위치와 역할을 나누고 두 명 이상의 확인을 붙였다. 그 방식이 황실과 신전의 기록을 묶었고 교단의 기적을 증명했다.
그리고 지금 그 방식은 자신의 도주를 숨겨 주지 않았다.
카일은 가방을 들었다.
“문까지만이다.”
“그 문장도 기록하겠습니다.”
서쪽 회랑에는 새벽의 푸른빛이 아직 닿지 않았다.
레오나는 먼저 걸으며 바닥을 살폈다. 흰 재 바깥으로 이어지던 발자국은 두 걸음째에서 끊겨 있었다. 봉인끈은 움직이지 않았고 회랑 끝의 등불도 꺼진 채였다.
카일은 그 흔적을 곁눈질했다.
“아까 확인한 것과 같은 상태야?”
“발자국은 그대로입니다. 사람의 흔적은 없습니다.”
“그럼 길은 비어 있군.”
“비어 있다는 말과 안전하다는 말은 다릅니다.”
카일은 대꾸하지 않았다.
서쪽 문 앞에는 황실 경비 둘과 작은 마차 한 대가 있었다. 마차꾼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고삐를 쥐고 있었다. 말은 조용했지만 귀가 문 쪽을 향해 있었다.
경비가 창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 앞을 비키지도 않았다.
“정지하십시오. 출입 목적을 확인합니다.”
카일은 품에서 문서를 꺼냈다. 교단의 직함과 이동 목적을 적은 임시 문서였다. 마렌은 문서 가장자리의 공백을 확인하고 펜을 들었다.
“성별교의 자료 운반입니다. 문을 열어.”
“황실 서명이 있습니까?”
“궁정 내부의 비상 확인입니다.”
“그 명령은 어디에 적혀 있습니까?”
카일은 문서의 빈칸을 내려다보았다.
목적지. 동행자. 귀환 시각.
세 칸이 비어 있었다.
마렌이 조용히 말했다.
“목적지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문 밖에 확인할 곳이 있다.”
“어디입니까?”
카일은 경비를 보았다.
“서쪽 밖.”
“지명으로 말해 주십시오.”
“아직 정하지 않았다.”
마렌의 펜 끝이 멈췄다.
“귀환 시각도 없습니다.”
“상황을 보고 정한다.”
“동행자는요?”
레오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호위기사. 동행 확인.”
마렌이 받아 적었다.
카일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레오나는 태연했다.
“한 명이 나가면 개인 이동입니다. 두 명이 나가면 교주의 공식 이동으로 기록됩니다.”
“그 구분을 네가 정해?”
“기록은 제가 합니다.”
“문을 열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경비가 말했다. “목적지도 귀환 조건도 없고 황실 명령도 없습니다.”
카일은 문서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가짜 문서를 만드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인장을 닮은 밀랍과 그럴듯한 직함이면 대부분의 문은 열렸다. 하지만 황궁의 문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 기록과 책임자를 요구했다.
“내가 성별교 교주라는 걸 모르나?”
“알고 있습니다.”
“그럼 내가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보이나?”
“그건 제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경비는 고개를 숙였다.
“확인되지 않은 출입은 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카일은 문 너머를 보았다. 바깥으로 나가면 길이 있었다. 마차도 있었다. 그는 신분 문서와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길에는 목적지가 없었다.
정말로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목적지를 만들었어야 했다. 갈고리 골짜기라고 적으면 성지로의 철수 명령이 된다. 다른 도시를 적으면 그곳의 누군가를 위험에 끌어들인다. 아무것도 적지 않으면 지금처럼 문 앞에서 멈춘다.
“마차를 돌려.”
카일이 말하자 마차꾼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때 문턱 아래에서 금속음이 났다.
짧고 낮은 소리였다.
경비 둘이 동시에 발을 멈췄다. 마차의 말이 고개를 들었다.
카일은 문을 향해 손을 들었다.
“아무도 문을 열지 마십시오.”
경비가 문고리에서 손을 떼었다.
레오나는 마차를 문에서 물렸다. 말이 뒤로 물러서자 바퀴가 돌 위에서 삐걱거렸다.
마렌이 빈 철판을 꺼냈다.
“문턱 측정 지점. 서쪽 문 안쪽.”
“바깥쪽도 확인해야 합니다.”
“문을 열지 않고 가능한가요?”
카일은 문 아래의 틈을 보았다. 철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오래된 돌바닥 사이로 가느다란 틈이 이어져 있었다.
“흰 재를 나눠 그어.”
레오나가 작은 주머니를 받아 문 안쪽에 선을 그었다. 마렌은 측정 철판을 틈 가까이에 놓았다. 바깥쪽은 손이 닿지 않아 철문 아래로 측정 줄을 밀어 넣었다.
세르단이 치료실에서 가져온 장부를 펼쳤다.
“태양신성을 사용하겠소.”
“변화를 먼저 봅니다.”
“막이 번지면 문 밖으로 나갈 수 있소.”
“그래서 먼저 누르면 안 됩니다.”
경비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환자의 병과 같은 것입니까?”
“모릅니다.”
카일은 짧게 대답했다.
“검은 습기와 유사한 현상이 문턱에서 관찰됐다고만 기록합니다. 같은 물질이라고 쓰지 마십시오.”
첫 번째 철판의 물그릇이 흔들렸다.
마렌이 호흡과 분리된 시각을 적었다.
“문턱 금속 반응. 첫 소리 이후 측정 시작.”
열세 번째 박자까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열네 번째 박자에 철판 가장자리의 물기가 검게 변했다.
열다섯 번째 박자에 문턱의 녹슨 표식 하나가 흐려졌다.
열여섯 번째 박자에 철문 안쪽에서 차가운 습기가 솟았다.
습기는 문 안쪽의 흰 재를 피했다. 대신 바닥 틈을 따라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 줄은 회랑 안쪽으로 향했고 다른 한 줄은 문 아래를 통과해 바깥 돌틈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마차의 말이 크게 울었다.
마차꾼이 고삐를 놓칠 뻔하자 레오나가 말의 머리를 붙잡았다.
“움직이지 마.”
말의 발굽이 돌을 긁었다. 바퀴 하나가 검은 습기가 번진 틈 앞에서 멈췄다.
카일은 문을 열면 자신이 가장 먼저 그 선을 밟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쪽 밖으로 나가는 길은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이 안전하다는 증거는 없었다. 오히려 문턱 아래의 검은 선은 바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파멸의 별이 손목 안쪽에서 웃었다.
―먹어라.
‘아직 사람에게 닿지 않았다.’
―문을 열면 닿을 것이다.
‘그래서 먹지 않는다.’
―너는 살고 싶지 않으냐?
카일은 철판에서 손을 떼었다.
‘살고 싶다. 그렇다고 모르는 것을 전부 삼키지는 않아.’
검은 흔적이 손가락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카일은 손바닥을 뒤집고 흰 재 선 바깥에 철판을 세웠다. 검은 습기는 철판 모서리에 닿아 멈추지 않았지만 진행 속도가 늦어졌다.
“세르단 사제. 안쪽 선만 눌러 주십시오.”
“바깥쪽은?”
“아직 건드리지 마십시오.”
세르단의 태양신성이 회랑 쪽 검은 선을 눌렀다. 선은 얇아졌고 문 바깥 돌틈의 흔적은 짙어졌다.
세르단이 입술을 굳혔다.
“앞서 측정한 반응과 닮았소.”
“같은 물질인지는 모릅니다.”
마렌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표식 흐림과 열여섯 박자는 같습니다.”
“그 사실만 적어.”
카일은 문고리를 보았다.
그는 방금 전까지 저 문을 열고 싶었다. 지금은 문이 닫혀 있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치료실로 돌아오자 라시안이 눈을 뜨고 있었다.
“나가려 했다는군.”
총서기관이 먼저 말했다. 누가 전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황실의 문은 모든 움직임을 기록했다.
카일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랬습니다.”
총서기관의 눈이 커졌다.
“황태자 전하를 두고?”
“두고 가려던 건 아닙니다.”
“목적지도 없이?”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시안이 손가락을 들어 총서기관을 멈췄다.
“그가 떠날 생각을 했다는 사실과 그가 떠나야 한다는 판단은 나누어 기록하시오.”
마렌의 펜이 움직였다.
“성별교 교주. 서쪽 문에서 비공개 이동 시도. 목적지·귀환 시각 미정. 문턱 반응 확인 후 복귀.”
카일은 그 문장을 듣고 헛웃음을 삼켰다.
“비공개 이동 시도라니. 내가 범죄자라도 된 것 같군.”
“문을 몰래 열려고 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렌이 말했다.
“그러니 시도라고만 적습니다.”
레오나는 서쪽 문에서 가져온 철판을 바닥에 놓았다.
“문턱 반응은 하부의 세 지점과 같은 물질인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열여섯 박자와 표식 흐림이 함께 나타났습니다. 바깥 돌틈으로 이어지는 흔적도 있었습니다.”
라시안의 얼굴이 굳었다.
“문 밖으로 이어졌다는 뜻이오?”
“이어지는 듯 보였다는 뜻입니다.”
카일이 고쳐 말했다.
“바깥 돌틈의 검은 흔적이 하부 통풍로와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문을 열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열 수 없습니다.”
“왜요?”
“문을 여는 순간 우리가 측정해야 할 경계를 밟게 됩니다. 말이 겁나서가 아니라 기록할 수 없는 변화가 늘어납니다.”
라시안은 한동안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정말 떠나고 싶었소?”
카일은 거짓말을 고르려 했다.
하지만 라시안의 호흡과 문턱의 금속음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는 원인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또 다른 거짓말을 붙일 수 없었다.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치료실이 조용해졌다.
“황태자 전하가 죽으면 가장 먼저 의심받을 사람은 저입니다. 궁정 아래에서 일이 터졌고 저는 그 힘을 다룬다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저 혼자 살아남을 길을 찾은 겁니다.”
“그 선택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겠소.”
라시안이 힘겹게 숨을 골랐다.
“다만 혼자 빠져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따라 나갈지 정할 기회를 잃습니다.”
레오나가 카일을 보았다.
“남으라는 명령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녀의 말은 짧았다.
“남는다면 누구를 위해 남는지 기록하십시오. 떠난다면 누구를 위험에 남기는지 기록하십시오.”
카일은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의 명령만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레오나는 충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충성의 방향을 카일의 기분에 맡기지는 않았다.
카일은 가방을 열었다. 개인 이동비와 문서를 꺼내 공용 장부 옆에 놓지 않고 별도의 봉인지 위에 올렸다.
“이건 공용금과 섞지 마. 그렇다고 버리지도 않는다.”
마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 비상 자산으로 별도 봉인하겠습니다.”
카일은 서쪽 문에서 가져온 문서를 펼쳤다.
목적지란의 글자가 번져 있었다.
문서에 물이 닿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잉크는 한쪽에서 검게 퍼졌고 비어 있던 칸 가운데에 가느다란 선 하나가 생겨 있었다.
마렌이 문서를 가까이 가져갔다.
“누가 그었습니까?”
“아무도 손대지 않았어.”
카일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파멸의 별이 낮게 속삭였다.
―마지막 칸이 너를 기다린다.
카일은 손을 거두었다.
“주소란이 훼손됐다고만 적어.”
“문턱 반응과 같은 원인이라고 적을까요?”
“아니. 함께 관찰됐다고만.”
카일은 라시안을 보았다.
“해가 뜨기 전까지 남겠습니다. 서쪽 문은 네 번째 측정 지점으로 추가합니다. 바깥 돌틈을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도 문을 열지 마십시오. 황실·태양신전·성별교가 함께 기록합니다.”
총서기관이 반발하려 했지만 라시안이 먼저 말했다.
“그 명령을 기록하시오.”
마렌은 새 철판에 문장을 남겼다.
카일은 안도하지 못했다. 그는 성자가 되어 남은 것이 아니었다. 문 밖에도 위험이 있을 수 있고 혼자 도망치면 자신이 가장 먼저 밟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남았다.
그 계산이 전부라고 믿으려 했다.
그때 서쪽 문 바깥에서 짧은 금속음이 한 번 더 울렸다.
마렌의 철판 위에 놓인 빈 칸 하나가 검게 젖었다.
누구도 선을 긋지 않았는데 마지막 칸이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