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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37화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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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진짜 위기

궁정 바닥 아래에서 올라온 진동은 종소리가 아니었다.

한 곳에서 울린 소리가 벽과 바닥을 타고 번지는 느낌도 아니었다. 서로 다른 금속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동시에 떨다가 잠시 멎었다.

카일은 손에 든 도면을 내려놓지 못했다.

총서기관이 먼저 외쳤다.

“전부 봉인하라! 측정판과 도면을 회수하고 황태자 전하를 다른 방으로 옮긴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십시오.”

카일의 목소리가 치료실을 눌렀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확인할 거울을 찾지 않았다. 입술이 굳었는지 눈이 흔들리는지 살필 여유도 없었다. 목 아래까지 번진 검은 흔적이 차갑게 식어 가는 것만 느껴졌다.

“사람을 옮기면 환자의 호흡과 바닥의 반응을 다시 나눌 수 없습니다. 기록이 끊깁니다.”

“기록보다 안전이 먼저요!”

“그래서 지금 순서를 지켜야 합니다.”

카일은 마렌을 돌아보았다.

“성명은 쓰지 마. 역할과 위치만 보고하게 해.”

마렌은 새 철판을 펼쳤다.

“동궁 치료실. 성별교 교주.”

“동궁 치료실. 성별교 기록 담당.”

“점검구 앞. 태양신전 봉인감찰.”

세르단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실 경비 둘은 침상과 점검구 사이의 흰 재 선을 넘지 않은 채 벽을 살폈다. 바렌은 수리판 아래에 빈 철판을 밀어 넣었다. 마렌은 동쪽 벽의 배수 홈에도 작은 철판을 세웠다.

도면에 그려진 세 갈래는 아직 종이 위의 선이었다. 하지만 선이 향하는 방향마다 금속이 있었다.

라시안의 숨이 짧게 떨렸다.

도르반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열세 번째 호흡입니다. 맥박이 다시 오릅니다.”

카일은 물그릇 세 개를 철판 옆으로 밀었다.

“열여섯까지 확인합니다. 호흡이 더 짧아지면 중단합니다.”

라시안이 눈을 뜨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 조건을 지키시오.”

첫 번째 물그릇의 수면이 흔들렸다. 곧 수리판 아래의 철판이 울렸다. 동쪽 벽의 물그릇은 조금 늦게 기울었다.

각자 다른 움직임이었다.

카일은 숨을 세었다.

열넷.

점검구 아래의 검은 막이 금속판 가장자리에서 꿈틀했다. 세르단이 손을 들었지만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변화부터 봅니다.”

열다섯.

검은 막이 흰 재 쪽으로 가느다랗게 번졌다. 침상으로 곧장 향하지 않고 바닥 아래에서 방향을 틀었다. 동쪽 벽의 철판에 붙은 표식 하나가 희미해졌다.

열여섯.

세 철판이 동시에 떨렸다.

라시안의 숨이 들어온 시각과 철판이 떨린 시각은 같았다.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렌의 펜이 철판 위에서 멈췄다.

“동시 반응으로 기록하겠습니다. 인과는 미상으로요.”

“그래.”

카일의 대답은 갈라졌다.

파멸의 별이 손목 안쪽에서 낮게 웃었다.

―이제 보았느냐.

‘무엇을?’

―먹이가 한 곳에 있지 않다.

‘먹이라고 부르지 마.’

―궁정 아래가 아니라 더 넓은 곳에 있다.

카일은 검은 막에서 시선을 떼었다.

별은 답을 주지 않는다. 감정의 균열과 마력의 흔적을 볼 뿐이다. 그런데도 그 말이 틀렸다고 반박할 근거가 없었다.

그 사실이 가장 끔찍했다.


카일은 물그릇을 옮겼다.

수면의 기울기를 선으로 옮기고 빈 철판의 긁힌 표식을 서로 연결했다. 점검구 아래의 선은 동쪽 벽으로 향했다. 수리판 아래의 선은 기록고 방향으로 누웠다. 세 번째 철판에서는 검은 습기가 북쪽 회랑 쪽으로 흐른 흔적이 나타났다.

“중앙에서 퍼진 것이라면 첫 번째 철판이 먼저 반응해야 합니다.”

“금속의 차이일 수도 있소.”

세르단이 대답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중심이 있다고 쓰지 않습니다.”

카일은 자신의 발 앞에 철판을 하나 더 세웠다. 물그릇을 옆에 두고 도면의 갈라진 선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여기서 바깥으로 번졌다면 흰 재에 닿을 때 속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바깥에서 안으로 당겨진다면 세 지점의 장력이—”

말이 끊겼다.

자신의 철판 아래에서 검은 습기가 솟았다.

카일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습기는 그의 발을 향하지 않았다. 세 갈래로 갈라진 뒤 점검구와 수리판과 동쪽 배수 홈을 향해 미끄러졌다.

그는 손을 들었다.

“세르단 사제. 오른쪽을 막아 주십시오.”

“왼쪽은?”

“아직 건드리지 마십시오.”

세르단이 태양신성을 펼쳤다. 금빛 막이 벽 쪽의 검은 습기를 눌렀다. 검은 것은 움츠러드는 대신 반대편 선을 짙게 만들었다.

“방향만 바뀌었습니다.”

“그렇소.”

카일의 입 안이 말랐다.

―먹어라.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모두 삼키면 조용해진다.

‘모두라는 말은 사람의 숨까지 포함하느냐?’

―황태자의 숨에 붙은 조각부터 먹으면 된다.

‘안 돼.’

―네가 만든 경계는 종이와 재뿐이다. 저것은 그 경계를 모른다.

카일은 손을 움켜쥐었다.

손끝에서 검은 빛이 피어오르려 했다. 그때 라시안이 숨을 들이마셨다.

침상 아래의 선 하나가 검게 솟았다.

카일은 손을 펴지 않고 물그릇을 발끝으로 밀었다. 물이 흰 재를 적시며 선의 위치를 드러냈다. 그는 그 위에 빈 철판을 세웠다. 검은 선은 철판 모서리를 따라 움직이다가 멈췄다.

정화가 아니었다. 흡수도 아니었다.

그저 닿을 곳을 늦춘 것뿐이었다.

회수 담당자가 묶인 채 벽을 바라보았다.

“이런 순서는 회수 신호가 아닙니다.”

카일이 그를 돌아보았다.

“알고 있다는 말인가?”

“본 적이 있다는 말이지 아는 건 아니오.”

“무엇을 본 적이 있지?”

“열여섯 번째 뒤에 철판이 먼저 울리는 것. 그다음에 마지막 칸을 비우라는 명령이 왔소.”

“마지막 칸에 있던 건 사람인가?”

사내는 입을 닫았다.

카일은 더 묻지 않았다.

그 애매함은 익숙했다. 상대가 숨기는 모양을 찾고 빈틈에 그럴듯한 결론을 밀어 넣는 것이 그의 본업이었다.

이번에는 빈틈이 너무 컸다.

어떤 결론을 밀어 넣어도 바닥 아래의 진동은 계속됐다.

이건 무대가 아니었다.

증인이 오기 전에 움직였다. 믿는 사람이 없어도 번졌고 그가 어떤 이름을 붙이든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환각으로 하늘에 별을 띄울 수는 있어도 궁정 아래의 금속들이 왜 같은 박자로 우는지는 연출할 수 없었다.

사형대의 계단이 떠올랐다.

그날 그는 살기 위해 말이 되는 주문을 찾았다. 문장을 몰라도 소리를 이어 붙였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머릿속의 계산은 빨라졌다.

지금은 계산할수록 도망칠 곳이 줄어들었다.


“교주.”

레오나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카일은 그녀를 보았다. 레오나는 검을 뽑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명령만 기다리는 자세였다.

그 눈이 이상하게 무서웠다.

카일이 한마디만 하면 그녀는 검을 들고 지하로 내려갈 것이다. 그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레오나. 바깥 복도와 서쪽 문을 확인해.”

“봉쇄합니까?”

“출입 경로를 확인하는 거야.”

“누가 나갑니까?”

카일의 목이 잠겼다.

“아직 정하지 않았다.”

레오나는 묻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총서기관이 끼어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외부 통로를 확인하면 공포가 퍼집니다. 측정판을 회수하고 환자와 포로를 분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분리하면 누가 무엇을 만졌는지 기록할 수 없습니다.”

마렌이 조용히 말했다.

총서기관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기록관이 황실의 명령에 토를 다는군.”

“황태자 전하의 명령에는 따르고 있습니다.”

라시안이 힘겹게 눈을 떴다.

“기록을 나누지 마시오.”

총서기관이 입을 다물었다.

라시안은 카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하가 궁정 아래 전부 이어졌다는 뜻이오?”

“도면상 세 갈래가 있습니다. 세 지점에서 번짐이 확인됐습니다. 그 이상은 모릅니다.”

“황도 전체와 이어졌을 가능성은?”

“모릅니다.”

“내 병과 같은 원인인가?”

“그것도 모릅니다.”

라시안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럼 모른다는 말을 기록하시오. 그 말을 빼면 나중에 누군가 아는 척하게 됩니다.”

카일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그 말은 그가 마렌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확인되지 않은 결론은 기록에 넣지 말 것. 동시에 일어난 사실과 원인을 섞지 말 것.

그 원칙이 지금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도르반이 침상 곁에서 말했다.

“기록고 아래의 입구를 열면 환자와의 거리를 더 벌려야 합니다. 호흡이 다시 짧아질 수 있습니다.”

세르단이 장부를 덮었다.

“신전 원본과 대조하려면 봉인 권한을 나누어야 합니다.”

라시안이 마렌을 보았다.

“세 부 기록은 유지하시오. 해가 뜨기 전에 입구의 상태만 확인한다. 열 수 있는지는 그때 결정한다.”

“전하께서 직접 명령하신 것으로 적겠습니다.”

“적으시오.”

카일은 허리춤의 작은 주머니를 만졌다.

도망칠 때를 대비해 따로 보관해 둔 개인 여비였다. 액수는 많지 않았지만 공용 장부와 섞이지 않은 돈이었다.

그는 마렌을 불렀다.

“공용 장부와 섞이지 않은 이동비가 얼마나 남았지?”

마렌의 펜이 멈췄다.

“황실에서 배정한 이동비는 일부 남았습니다. 성별교 공용금은 구휼·증명·자립 항목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공용금은 건드리지 마.”

“개인 여비는요?”

“서쪽 문을 통과할 마차와 신분 문서를 알아봐. 오늘 밤 안에.”

마렌은 카일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그녀는 묻지 않았다. 대신 새 철판 구석에 작은 점 하나를 찍었다.

확인되지 않은 명령을 따로 보관한다는 표시였다.


새벽 직전 바렌과 황실 경비가 도면상 기록고 방향의 막힌 철문 앞에 빈 철판을 놓았다. 북쪽 회랑 아래로 이어지는 배수 홈에도 같은 크기의 철판을 세웠다.

실제 통로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봉인도 풀지 않았다.

그들은 위치와 시각만 확인한 뒤 치료실로 돌아왔다.

카일은 도면 위에 네 개의 점을 놓았다.

점검구. 수리판. 동쪽 배수 홈. 기록고와 북쪽 회랑 방향의 측정 지점.

각 지점은 서로 다른 거리와 재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열여섯 번째 호흡이 가까워지자 모든 철판 위에 차가운 습기가 맺혔다.

도르반이 라시안의 얼굴을 확인했다.

“호흡은 아직 유지됩니다.”

“세르단 사제.”

“준비했소.”

“이번에도 한 지점만 누릅니다.”

세르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세 번째.

점검구 아래의 검은 막이 얇게 부풀었다.

열네 번째.

기록고 방향의 철판에서 금속음이 났다.

열다섯 번째.

북쪽 회랑 쪽 철판의 표식이 흐려졌다.

열여섯 번째.

모든 철판이 동시에 떨렸다.

이번에는 지하의 진동이 바닥에서만 느껴지지 않았다. 벽 속의 작은 종이 흔들리고 수리판 안쪽의 구리선이 팽팽해졌다. 점검구 왼쪽의 회색 천 조각은 침상 방향으로 당겨졌고 오른쪽 연결은 벽 속 깊은 곳을 향해 당겨졌다.

검은 막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세르단의 빛이 한 줄을 눌렀다. 눌린 줄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두 줄을 짙게 만들었다.

카일은 철판을 들어 침상과 점검구 사이에 세웠다.

“전부 뒤로.”

이번에는 누구도 반문하지 않았다.

레오나가 가장 먼저 라시안의 침상을 옮기지 않고 사람들만 물렸다. 마렌은 흰 재 선 바깥의 위치를 외쳤고 경비는 포로의 손목과 발목이 봉인끈에 닿지 않게 고정했다.

카일은 떨리는 손으로 철판의 가장자리를 잡았다.

그는 아직 원인을 몰랐다. 시작점도 몰랐고 언제 시작됐는지도 몰랐다. 라시안의 병이 이것 때문인지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었다.

“이건 실제 위험으로 취급합니다.”

총서기관이 숨을 삼켰다.

“그 말을 기록해도 되겠소?”

“확인된 범위와 함께 기록하십시오. 원인은 미상입니다. 범위는 조사 중입니다. 누구도 단독으로 봉인을 풀지 않습니다.”

그는 말하면서도 마렌의 철판 구석에 찍힌 점을 떠올렸다.

공개 기록에는 실제 위험.

자신의 주머니에는 도주 자금.

두 가지를 동시에 준비하는 자신이 역겨웠다.

그때 마렌이 개인 여비와 문서를 작은 가방에 넣었다. 그녀의 손이 가방끈을 묶는 순간 레오나가 문간에 나타났다.

레오나는 가방을 보았다. 카일을 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교주님은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카일은 대답하지 못했다.

바닥 아래에서 열여섯 번째가 아닌 새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치료실 밖 복도까지 그 소리가 번진 듯했다.

카일은 자신이 도망칠 곳부터 찾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어디로 도망쳐도 저 진동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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