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36화: 지하의 오염
두 번째 종이 멎은 뒤에도 회색 천 조각은 떨리고 있었다.
점검구 안쪽이 아니었다. 침상 아래에서 마른 마찰음이 한 번 더 났다.
도르반이 라시안의 손목을 붙잡았다.
“호흡이 짧아집니다.”
총서기관이 경비를 향해 손을 들었다.
“포획한 사내를 지하 감옥으로 옮겨라. 점검구와 수리판은 전부 봉인한다.”
“아직 움직이지 마십시오.”
카일이 말을 끊었다.
“사람을 옮기면 종소리와 장치 반응과 전하의 상태가 섞입니다.”
“황태자께서 악화되고 있소!”
“그러니 순서를 지켜야 합니다.”
카일은 마렌에게 빈 철판을 내밀었다.
“성명은 적지 마. 역할과 위치만.”
마렌은 종소리의 시각과 회색 천이 떨린 위치를 나누어 적었다. 도르반이 확인한 맥박 변화는 그 아래에 따로 남겼다.
‘보조 통로 안쪽에서 종소리 발생.’
‘종소리 직후 점검구 왼쪽 연결의 회색 천이 짧게 떨림.’
‘환자의 호흡 변화는 같은 시각에 관찰됐으나 인과관계 미상.’
총서기관이 회수 담당자를 노려보았다.
“네가 종을 울렸나?”
“아니오.”
“두 번째 종이 언제 울리는지는 알고 있었지?”
사내는 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소리가 있다는 것만 알았소. 내가 울린 건 아니오.”
레오나가 그의 팔꿈치를 꺾었다.
“안쪽에 다른 사람이 있나?”
“보지 못했소.”
“있다는 뜻인가?”
“보지 못했다는 뜻이오.”
카일은 대답 사이의 침묵까지 마렌에게 기록하게 했다.
바렌이 수리판 옆에 얇은 철판을 세웠다. 경비가 벽을 두드리자 철판이 낮게 떨렸다. 이번에는 벽보다 바닥 아래에서 올라오는 진동이 먼저 전해졌다.
마렌이 점검구 아래에 물그릇을 놓았다.
수면이 벽 쪽으로 기울었다. 물 위에 실 한 가닥 같은 검은 흔적이 번졌다.
카일의 손목이 뜨거워졌다.
―아래에서 올라온다.
‘확정하지 마.’
―오래 굶은 마력의 냄새다.
‘냄새를 맡은 것과 원인을 아는 건 다르다.’
카일은 손을 뻗지 않았다.
라시안이 다음 호흡을 들이켰다.
왼쪽 연결은 침상 아래로 당겨졌다. 오른쪽 연결은 벽 속으로 팽팽해졌다. 두 선은 한곳으로 모이지 않았다.
그때 점검구 아래에서 차가운 습기가 올라왔다.
카일은 흰 재 선 바깥에 빈 철판을 세웠다.
“다음 측정은 물질만 확인합니다. 사람도 장치도 당기지 마십시오.”
라시안이 힘겹게 눈을 떴다.
“호흡이 더 짧아지면 중단하시오.”
“그 조건을 지키겠습니다.”
마렌의 펜 끝이 철판 위를 눌렀다.
바렌은 석회판 전체를 들어내지 않고 들뜬 가장자리만 쇠막대 끝으로 밀었다.
석회 아래에서 두 겹의 금속판이 드러났다. 오래된 판 사이에는 검은 습기가 눌어붙어 있었다.
카일은 측정 줄 끝에 빈 금속판을 매달았다.
“내려.”
마렌이 줄을 놓았다. 금속판이 틈 아래로 미끄러지며 마른 마찰음을 냈다.
다시 끌어올린 판에는 물처럼 흐르지 않는 검은 막이 묻어 있었다. 가루와 습기가 함께 붙은 얼룩이었다.
마렌이 판 가장자리에 긁어 둔 점 세 개를 살폈다.
“표시 하나가 흐려졌어요.”
“닦인 건가?”
“아니요. 선이 있던 자리만 비어 있어요.”
세르단 사제가 손을 내밀었다.
“최소한의 태양신성을 사용하겠습니다.”
“변화를 먼저 남기십시오.”
카일이 말했다.
세르단의 손끝에서 작은 빛이 피어났다. 빛이 검은 막에 닿자 얼룩은 안쪽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았다. 막은 금속판 가장자리에서 세 갈래로 갈라졌다.
벽 안쪽의 종추가 흔들렸다.
종은 울리지 않았다.
마렌이 종추와 금속판의 위치를 따로 그렸다.
“태양신성에 반응했지만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봉인 안쪽으로 밀린 것에 가깝군.”
세르단이 말했다.
“그건 해석입니다.”
카일은 금속판을 흰 재 바깥으로 옮겼다.
“확인된 건 막이 움츠러든 뒤 세 방향으로 갈라졌다는 사실입니다.”
파멸의 별이 손목 안쪽을 긁었다.
―저것은 네가 먹을 수 있다.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환자의 숨에 붙은 조각까지 먹으면 더 빠르다.
‘사람의 숨과 기억은 내 먹이가 아니다.’
검은 흔적이 손가락 마디에서 멈췄다. 통증은 남았지만 별은 더 말하지 않았다.
레오나가 회수 담당자를 보았다.
“저걸 본 적이 있나?”
“검은 것은 많이 봤소.”
“같은 것인가?”
“모르오.”
사내는 침묵했지만 검은 막이 갈라진 자리를 피하지 못했다. 마렌은 그 반응을 별도의 진술 칸에 남겼다.
그때 바렌이 낡은 도면을 펼쳤다.
“시설과 보관함에서 찾았습니다. 오래된 하부 통풍로 도면입니다.”
도면의 가장자리에는 여러 번 덧칠한 흔적이 있었다.
16번 통풍구는 동궁 치료실 아래에서 끝나지 않았다. 선은 동쪽 벽을 따라 뻗은 뒤 세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오래된 기록고 아래로 향했고 하나는 북쪽 회랑 아래로 이어졌다. 마지막 선은 도면 가장자리에서 끊겼다.
바렌이 선을 짚었다.
“장부에는 폐쇄된 하부 통풍로라고 적혀 있습니다.”
“폐쇄했다면서 선은 남겨 두었군요.”
마렌이 말했다.
카일이 도면을 기울였다. ‘폐쇄 완료’라는 먹 아래에서 다른 획이 드러났다. 글자 일부만 보였고 누가 덧칠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렌은 읽히는 만큼만 적었다.
‘16번 통풍구에서 동쪽 하부 통풍로로 분기하는 선 확인. 폐쇄 표기와 덧칠된 문자 존재. 전체 문장과 작성 시점 미상.’
총서기관이 도면을 접으려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황태자의 치료 기록과 연결된 시설을 더 살필 수는 없소.”
“살피지 않으면 한 사람이 오염을 지웠다고 말하는 순간 끝납니다.”
카일이 대답했다.
세르단은 검은 금속판을 바라보았다.
“부식이라면 태양신성에 반응해 갈라진 이유를 설명해야 합니다.”
“신전에서도 설명하지 못하는군.”
“설명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오염이라는 결론은 다릅니다.”
그 말에 카일은 세르단을 보았다. 사제는 이번에도 모르는 범위를 숨기지 않았다.
마렌은 빈 철판 두 장을 복도 쪽에 놓았다. 하나는 수리판 아래에 두고 다른 하나는 동쪽 벽의 배수 홈 근처에 세웠다. 경비는 흰 재를 밟지 않은 채 철판 옆에 물그릇을 밀었다.
첫 번째 물그릇의 수면이 아래쪽으로 기울었다.
두 번째 철판의 긁힌 표식 하나가 흐려졌다.
두 지점 모두 검은 막이 보였지만 치료실 아래보다 훨씬 옅었다.
마렌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한 장치에 갇힌 흔적이 아니에요.”
총서기관이 경비에게 손짓했다.
“모두 회수해라.”
“그 명령은 기록해야 합니다.”
카일이 말했다.
“황태자의 병이 궁정 전체에 퍼졌다는 소문이라도 내겠다는 거요?”
“병과 오염을 같은 말로 적은 적은 없습니다. 확인된 범위가 넓어졌다고 적는 겁니다.”
라시안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도르반이 어깨를 눌렀다.
“전하께서는 누우셔야 합니다.”
“내 병을 숨기면 치료가 쉬워집니까?”
도르반은 대답하지 못했다.
라시안이 마렌을 보았다.
“치료 기록과 지하 기록을 나누어 세 부로 남기시오. 확인되지 않은 결론은 넣지 마시오.”
마렌이 명령을 적었다.
총서기관은 입술을 깨물었다. 거부하면 황태자의 명령을 거스르게 된다.
그 순간 수리판 아래의 검은 막이 크게 부풀었다.
철판 두 장이 동시에 울렸다.
라시안의 침상 아래에서 왼쪽 연결이 튕겼다. 회색 천 조각은 침상 쪽으로 끌렸고 오른쪽 연결은 벽 속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도르반이 외쳤다.
“중단해야 합니다!”
라시안의 호흡이 끊길 듯 짧아졌다.
카일은 빈 철판을 침상과 점검구 사이에 밀어 넣었다. 검은 막의 끝이 철판 모서리에 닿았다.
차가운 습기가 철판 표면을 기어갔다. 흰 재가 젖으며 회색 선으로 변했다.
파멸의 별의 허기가 손끝까지 번졌다.
―먹어라. 지금 먹으면 환자의 목을 조르는 선도 끊긴다.
‘그 선만 먹는다는 보장이 없다.’
―너는 경계를 만들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만든 경계를 쓴다.’
카일은 손을 철판 위에 올리지 않고 물그릇을 밀었다. 물이 흰 재 위로 번지자 검은 막의 진행 방향이 드러났다.
막은 침상으로 곧장 향하지 않았다. 바닥 아래의 돌줄 세 갈래를 따라 먼저 퍼졌다. 하나는 침상 아래로 향했고 둘은 동쪽 벽과 복도 쪽으로 갈라졌다.
세르단이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방향만 틀겠습니다.”
태양신성이 바닥 틈을 눌렀다. 검은 막은 침상 쪽 길에서 물러났지만 복도 쪽 두 줄이 짙어졌다.
“정화가 아닙니다.” 세르단이 말했다. “한쪽을 밀어 다른 곳으로 보냈을 뿐입니다.”
카일은 손을 내렸다.
도르반이 라시안의 얼굴을 확인했다.
“다음 호흡 전까지 닫아야 합니다.”
“닫겠습니다.”
카일은 바렌에게 금속판을 받치게 했다. 마렌이 위치를 외쳤다.
“카일은 침상과 점검구 사이. 레오나는 회수 담당자 옆. 세르단은 동쪽 벽. 도르반은 황태자 곁.”
라시안이 숨을 들이켰다.
검은 막이 세 갈래 돌줄 위에서 꿈틀했다. 왼쪽 연결은 침상 아래에서 멈췄고 오른쪽 연결은 벽 안쪽으로 당겨졌다. 회색 천의 붉은 실이 팽팽해졌지만 끊어지지는 않았다.
라시안의 숨이 빠져나왔다.
그제야 카일은 철판을 뒤로 물렸다. 바렌과 경비가 금속판을 원래 위치로 내렸다. 검은 습기는 틈 아래로 돌아갔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라시안이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지하를 닫으면 끝나는 것이오?”
“아직 아무도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카일은 도면과 철판을 바라보았다.
“16번 통풍구에서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궁정 아래 여러 길로 번지고 있다는 사실은 확인됐습니다.”
총서기관이 낮게 말했다.
“그 사실이 밖으로 나가면 황도가 혼란에 빠집니다.”
“숨긴다고 안전해지는 건 기록이 아닙니다.”
카일은 황실 경비와 세르단과 마렌을 차례로 보았다.
“황실과 태양신전과 성별교가 함께 하부 통로를 조사합니다. 누구도 장치와 도면을 단독으로 가져가지 않습니다. 환자의 호흡이 흔들리면 즉시 중단합니다.”
세르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검은 금속판에 머물러 있었다.
레오나가 회수 담당자를 벽에서 떼어 놓았다.
“너는 이게 무엇인지 정말 모르나?”
“회수하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오.”
“무엇을 회수하려 했지?”
사내는 점검구 아래를 보았다.
“사람이 아니라면 장치일 것이고 장치가 아니라면 기록일 것이오. 어느 쪽인지 알았다면 붙잡혀 있지도 않았겠지.”
그 말이 끝나자 치료실 바닥 아래에서 진동이 올라왔다.
한 번의 종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금속이 먼 곳에서 동시에 떨리는 듯한 울림이었다.
도면 위의 검은 선이 흔들렸다. 철판 표면에도 같은 방향의 습기가 번졌다.
카일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궁정 아래 어딘가에서 검은 오염이 여러 갈래로 숨을 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