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35화: 이름 없는 종
종이 한 번 울렸다.
이번에도 아무도 줄을 당기지 않았다.
세르단의 손가락은 봉인끈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붉은 밀랍의 인장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소리는 치료실 반대편 복도에서 분명하게 들렸다.
총서기관이 경비들에게 손을 들었다.
“모든 출입구를 닫아라. 복도에 있는 자를 한 명씩 확인한다.”
“이름은 부르지 마십시오.”
카일이 말을 끊었다.
총서기관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궁 안에서 사람을 찾는데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건가?”
“우리가 찾는 게 사람인지 장치인지 아직 모릅니다. 이름을 먼저 부르면 저쪽의 대답인지 우리의 반응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카일은 마렌에게 빈 철판을 내밀었다.
“성명 대신 역할과 위치를 적어.”
마렌은 곧바로 펜을 움직였다.
‘치료실 내부. 성별교 교주.’
‘치료실 내부. 성별교 기록 담당.’
‘점검구 외부. 태양신전 봉인감찰.’
그녀는 종소리의 시각과 세르단의 손 위치를 나란히 남겼다.
도르반이 라시안의 손목을 확인했다.
“맥은 조금 빨라졌지만 호흡은 유지됩니다.”
“점검구는?”
“왼쪽 천 조각은 움직이지 않았어요. 오른쪽 연결이 짧게 당겨졌습니다. 봉인끈이 아니라 벽 쪽에서요.”
카일은 흰 재 선을 넘지 않은 채 반대편 복도를 살폈다. 복도 끝 등불은 꺼져 있었다. 창고문은 닫혔고 봉인도 그대로였다.
황실 경비가 보고했다.
“발자국이 끊긴 지점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두 걸음째에서 끝난 흔적 그대로입니다.”
“발자국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소리가 난 방향만 확인합니다.”
총서기관이 언성을 높였다.
“궁정 안에 침입자가 있는데 확인만 하란 말인가?”
“침입자가 복도에 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지금 확인된 건 움직이지 않은 봉인끈과 울린 종입니다.”
바렌이 얇은 철판을 벽에 붙였다. 경비가 반대편을 두드리자 치료실 안의 철판이 낮게 떨렸다.
“수리판 뒤에 좁은 빈 공간이 있습니다.”
라시안이 침상에서 말했다.
“역할별로 확인하라. 문을 부수지 말고 구조를 먼저 보시오.”
카일은 철판에 한 줄을 더했다.
‘종소리 발생 시 봉인끈과 인장 움직임 없음. 점검구 오른쪽 연결의 단시간 장력 변화. 벽 내부 공명 확인.’
마렌이 고개를 들었다.
“공명을 직접 본 건 아니잖아요.”
“바렌이 확인한 떨림만 적어.”
그 순간 복도 벽의 오래된 수리판 틈에서 종이 한 장이 밀려 나왔다.
누군가 안쪽에서 밀어낸 모양이었다.
레오나의 검이 반쯤 빠져나왔다.
“손대지 마.”
종이는 흰 재 선 바깥에 멈췄다.
위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마지막 칸은 비어 있지 않다.’
그 아래에는 열여섯 홈을 본뜬 네모와 원 두 개가 그려져 있었다.
마렌은 종이를 직접 집지 않았다. 빈 철판을 아래로 밀어 넣고 그 위에 새 봉인지를 덮었다.
“찢긴 방향은 왼쪽에서 오른쪽입니다. 접힌 선은 두 번이고 작성자와 시점은 알 수 없어요.”
총서기관이 손을 뻗었다.
“황실 문서다. 내가 보관하겠다.”
“세 부 기록부터 남기십시오.”
“궁정 기밀을 이단에게 맡기라는 건가?”
“기밀이라서 한 사람이 들고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겁니다.”
세르단은 종이 가장자리를 살폈다.
“태양신전의 문서지는 아닙니다. 황실 문서라는 판정도 내릴 수 없습니다.”
마렌이 종이의 찢긴 틈에 박힌 붉은 실을 가리켰다.
“점검구에서 나온 천 조각과 색은 같습니다.”
“실을 빼내지는 마.”
카일이 말했다.
마렌은 실의 위치만 그렸다.
바렌이 수리판 가장자리를 손전등으로 비췄다.
“최근에 다시 끼운 흔적이 있습니다. 녹이 벗겨진 부분도 새로 생겼고요.”
레오나는 판 아래의 흰 재를 살폈다.
“안쪽으로 가느다란 회색 가루가 이어집니다. 발 하나가 지나간 폭은 아니에요.”
카일은 거울과 측정 줄을 가져오게 했다.
거울을 수리판 틈에 넣자 어둠 속에서 작은 종 하나가 드러났다. 종추에는 세 갈래 흠집이 있었다.
측정 줄 끝의 고리를 밀어 넣자 종추 아래로 얇은 구리선이 보였다. 구리선은 벽을 따라 내려가 방향을 꺾은 뒤 치료실 쪽으로 사라졌다.
“점검구의 오른쪽 연결과 같은 선입니까?”
마렌이 물었다.
“방향이 비슷할 뿐이야. 같은 선이라고 적지 마.”
마렌은 두 흔적을 서로 다른 칸에 기록했다.
수리판 틈에서 다시 금속음이 났다.
안쪽의 누군가가 쪽지를 되찾으려 하고 있었다.
레오나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수리판을 부수지 않고 틈으로 나온 손목을 철판 가장자리에 눌렀다. 안쪽 사람이 손을 빼려 했지만 팔꿈치의 방향이 꺾이며 움직임이 막혔다.
“손 안에 든 걸 내려놔.”
낡은 종추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표면에는 작은 빈 칸과 세 갈래 흠집이 있었다.
황실 경비가 통로 반대편으로 돌아가 출구를 막았다. 바렌이 벽을 부수려 하자 카일이 제지했다.
“사람이 나올 폭만 확보하십시오.”
레오나가 손목을 당겼다. 수리판 뒤에서 검은 외투의 사내가 반쯤 끌려 나왔다. 이름표가 달려 있어야 할 목 부분은 비어 있었고 오른손 손목에는 오래된 흉터 세 줄이 남아 있었다.
레오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침묵 매듭을 아는군.”
“당신도 아는 모양이오.”
“방식과 소속은 별개다.”
카일은 사내의 허리춤을 뒤지지 않고 철판 위의 종추만 가리켰다.
“성명은 묻지 않겠습니다. 역할과 진입 위치를 말하십시오.”
사내가 잠시 침묵했다.
“회수 담당자. 벽 속 보조 통로로 들어왔다.”
마렌의 펜이 움직였다.
“회수 담당자라는 직함은 어디서 배웠습니까?”
“지워진 담당자 칸 아래에 남아 있었다.”
사내는 품 안에서 접힌 쪽지를 꺼냈다. 레오나가 그의 팔을 잡은 채 쪽지를 카일에게 던졌다.
‘담당자 없음.’
‘마지막 칸으로 돌려보낼 것.’
종이 가장자리에는 먹물이 번졌고 글자 사이에는 긁힌 자국이 있었다.
총서기관이 물었다.
“하렌을 아나?”
사내의 시선이 점검구로 향했다.
카일이 이어 물었다.
“사람의 이름인지 표식인지 나누어 말하십시오.”
“하렌은 사람을 부르는 이름으로만 배우지 않았소. 마지막 칸에 남은 표식으로 배웠다.”
“그 사람이 살아 있나?”
“모른다.”
“20년 전 담당자는 누구였나?”
“이름은 지워졌다. 역할만 남았다.”
마렌은 사내의 진술을 전언 칸에 따로 옮겼다.
세르단이 종추를 봉인지 위에 올렸다.
“공식 자격패의 중심 문양은 없습니다.”
사내의 다른 손이 주머니 안에서 움찔했다. 레오나가 손가락을 비틀어 주머니를 비웠다. 나온 것은 이름을 새길 자리만 비어 있는 황동 명찰이었다. 뒷면에는 작은 숫자 16이 눌려 있었다.
“점검구의 열여섯 홈과 관련 있습니까?”
마렌이 물었다.
“그렇게 배웠소.”
“누구에게?”
“이름을 말하면 안 되는 사람에게.”
카일은 명찰을 뒤집어 놓았다.
“그가 말한 표식과 사실을 같은 칸에 두지 마.”
파멸의 별이 손목 안쪽을 긁었다.
―저자는 이름을 잃었다.
‘네가 본 건 흉터뿐이다.’
―흉터는 지워진 글자다.
‘추측을 사실처럼 말하지 마.’
카일은 사내의 공포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라시안의 호흡이 다시 짧아졌다.
도르반이 침상 곁에 몸을 숙였다.
“다음 호흡이 더 짧아지면 확인을 중단해야 합니다.”
총서기관은 포획한 사내를 끌어내리려 했다.
“황태자 상태가 흔들립니다. 이자는 지하 감옥으로 옮기고 점검구는 닫아야 합니다.”
“아직 옮기지 마십시오.”
라시안이 힘겹게 말했다.
“이번 측정의 열여섯 번째까지 확인한 뒤 결정하라.”
카일은 레오나에게 사내를 고정한 채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세르단은 봉인끈을 잡았고 마렌은 왼쪽 천 조각과 오른쪽 연결을 각각 다른 선으로 표시했다.
라시안이 열여섯 번째 숨을 들이마셨다.
왼쪽 연결이 먼저 움직였다. 천 조각이 걸린 선이 침상 아래로 끌려갔다.
동시에 오른쪽 연결은 벽 안쪽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벽 속 작은 종의 종추가 한 번 흔들렸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포획된 사내의 얼굴이 굳었다.
“그때는 울리지 않아야 하는데.”
“그때가 언제지?”
카일이 물었다.
“열여섯 번째 숨이 끝나면 두 선이 한쪽으로 모여야 하오.”
“누가 정했나?”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라시안의 숨이 빠져나왔다. 검은 선은 목 아래에서 멈췄고 침상 아래로 끌려간 천 조각도 더 움직이지 않았다.
마렌이 기록했다.
‘이번 열여섯 번째 호흡에서 왼쪽 연결은 침상 방향으로 이동. 오른쪽 연결은 보조 통로 방향으로 장력 증가. 두 선은 합쳐지지 않음.’
카일은 손목의 검은 흔적에서 손을 떼었다.
그때 보조 통로 깊은 곳에서 종이 울렸다.
이번에는 벽 속의 작은 종보다 더 안쪽에서 시작한 소리였다. 종소리가 수리판과 벽을 차례로 통과했다.
동시에 점검구 안쪽의 회색 천이 짧게 떨렸다.
레오나가 포획자의 목을 눌렀다.
“동료가 있나?”
“모르오.”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도 떨렸다.
마렌의 펜이 철판 위에서 멈췄다.
쪽지 아래에는 아직 작성하지 못한 빈 칸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이름을 쓰지 않아도 채워지는 칸이 있었다.
그리고 벽 안쪽의 두 번째 종은 누군가가 아니라 다음 호흡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