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33화: 이름을 돌려보내라
“마렌.”
점검구 안쪽에서 이름이 흘러나왔다.
마렌의 펜이 철판 위에서 멈췄다. 잉크 한 방울이 번졌다.
“돌려보내라.”
마지막 칸의 검은 밀랍이 안쪽으로 꺼졌다. 가느다란 검은 선이 틈에서 빠져나와 설비판의 홈을 타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레오나가 마렌의 어깨를 잡았다.
“뒤로.”
“아직 제 이름을 부른 것뿐이에요.”
“이름을 부르는 것부터 위험하다.”
검은 선은 마렌에게 오지 않았다. 흰 재를 비껴가 철판 위에 적힌 이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카일은 뜨거워진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름 하나면 된다.
‘안 돼.’
―기억을 조금만 먹으면 선이 끊긴다.
‘기억을 먹어야 끊기는 선이면 끊지 않는다.’
카일은 점검구와 마렌 사이에 빈 철판을 세웠다.
“마렌. 선 안으로 들어오지 마. 네 이름을 지우지도 말고.”
“지우면 멎을까요?”
“모른다. 하지만 기록을 없애고 대답을 얻는 방식은 쓰지 않아.”
바닥에 묶인 포로가 낮게 웃었다.
“이름을 남겨 두면 아래가 계속 찾는다.”
레오나의 무릎이 남자의 등을 눌렀다.
“네가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라.”
“봉인실의 서기관에게 들었다. 열여섯 번째까지 세면 아래가 듣는다고.”
“직접 들었나?” 마렌이 물었다.
포로는 답하지 않고 마지막 홈을 보았다. 마렌은 그 시선을 바로 적었다.
“포로의 말은 전언. 발화자와 사실 여부는 미확인. 마지막 홈을 세 번째 봄.”
카일은 새 철판 세 장을 그녀에게 건넸다.
“네 이름과 역할을 직접 말해. 세 기록에 똑같이 남겨.”
마렌은 첫 철판 앞에 섰다.
“마렌. 성별교 기록 담당. 동궁 치료실에서 치료 기록과 지하 장치 기록을 분리해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이름을 적고 서명했다. 황실 경비와 도르반이 다른 두 철판에 증인으로 서명했다.
검은 선이 첫 번째 철판의 잉크를 향해 기어갔다. 흰 재 앞에서 멈췄다가 끝이 재를 밀어냈다.
“물그릇을 옮겨.”
레오나가 물그릇을 철판 옆으로 밀었다. 수면은 점검구가 아니라 기록 쪽으로 기울었다.
카일은 결론을 서두르지 않았다. 선은 마렌의 발끝을 지나지 않고 잉크가 있는 철판과 마지막 홈 사이만 오갔다.
라시안의 숨이 열세 번째에서 짧아졌다.
“전하의 호흡을 먼저 봅니다. 마렌의 철판은 움직이지 마.”
라시안이 힘겹게 눈을 떴다.
“이름을 부른다고 사람을 내어 주지는 마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검은 선이 철판 가장자리에 닿았다. 마렌의 서명 마지막 획이 번졌다가 되돌아왔다.
“기억은 그대로예요.”
“그럼 이름도 그대로 둔다.”
카일은 빈 철판을 한 장 더 세웠다.
그때 복도에서 봉인 종이 울렸다. 경비가 문밖을 향해 외쳤다.
“태양신전 봉인감찰 사제가 도착했습니다!”
세르단 사제는 두 명의 서기관과 함께 치료실 앞에 멈췄다. 흰 겉옷의 회색 띠 아래로 봉인용 인장 세 개가 보였다.
“태양신전 봉인감찰 사제 세르단이다. 호위 둘과 원본 대조 장부 한 권을 가져왔다. 이름과 인장 번호는 문밖 장부에 남겼다.”
카일은 레오나에게 눈짓했다. 레오나는 세르단과 서기관들의 소매와 허리를 확인했다.
“들어오십시오. 환자와 설비판은 만지지 마십시오.”
세르단은 포로에게서 빼앗은 금속패를 얇은 종이 위에 올리고 등불을 비췄다. 중심 문양 아래에서 오래된 주조 결이 드러났다.
“금속과 중심 문양은 진품입니다.”
총서기관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공식 복구대였다는—”
“아직 아닙니다.”
세르단은 패 가장자리의 세 절개를 가리켰다.
“이건 주조 문양이 아닙니다. 후대에 칼로 눌러 낸 흔적입니다. 중심은 20년 전 16번 통풍구 폐쇄에 사용된 자격패와 같고 가장자리는 훼손됐습니다.”
바렌 수리감이 장부를 펼쳤다.
“당시 자격패는 작업 뒤 회수해야 했습니다.”
“회수되지 않은 패가 있다는 뜻이군.” 카일이 말했다.
“유출 경로는 모릅니다.”
세르단은 금빛 가루와 짧은 칼을 확인했다.
“현재 봉인 작업용 태양재와 배합이 다릅니다. 석회와 측정 줄과 새 봉인판도 없습니다. 이 일행은 현재의 공식 복구대가 아닙니다.”
그는 마렌의 철판에 직접 서명했다.
‘중심 문양과 금속 재질은 옛 공식 자격패와 일치. 세 절개는 후대 훼손. 이번 출입 명령의 공식성은 미확인.’
카일은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된 것과 모르는 것이 함께 남았습니다.”
“당신들은 그 구분을 중요하게 여기는군.”
“그 구분이 없으면 내일은 거짓말이 기록이 됩니다.”
레오나가 포로의 손을 들어 올렸다.
“이 기술도 압니까?”
세르단의 표정이 굳었다.
“침묵 매듭.”
“복구 기술은 아니지.”
“그렇습니다.”
레오나가 포로의 손목을 놓았다.
“나는 무언실에서 배웠다. 위험 인물을 소리 없이 제압하던 조직이다. 열두 해 전 해산됐고 공식 장부에는 다른 이름으로 남았다.”
총서기관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이들이 무언실의 잔당이라는 뜻입니까?”
“아니다. 내가 아는 방식과 같다는 뜻일 뿐이다. 지금 소속과 명령자는 모른다.”
마렌은 그 제한까지 철판에 적었다.
카일은 레오나를 보았다. 그녀는 과거를 고백하면서도 현재의 사실과 모르는 범위를 나누고 있었다.
파멸의 별이 낮게 웃었다.
―저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칼로 숨겼다.
‘그것도 먹지 마.’
세르단의 원본 장부와 바렌이 옮겨 온 황실 시설과 장부가 침상 옆에 놓였다.
16번 항목의 담당자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는 두꺼운 먹으로 덮여 있었다. 그 아래에는 칼로 긁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현장 기록 담당자의 이름이 지워졌습니다.”
마렌이 등불을 기울이자 먹물 아래의 두 줄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세르단이 장부를 닫으려 했지만 카일이 막았다.
“닫지 말고 더 만지지도 마십시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을 따로 기록합니다.”
마렌은 새 철판에 적었다.
‘현장 기록 담당자 이름 확인 불가. 삭제 시점과 담당자 미상.’
앞에 묶인 포로의 시선이 지워진 칸에 고정됐다.
레오나가 먼저 알아챘다.
“저자가 반응했다.”
카일은 포로 앞에 앉았다.
“당신 이름을 말해.”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이름이 중요하다는 걸 안다.”
포로는 입을 다물었다.
카일은 금속패 가장자리의 절개와 지워진 칸을 번갈아 보았다.
“20년 전 기록에서 이름 하나를 가져가려 했나?”
“우리는 마지막 칸을 회수하러 왔다.”
“사람이 아니라 칸을 말하는군.”
포로의 시선이 흔들렸다. 마렌은 그 움직임만 기록했다.
그 순간 점검구 안쪽에서 목소리가 났다.
“마렌.”
검은 선이 마지막 홈을 빠져나와 그녀의 서명을 향해 당겨졌다. 라시안의 숨이 열세 번째에서 다시 갈라졌다.
세르단이 한 발 나섰다.
“지금 닫아야 합니다.”
“그건 해석입니다.”
“이름이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움직였다는 사실과 장치가 이름을 잡는다는 결론은 다릅니다.”
카일은 마렌에게 세 철판을 다시 세웠다.
“네 이름과 위치를 세 번 말해.”
“마렌. 성별교 기록 담당. 동궁 치료실 안에 있습니다.”
그녀는 같은 문장을 세 철판에 적고 서명했다.
검은 선이 마지막 서명에 닿으려는 순간 라시안이 열여섯 번째 숨을 들이켰다.
카일의 손목 흔적이 손가락까지 번질 듯 뛰었다.
―지금이다. 첫 기억을 먹어라.
‘사람의 숨과 기억은 내 것이 아니다.’
카일은 손을 뻗지 않고 빈 철판의 모서리를 선이 닿는 지점에 밀어 넣었다. 흰 재가 갈라지고 금속이 울렸다.
검은 실은 철판에 부딪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설비판으로 돌아갔고 다른 하나는 흰 재 바깥에서 끊겼다.
마렌의 세 서명은 모두 남아 있었다.
“기억은?”
“그대로예요.”
“추가 흡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적어.”
마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시안의 호흡은 이어졌지만 목 아래의 검은 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총서기관이 새 봉인끈을 들고 점검구 앞에 섰다.
“이제 닫아야 합니다. 신전도 공식 파견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닫으면 환자의 동의 조건을 깨게 됩니다.”
카일이 말했다.
“전하의 상태와 장치 반응이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원인을 모른 채 봉인할 수는 없습니다.”
세르단이 장부를 품에 넣었다.
“신전은 이 장치를 회수하겠습니다.”
“그 요구도 세 부 기록에 남기십시오.”
세르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공식 침입을 부정했다고 장치를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황실과 신전과 성별교가 각각 한 부씩 보관합니다. 점검구를 닫을 때도 세 사람이 확인합니다.”
총서기관이 반발했다.
“황실 기밀을 이단에게 맡기자는 겁니까?”
“기밀이라고 부르며 한 사람이 없애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라시안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치료 기록, 지하 장치 기록, 자격패 검증 기록을 각각 세 부로 만든다. 황실 경비와 사제와 성별교 기록 담당자가 함께 서명하라.”
세르단은 잠시 침묵하다 새 철판 앞에 섰다.
“태양신전 봉인감찰 사제 세르단. 현재 침입에 대한 공식 파견 기록 없음. 옛 자격패의 유출 경로와 무언실의 현존 여부는 미상.”
그가 서명했다.
그때 점검구 안쪽에서 금속을 긁는 소리가 났다.
스으윽.
검은 밀랍이 마지막 홈에서 한 줄 더 갈라졌다.
“하렌.”
목소리는 짧았다.
마렌의 펜이 허공에서 멈췄다. 레오나의 손이 검자루를 찾았다.
카일은 포로의 얼굴을 보았다. 굳어 있던 입술이 처음으로 떨렸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지?”
포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르단이 낮게 말했다.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카일은 점검구 앞에 흰 재를 다시 뿌렸다.
“하지만 누군가 그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기록해야 합니다.”
마렌은 철판에 적었다.
‘점검구 내부에서 하렌이라는 이름이 발화됨. 발화자와 하렌의 생사 미상.’
기록이 끝나자 점검구 안쪽에서 손톱이 금속을 긁는 소리가 세 번 이어졌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없었다.
그래서 더 가까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