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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32화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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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거짓 문양의 칼

등불이 꺼진 순간 치료실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커졌다.

라시안의 거친 숨. 바닥을 긁는 발끝. 철판 가장자리가 끌리는 소리.

그리고 칼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카일은 몸을 던지지 않았다. 눈앞은 금빛 가루와 어둠이 뒤섞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칼끝이 오는 방향은 들렸다. 자신을 지나 침상으로 향하는 소리였다.

발끝에 단단한 것이 닿았다.

카일은 남아 있던 철판을 옆으로 밀었다. 철판이 바닥을 긁으며 칼의 진입선에 끼어들었다.

챙!

칼끝이 철판을 비스듬히 때렸다. 동시에 카일은 물그릇을 발로 걷어찼다. 물이 침상 앞에 쏟아지고 공격자의 발이 미끄러졌다.

“전하. 짧게 숨을 이어 가십시오.”

라시안이 대답하지 못했다. 열다섯 번째 숨이 끝난 뒤였다.

검은 선이 침상 아래에서 솟아올랐다. 선은 칼날을 감은 것처럼 잠깐 흔들렸다. 칼의 궤도가 다시 틀어지며 침상 기둥을 스쳤다.

카일은 라시안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지금입니다. 열여섯 번째를 들이마시십시오.”

라시안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그 호흡 사이에서 레오나가 움직였다. 그녀는 바닥에 눌러 둔 첫 공격자의 팔꿈치를 무릎으로 짓누른 채 고개만 돌렸다.

“오른쪽 둘. 하나는 점검구.”

“마렌. 발소리를 세어.”

“셋, 넷. 복도 쪽으로 두 명입니다!”

“도르반. 전하의 호흡만 보십시오. 경비는 문을 막아.”

“이미 늦었습니다. 한 명이 나갔습니다!”

“나간 방향만 확인하십시오. 쫓지 마십시오.”

카일은 숨을 삼켰다. 도망치는 자를 붙잡으면 침상 앞의 칼과 점검구를 놓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순서였다.

라시안의 열여섯 번째 숨이 길게 빠져나왔다.

침상 아래의 검은 선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다만 가슴까지 올라오던 끝이 목 아래에서 멈췄다.

“열여섯 번째 호흡 이어짐. 칼은 침상 기둥과 철판을 차례로 접촉. 검은 선의 움직임은 원인 미확인.”

마렌이 문장을 외쳤다.

“기록을 멈추지 마!”

카일은 바닥에 눌린 공격자의 턱을 보았다. 남자는 입 안쪽을 깨물려 했다.

레오나의 손가락이 그의 턱을 닫았다.

“깨물면 목을 꺾는다.”

“죽이지 마.”

“독을 삼키려는 것 같다.”

“그럼 더더욱 살려.”

카일은 남자의 허리춤에 손을 대지 않았다. 무슨 물건을 숨겼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뒤지는 것은 확인이 아니라 새로운 위험이었다.

복도에서 짧은 비명이 들렸다.

곧 황실 경비가 한 사람의 팔을 비틀어 끌고 왔다. 그자의 왼손에는 금속 고리가 걸려 있었고 손등에는 흰 재가 번져 있었다.

“점검구 쪽에서 붙잡았습니다. 나머지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출입한 인원과 돌아온 인원을 따로 적어.”

카일이 말했다.

복도 끝에서 불씨가 살아났다. 경비가 꺼진 등불에 새 심지를 넣었다.

노란 불빛이 치료실을 조금씩 되찾았다.


두 포로는 침상과 점검구 사이에 세운 철판 밖에 무릎을 꿇었다. 카일은 손을 묶으라고 했지만 얼굴을 바닥에 누르지는 못하게 했다.

“이름을 말하십시오.”

앞의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뒤에 끌려온 자가 대신 대답했다.

“봉인 복구대다. 공식 지시를 받았다.”

“복구 도구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렌 수리감이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렌은 복구대가 놓고 간 자루를 열었다. 안에는 금빛 가루 주머니와 짧은 칼 두 자루 그리고 찢긴 종이 한 장만 들어 있었다.

“석회도 측정 줄도 새 봉인판도 없습니다. 20년 전 폐쇄 공사를 담당한 수리공이라면 셋 중 하나는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마렌은 빈 철판에 적었다.

‘봉인 복구 도구 확인 불가. 금빛 가루 주머니 하나. 칼 두 자루. 찢긴 종이 한 장.’

카일은 포로의 금속패를 공동 확인을 위해 철판 위에 올렸다. 태양신전의 문양은 살아 있었지만 가장자리의 세 절개가 선명했다. 세 홈은 장식보다 잘라 놓은 흔적에 가까웠다.

“이 절개는 무슨 뜻입니까?”

“봉인실의 표식이다.”

“공식 표식입니까?”

남자는 대답 대신 카일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검은 흔적이 손목 안쪽에서 팔꿈치 쪽으로 번져 있었다.

레오나가 포로의 손목을 돌려 보았다. 손가락을 접는 순서가 이상했다. 두 번째 손가락을 먼저 말아 쥔 뒤 엄지를 관절 안쪽에 숨기고 있었다.

레오나의 표정이 굳었다.

“그 손목 꺾기는 복구 기술이 아닙니다.”

카일이 그녀를 보았다.

“무슨 기술이지?”

“사람을 소리 내지 못하게 묶는 제압법입니다. 내가 예전에 배웠던 방식과 같습니다.”

“어디서 배웠어?”

레오나는 잠시 침묵했다.

“태양신전의 비밀 암살조.”

치료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총서기관이 반발하려 했지만 레오나가 먼저 말했다.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같은 방식이다. 현재 소속과 명령자는 모른다.”

마렌은 그 말을 그대로 적었다.

카일은 더 묻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을 지금 캐묻는다면 증언이 아니라 방어가 될 것이다.

“지금은 저들의 손이 먼저다.”

레오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찢긴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아래쪽이 잘려 발신자와 수신자가 보이지 않았다. 남은 문장은 금빛 가루에 절반쯤 덮여 있었다.

‘거짓 별의 손을 끊고 16번의 마지막 칸을 회수하라.’

마렌의 펜촉이 멈췄다.

“읽은 그대로 적을까요?”

“가루를 털지 말고 그 상태로. 명령 전체가 아니라 남은 문장이라고 적어.”

라시안이 침상에서 말했다.

“그의 말을 따르시오.”

총서기관은 종이를 빼앗으려던 손을 거두었다.


카일은 포로 앞에 쪼그려 앉았다. 조금 전 칼을 피하는 동안 허벅지를 철판 모서리에 부딪혔지만 일어설 수는 있었다.

“황태자를 죽이러 왔다면 첫 칼은 침상으로 들어갔어야 합니다.”

포로의 눈이 좁아졌다.

“그러나 첫 칼은 내 심장을 향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점검구로 갔고요.”

“거짓 별의 손을 끊으라는 명령이었다.”

“그럼 누가 거짓말을 했지? 당신들인가. 종이를 쓴 사람인가.”

포로는 라시안이 아니라 찢긴 종이와 설비판을 번갈아 보았다.

“마렌. 저자가 마지막 칸을 볼 때마다 표시해.”

“마지막 홈을 세 번 봤습니다. 종이를 볼 때는 두 번입니다.”

“당신들이 회수하려던 것은 종이가 아니군.”

포로의 입술이 떨렸다.

파멸의 별이 카일의 귓속에서 낮게 웃었다.

―저 공포는 달다. 손가락 하나만 허락해라.

‘사람의 숨은 안 돼.’

―숨이 아니라 의심이다.

‘그것도 안 돼.’

카일은 혀를 깨물었다. 금속 맛이 퍼졌다.

“열여섯 번째까지 세면 아래가 듣는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합니까?”

포로의 호흡이 멎었다.

그 짧은 정지가 대답보다 컸다.

“누가 말했지?”

“봉인실의 서기관이다.”

“이름.”

“모른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종이를 들고 궁에 들어왔군.”

“우리는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다.”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은 대상과 이유를 알아야 살아 돌아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버려진 칼과 같습니다.”

포로가 처음으로 카일을 똑바로 보았다.

“네가 아래의 문을 건드렸다.”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열리지 않아도 들었다.”

“누가?”

포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마지막 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라시안이 기침했다.

목 아래의 검은 선이 한 치 움직였다. 침상 아래에서 가느다란 금속음이 울렸다.

톡.

설비판 마지막 칸의 검은 밀랍에 실금이 생겼다.

도르반이 라시안의 손목을 잡았다.

“맥이 다시 빨라집니다.”

“환자를 먼저 봅니다. 포로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되 점검구를 닫지 마십시오.”

카일은 마지막 칸에 손을 대지 않았다. 검은 흔적이 손목에서 뜨겁게 번졌다.

별이 다시 속삭였다.

―저 균열을 삼키면 아래의 목소리도 조용해진다.

‘조용해지는 것과 끝나는 건 다르다.’

카일은 흰 재 봉투를 마렌에게 건넸다.

“실금의 길이와 발생 시각을 적어. 포로의 말과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만 남겨.”

“인과관계는요?”

“모른다고 적어.”


총서기관은 복도에 선 경비들에게 손짓했다.

“침입자들은 태양신전의 복구대였다고 발표할 겁니다. 그렇게 해야 황궁의 체면을 지킬 수 있습니다.”

“진위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침입자입니다.”

카일이 말했다.

“황태자의 치료실에서 교단이 칼부림을 벌였다는 소문이 퍼지면 책임질 수 있습니까?”

“거짓 표식을 공식 문서로 바꾸는 편이 더 큰 책임을 남깁니다.”

라시안이 피곤한 눈을 떴다.

“태양신전의 공식 대표가 확인할 때까지 누구도 문양을 확정하지 마시오.”

“전하. 신전과의 갈등이 커질 수 있습니다.”

“이미 칼이 들어왔다.”

라시안은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치료 기록과 지하 장치 기록을 따로 봉인하라. 포로 둘의 장비와 찢긴 명령서는 황실 경비와 성별교 기록관이 함께 보관한다. 점검구 주변은 세 사람이 확인할 때까지 닫지 마라.”

총서기관의 시선이 카일에게 향했다.

카일은 도망치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황태자의 명령을 빌려 궁에 남는 순간부터 태양신전과 황실의 갈등 한가운데에 서게 된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나가라. 저들의 이름이 네 목을 조르기 전에.

카일은 손목의 흔적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흰 재를 집어 침상과 점검구 사이에 두 번째 선을 그었다.

“남겠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제가 교주라는 이유로 증거를 가져가지 않겠습니다. 황실도 증거를 혼자 보관하지 마십시오. 세 부로 나누고 각자 서명합니다.”

마렌이 먼저 빈 철판에 서명했다. 바렌과 황실 경비가 뒤를 이었다.

레오나는 포로들의 발목을 다시 묶었다. 장비 목록 아래에는 한 줄을 더 적었다.

‘손목 안쪽으로 엄지를 숨긴 제압법. 과거 자신이 몸담은 비밀 암살조의 방식과 동일하다고 증언함. 현재 소속과 명령자는 미상.’

카일은 그 문장을 읽고도 지우지 않았다.

그때 점검구 안쪽에서 낮은 숨소리가 났다.

라시안의 호흡이 아니었다.

치료실 안의 모든 사람이 멈췄다.

열여섯 홈의 마지막 칸에서 밀랍이 아주 조금 갈라졌다. 안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름을 돌려보내라.”

마렌의 펜 끝이 떨렸다.

“누구의 이름입니까?”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점검구 안쪽에서 금속이 한 번 울렸다.

이번에는 열여섯 번째 뒤가 아니었다.

이름을 적기도 전에 누군가 아래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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