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31화: 태양신전의 분노
침상 아래에서 울린 금속음이 복도 끝까지 번졌다.
라시안의 열여섯 번째 숨은 끊기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위에 얹힌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렸다.
“열여섯 번째 호흡 뒤 금속음 한 번. 위치는 침상 아래.”
마렌이 빈 철판에 적었다.
총서기관이 손짓하자 황실 경비 두 명이 치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끝났습니다. 전하를 동쪽 격리실로 옮기고 점검구는 황실 인장으로 봉인하겠습니다.”
“어디가 안전한지 확인했습니까?”
“궁 안에 위험한 통로는 없습니다.”
“그건 확인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카일은 침상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라시안의 목 아래에 남은 검은 선은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숨이 열세 번째에 가까워질 때마다 선 끝이 침상 아래로 당겼다.
“전하. 방을 옮기면 바닥도 바뀝니다. 이동에 동의하십니까?”
라시안은 숨을 고른 뒤 고개를 저었다.
“옮기지 마라. 아래를 확인하되 내 호흡을 먼저 보시오.”
“그 명령을 기록해도 됩니까?”
“기록하라.”
마렌은 동의 시각과 증인의 이름을 적었다. 카일은 침상 다리 옆에 물그릇을 놓고 점검구 앞에는 빈 철판을 세웠다. 두 물건 사이에는 흰 재를 얇게 뿌렸다.
“사람은 선 안쪽으로 들어오지 마십시오. 들어오는 사람은 이름과 손에 든 물건부터 말합니다.”
레오나가 문을 막았다.
“말하지 않으면?”
“나가게 해.”
카일은 열세 번째 호흡을 기다렸다.
라시안의 숨이 짧아지는 순간 물그릇의 수면이 침상 아래로 기울었다. 금속음은 들리지 않았다. 열여섯 번째 숨이 끝났을 때 침상 아래에서 낮은 마찰음이 났다.
이번에는 톡 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바닥을 긁고 복도 쪽으로 끌려간 소리였다.
마렌이 고개를 들었다.
“소리가 이동했습니다.”
“방향만 적어.”
카일은 침상 아래를 볼 수 없었다. 검은 선은 바닥 틈에서 복도 문 쪽으로 가늘게 뻗어 있었다. 그 끝이 무엇을 따라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침상 아래 현상과 복도 봉인끈의 움직임이 같은 시각에 겹쳤다. 카일은 둘 사이에 선을 긋지 않았다. 동시에 일어난 일은 연결된 일과 달랐다.
그때 복도 바깥의 봉인끈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레오나의 손이 검자루 위에 올라갔다.
“누가 건드렸다.”
“문을 열지 마.”
카일은 손을 들어 경비를 멈췄다.
잠시 뒤 밖에서 낮고 정돈된 목소리가 들렸다.
“태양신전의 봉인 복구대입니다. 지하 장치의 재봉인을 위해 들어가야 합니다.”
총서기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협조가 오는군.”
카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입안을 깨물었다.
복구대는 모두 여섯 명이었다.
앞에 선 남자가 태양신전의 문양이 찍힌 금속패를 내밀었다. 가장자리에는 아주 작은 절개가 세 군데 나 있었다. 카일은 갈고리 골짜기 수레 아래에서 본 홈을 떠올렸지만 같은 제작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름과 역할을 말하십시오.”
남자가 눈썹을 찌푸렸다.
“황실이 요청한 복구 작업이다. 신분을 따질 시간이 없다.”
“기록할 시간이 없다면 들어올 시간도 없습니다.”
마렌이 철판을 들었다.
“이름. 역할. 소지품. 출입 시각을 차례로 말해 주십시오.”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일행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한 명은 이름 대신 ‘제삼 봉인 담당’이라고만 대답했다.
카일은 그 사람의 소매와 허리춤을 보았다. 봉인 복구에 필요한 석회통도 측정 줄도 없었다. 손은 짧은 외투 안에 들어가 있었고 손목 바깥으로 단단한 굳은살이 보였다.
레오나의 시선도 그 손에 머물렀다.
“도구는?”
“안에서 받는다.”
“누구에게?”
레오나가 묻자 남자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황실 수리감에게.”
바렌은 복도 끝에 서 있었다. 그는 복구대를 본 적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총서기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태양신전의 협조를 거부할 셈입니까? 점검구를 방치하면 황실 전체가 위험해집니다.”
“협조를 거부하는 게 아닙니다. 환자의 동의와 기록 절차를 지키는 겁니다.”
“전하의 병이 악화되면 누가 책임집니까? 황실은 이미 교단의 치료가 성공했다고 발표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제 점검구에서 또 문제가 생기면 외부에는 교단이 궁을 어지럽힌 것으로 보일 겁니다.”
총서기관의 말은 협박에 가까웠다. 태양신전의 협조를 막으면 황실은 카일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릴 수 있었다. 카일은 그 계산을 알아들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책임을 피하려고 기록을 지우면 실패가 아니라 은폐가 됩니다.”
카일은 복구대 앞에 철판을 세웠다.
“한 명씩 들어오십시오. 환자와 설비판은 따로 확인합니다. 침상에 손대지 마십시오.”
남자는 태양신전의 문양을 다시 들어 보였다.
“전하의 상태를 안정시키려면 정화용 태양재를 써야 합니다.”
“환자 동의가 필요합니다.”
“전하는 지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라시안이 눈을 떴다.
“나는 판단할 수 있다.”
복구대의 시선이 침상으로 모였다. 한 사람의 눈이 라시안이 아니라 카일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검은 흔적이 번진 손목이었다.
카일은 웃지 않았다.
“태양재를 보여 주십시오.”
남자가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안에서 금빛 가루가 보였다.
“성분과 사용량을 기록하겠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럼 쓰지 마십시오.”
복구대의 가장 뒤에 있던 여자가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손등에 칼을 오래 쥔 사람에게만 생기는 굳은 선이 도드라졌다.
레오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일은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지금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상대에게 알려 주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었다.
“전하의 호흡을 다시 세겠습니다. 모두 움직이지 마십시오.”
“하나.”
라시안이 숨을 들이마셨다.
복구대는 조용히 서 있었다.
“둘.”
마렌의 철판 위에서 펜이 움직였다.
“셋.”
바닥 아래에서 금속이 울렸다.
복구대의 맨 뒤에 있던 여자가 아주 작게 몸을 틀었다. 카일은 그녀의 발뒤꿈치가 흰 재를 지우는 모습을 보았다.
“열셋.”
라시안의 숨이 갈라졌다.
복구대의 앞에 선 남자가 주머니를 열었다. 금빛 가루가 바닥에 흩어졌다.
시야가 노랗게 번졌다.
“전하!”
도르반이 침상으로 달려갔다.
카일은 본능적으로 몸을 낮췄다. 눈앞에서 은빛이 번쩍였다. 칼끝은 심장을 노리고 들어왔다.
그 순간 레오나의 검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챙!
짧은 칼이 튕겨 나가 침상 기둥을 스쳤다. 레오나는 공격자의 손목을 비틀어 바닥에 눌렀다.
“경비! 환자를 둘러싸!”
황실 경비가 움직이려는 순간 복구대의 다른 두 사람이 동시에 뛰었다. 하나는 점검구 쪽으로 향했고 하나는 카일의 철판을 걷어찼다.
철판이 넘어지며 바닥에 부딪혔다.
라시안의 숨이 열넷에서 흔들렸다. 침상 아래 검은 선이 꿈틀거리며 칼끝이 튕겨 나간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파멸의 별이 카일의 혀 밑에서 웃었다.
―저들의 공포를 삼켜라. 그러면 모두 멈춘다.
‘사람의 숨은 먹지 않는다.’
―숨이 아니라 절망이다.
‘그것도 내 허락 없이는 안 돼.’
카일은 금빛 가루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지만 물그릇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침상 아래의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점검구로 간 자가 고리를 당긴 모양이었다.
권능을 쓰면 눈앞의 공포를 잘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침상 아래의 검은 선까지 자극할 가능성이 있었다. 라시안의 호흡과 점검구의 반응이 맞물린 지금 사람의 공포를 먹이는 것은 치료가 아니라 새로운 변수를 만드는 일이었다.
“마렌! 점검구 쪽 사람부터 적어!”
“얼굴이 안 보입니다!”
“발과 손을 적어!”
마렌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철판을 붙잡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검은 장화 한 켤레. 왼손에 금속 고리. 복구대 표식 없음!”
카일은 복구대의 공격자가 황태자를 찌를 수 있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칼끝은 침상보다 자신에게 먼저 들어왔다. 목표는 환자가 아니었다.
“이건 치료가 아닙니다.”
카일은 일부러 복도까지 들리도록 말했다.
“황태자를 죽일 수 있었는데 나를 먼저 찔렀습니다. 이들은 환자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 나를 죽이러 왔습니다.”
총서기관의 얼굴이 굳었다.
바닥에 눌린 공격자가 이빨 사이로 웃었다.
“거짓 별은 꺼져야 한다.”
레오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가 보냈지?”
공격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점검구 쪽에서 금속이 크게 끌렸다.
레오나는 바닥에 눌린 자의 목덜미를 팔꿈치로 눌렀다.
“카일. 이자를 묶겠다.”
“죽이지 마.”
“저쪽이 증거를 없애고 있다.”
“그럼 네가 둘 다 쫓을 수 있나?”
레오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점검구 쪽의 그림자가 흰 재 선을 넘어갔다. 검은 선은 그 그림자의 발끝과 침상 다리 사이에서 흔들렸다.
카일은 마렌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기억해. 문양 가장자리의 절개도. 손잡이 모양도.”
“기록할게요.”
“내가 쓰러져도.”
마렌의 펜이 멈췄다.
“그런 말은 기록하지 마세요.”
“기록해야 다음 사람이 같은 실수를 안 해.”
카일은 복도 쪽으로 움직이는 그림자를 보았다. 레오나가 쫓아가면 점검구를 만지는 자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바닥에 눌린 포로가 입안의 무언가를 깨물거나 황태자가 다시 열세 번째 숨에서 멎을 수도 있었다.
도망칠 기회라면 이미 있었다. 카일은 궁을 빠져나가는 길과 황실의 체면을 무너뜨릴 말 몇 가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등을 돌리면 라시안의 숨과 남은 기록이 동시에 사라질 수 있었다.
라시안이 침상에서 힘겹게 말했다.
“나를 옮기지 마라.”
카일이 돌아보았다.
“전하.”
“기록을 지켜라. 아래를 쫓느라 내 상태를 놓치지 마시오.”
라시안은 열다섯 번째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복도 끝에 있던 자가 몸을 돌렸다. 손에는 짧은 칼이 들려 있었다.
칼끝이 카일을 향했다.
한 박자 뒤 칼의 궤도가 바뀌었다.
침상으로 향하는 선이었다.
침상 아래의 검은 선이 칼날과 겹쳤다. 라시안의 열여섯 번째 숨이 들어오려는 순간이었다.
카일은 몸을 던질지 침상을 움직일지 판단할 수 없었다. 파멸의 별은 굶주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번에는 하나를 골라라.
레오나가 아직 첫 번째 공격자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카일과 라시안 사이로 칼끝이 파고들었다.
그 순간 치료실의 등불이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