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29화: 궁 아래의 빈방
바닥 아래에서 짧은 기침이 다시 올라왔다.
라시안의 호흡은 열세 번째에서 끊길 듯 흔들렸다. 마렌의 펜 끝이 철판 위에서 멈췄다.
“기침 시각. 오전 여섯 시 삼십칠 분. 발화자 미확인.”
총서기관이 얼굴을 굳혔다.
“황태자 전하를 동쪽 격리실로 옮기겠습니다. 이 방은 봉쇄합니다.”
“지금 옮기면 안 됩니다.”
카일은 라시안의 손목에 남은 검은 선을 바라보았다. 선은 쇄골 아래에서 멈췄지만 침상 아래로 향한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른 방의 바닥이 안전하다는 확인이 있습니까?”
도르반이 환자의 맥을 짚었다.
“전하의 호흡이 불안정합니다. 이곳에 계속 두는 것도 위험합니다.”
“그럼 환자에게 먼저 묻죠.”
라시안이 눈을 떴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옮기지 마라.”
총서기관이 고개를 숙였다.
“전하. 안전을 위한 조치입니다.”
“그 기침은 내가 궁에 온 뒤 생긴 게 아니다.”
라시안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밤마다 들었다. 종이 울린 다음에는 꼭 들렸다.”
카일은 침상 옆으로 의자를 끌어당겼다.
“소리와 상태를 확인해도 됩니까? 중단과 이동은 전하가 결정합니다.”
“기록하시오.”
마렌의 펜이 움직였다.
“황태자 라시안. 현재 위치 유지와 소리 확인에 동의. 상태 악화 시 조사 중단.”
총서기관이 항의하려 했지만 레오나가 문 앞을 막았다.
“명령을 내리기 전에 이름부터 말해라. 누가 무엇을 했는지 남겨야 한다.”
카일은 바닥의 물그릇을 당겼다. 수면은 일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라시안의 숨이 열세 번째에서 막힐 때마다 떨림이 두 번 이어졌다. 그 뒤 바닥 아래에서 기침이 올라왔다.
그는 빈 철판을 소리가 난 곳 가까이 옮겼다.
검은 선이 철판 쪽으로 휘었다. 물그릇의 수면도 같은 방향으로 기울었다.
“오전 여섯 시 사십 분. 철판 한 뼘 이동. 검은 선과 수면이 동쪽으로 기움.”
“소리가 따라온 겁니까?”
“그건 모른다. 방향만 적어.”
카일은 바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세 번째 소리가 나기 전에는 뜯지 않겠습니다. 확인할 수 있는 만큼만 확인합니다.”
총서기관은 궁정 수리감과 오래된 도면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수리감 바렌은 치료실 문턱에서 도면을 펼쳤다.
“동궁에는 지하 통로가 없습니다. 이건 폐기된 초안입니다.”
마렌이 도면의 치수를 복도와 대조했다.
“현재 벽 길이와 맞습니다. 치료실 바닥 중심에서 수직으로 내려가는 선도 있습니다.”
카일은 종이 한쪽의 글자를 읽었다.
‘16번 통풍 점검구.’
표기 주변은 검은 먹으로 번져 있었고 아래쪽은 잘려 나가 있었다.
“마지막 확인 날짜는요?”
“스무 해 전입니다. 폐쇄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누가 폐쇄했습니까?”
“그 부분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바렌은 낡은 장부를 펼쳤다.
“벽돌과 석회로 막고 금속판을 덧댔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닥 아래에서 숨소리가 들립니다.”
“오래된 관이 깨졌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기침일 수도 있고요.”
바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총서기관이 도면의 잘린 가장자리를 덮었다.
“그 표기는 오래된 공사 번호일 뿐입니다. 열여섯 잔 문서와 엮을 이유가 없습니다.”
“엮지 않았습니다. 같은 종이에 다른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적었을 뿐입니다.”
카일은 마렌에게 도면의 앞뒷면과 전달자의 이름을 모두 남기게 했다. 총서기관은 원본을 회수하겠다고 다시 말했지만 이번에는 도면을 빼앗지 못했다. 라시안의 인장이 찍힌 치료 기록이 이미 그 종이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카일은 치료실 맞은편 벽장을 열었다. 낡은 걸레와 빈 기름통 아래에 복도와 색이 다른 타일이 보였다.
물그릇을 벽장 앞에 놓자 수면이 그 아래로 기울었다.
마렌은 흰 재로 벽장 주변에 선을 그었다.
“누가 들어갔는지 구분하는 표식입니다. 밟히면 사라져도 밟은 사람은 남습니다.”
벽장을 옮기는 사람들의 이름을 먼저 적었다. 바렌과 시종 둘이 양쪽을 잡고 레오나는 뒤를 살폈다.
벽장이 한 뼘 움직이자 낮은 금속음이 울렸다.
톡.
라시안의 호흡이 열세 번째에서 끊겼다. 검은 선은 철판을 지나 벽장 아래로 기울었다.
“벽장 이동 직후 금속음 한 번. 환자의 열세 번째 호흡 중단. 선의 방향 변화.”
바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아래를 열면 안 됩니다. 압력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열어 본 적은 없군요.”
“열지 않았으니 모릅니다.”
카일은 그 대답을 기록하게 했다. 모른다는 말은 숨김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모르는 사람만큼 빠르게 겁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전하. 타일 하나만 들어내 점검구를 확인하겠습니다. 상태가 나빠지면 즉시 멈춥니다.”
라시안은 숨을 골랐다.
“확인하라.”
마렌이 동의 조건을 적었다.
도르반은 라시안의 열세 번째 호흡 뒤 열네 번째가 돌아오는 것을 세 번 확인했다. 카일은 성수를 요구하지 않았고 태양신성도 사용하지 않았다. 문서 사본만 빈 철판 위에 올렸다.
총서기관이 경비에게 손짓했다.
“환자를 옮기고 점검구는 황실 인장으로 봉인하라.”
레오나가 경비의 팔을 막았다.
“환자 동의 아래 조사 중이다.”
“황실 명령이 우선이다.”
“그럼 명령한 사람의 이름부터 적어.”
경비가 멈춘 사이 카일은 철판을 표시한 타일 위로 조금 밀었다.
낮은 종이 울렸다.
이번에는 벽장 아래에서 금속 추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라시안의 목 아래 검은 선이 꿈틀거렸고 문서의 얼룩이 타일 가장자리로 흘렀다.
“전하. 숨을 셀 수 있습니까?”
“하나…… 둘…….”
열두 번째 숨 뒤 카일은 타일 아래를 느꼈다. 문서와 타일의 틈을 검은 실 하나가 꿰고 있었다.
파멸의 별이 혀 밑에서 속삭였다.
―뜯어라. 안쪽의 공포가 네 손에 닿았다.
‘사람의 숨과 기억은 건드리지 않는다.’
카일은 손바닥을 문서와 타일 사이에 넣었다. 검은 선이 손등을 감싸고 손목 안쪽의 흔적이 뜨겁게 번졌다.
“한 번만 한다.”
그는 연결 전체가 아니라 문서와 타일 사이의 검은 매듭 하나만 잡았다.
손바닥 안쪽에서 이빨이 맞물렸다. 매듭이 잿빛으로 굳으며 부서졌고 타일 밑에서 금속 고리가 튀어나왔다.
라시안의 열세 번째 숨이 돌아왔다. 열네 번째와 열다섯 번째도 이어졌다.
카일이 손을 빼자 검은 흔적이 손목에서 팔꿈치 쪽으로 올라와 있었다.
레오나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더 하지 마라.”
“연결 하나만 끊었어.”
“네 몸에 남은 건 하나의 색이 아니다.”
바렌이 금속 고리를 살폈다.
“점검구 손잡이입니다. 석회로 막혀 있어야 합니다.”
고리 주변의 먼지는 최근에 긁힌 듯 벗겨져 있었다. 타일 틈에는 검은 밀랍 조각 하나가 끼어 있었고 녹슨 끝에는 천 조각 한 가닥이 걸려 있었다.
카일은 손대지 않았다.
“밀랍과 천을 따로 봉인해. 수량과 위치도 적어.”
“천의 주인은 확인하지 않습니까?”
“확인할 때까지 주인을 만들지 마.”
점검구 안쪽에서 금속이 한 번 울렸다.
톡.
기침이 바닥 아래에서 두 번 이어졌다.
총서기관은 점검구를 닫고 모든 기록을 황실 기밀로 봉인하라고 명령했다.
카일은 라시안의 인장을 가리켰다.
“환자 기록은 세 부로 남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발견 시각과 참여자와 물품도 같은 방식으로 나누십시오.”
라시안이 침상에서 손을 들었다.
“그대로 하라.”
마렌은 철판 세 장에 점검구 위치와 밀랍 한 조각과 이름 없는 천 한 가닥을 나누어 적었다. 마지막 철판에는 제한 흡수 시각과 카일의 손목 흔적을 남겼다.
점검구의 고리를 바렌과 시종이 천천히 당겼다. 석회가 갈라지며 타일 아래에 몸을 굽혀야 들어갈 만한 얕은 공간이 드러났다.
낮은 종이 공간 안쪽에 매달려 있었다. 검은 밀랍으로 묶인 추가 바닥 아래로 이어졌다. 벽면에는 손으로 긁은 자국이 여러 줄 남아 있었다.
공간의 먼지는 오래된 층과 새로 벗겨진 층이 갈라져 있었다. 종 아래에는 마른 흙이 아니라 젖은 얼룩이 남아 있었고 그 얼룩은 벽 쪽으로 이어졌다. 누군가 최근에 이곳을 열었는지 단정할 수는 없었지만 스무 해 동안 그대로였다는 말과도 맞지 않았다.
레오나가 검을 들었다.
“내려가 확인하겠다.”
“아직 안 돼.”
카일은 열린 틈과 라시안을 번갈아 보았다.
“아래의 소리보다 위의 호흡을 먼저 지켜야 해. 혼자 내려가면 둘 다 잃을 수 있다.”
그때 어둠 속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열셋.”
목소리는 사람의 말처럼 들렸지만 벽을 거친 모방일 수도 있었다.
종이 한 번 울렸다.
톡.
라시안의 호흡이 흔들렸다.
“누구입니까?”
레오나가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라시안이 힘겹게 말했다.
“아래가 열여섯을 기다리고 있다.”
점검구 안쪽에서 낮은 숨이 이어졌다.
“열여섯 번째를…… 돌려보내라.”
총서기관이 경비에게 손짓했다.
“복도를 봉쇄하라.”
레오나가 검을 뽑았다.
“문을 넘는 순간 손을 베겠다.”
카일은 침상 옆에서 라시안의 호흡을 세었다. 열네 번째가 돌아왔고 열다섯 번째도 이어졌다.
열여섯 번째 숨을 기다리는 동안 점검구의 종은 울리지 않았다.
파멸의 별이 목 안쪽에서 굶주린 웃음을 흘렸다.
―아래의 공포가 너를 부른다.
‘부르는지 흉내 내는지 아직 모른다.’
카일은 검은 흔적이 번진 손목을 움켜쥐었다.
황태자의 숨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점검구 아래의 목소리는 열여섯 번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황실의 경비는 카일이 어느 쪽으로 움직일지도 기록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