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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28화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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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황태자의 검은 숨

동궁 외문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붉은 등불 아래에서 기다리던 내관이 레오나의 검과 마렌의 철판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기록 도구는 밖에 두십시오.”

“환자의 방에 들어가기 전부터 기록을 지우라는 뜻입니까?”

“황실의 병은 국가 기밀입니다.”

“병명도 모르는 지금은 기밀이 아니라 미확인입니다.”

카일은 붉은 밀랍이 찍힌 서신을 내관에게 내밀었다.

“성수도 없고 병명도 없습니다. 무엇을 치료할지 모른 채 약속부터 하지는 않겠습니다.”

내관이 레오나를 가리켰다.

“호위기사는 문밖에서 기다리면 됩니다.”

레오나가 검자루를 눌렀다.

“교주님이 들어가는 곳이라면 나도 간다.”

카일이 손을 들었다.

“검은 뽑지 않습니다. 마렌은 출입 시각과 동행 인원만 적습니다. 환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기록이 남아야 합니다.”

뒤에 있던 궁정 의관이 혀를 찼다.

“환자는 의식이 없습니다. 동의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럼 지금 할 수 있는 건 관찰뿐입니다.”

“살려 달라고 불렀더니 관찰만 하겠다는 겁니까?”

“병을 모른 채 낫게 하겠다고 말하는 쪽이 더 위험합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렌의 펜 끝이 철판에 닿았다.

“새벽 네 시 열두 분. 동궁 외문 도착. 카일과 레오나와 마렌 세 명. 성수 0잔.”

내관의 얼굴이 굳었다.

“없는 것도 적습니까?”

“없는 것도 물건의 상태입니다.”

궁정 의관이 문을 열었다.

“내 이름은 도르반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카일은 문지방을 넘기 전 등불의 심지를 보았다. 불꽃이 안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창을 닫은 방의 공기가 한쪽으로만 움직이고 있었다.


동궁 안쪽 치료실에는 타 버린 약초 냄새가 배어 있었다.

침상 위의 남자는 스무 살 안팎이었다. 입술은 말라 있었고 목 아래에 검푸른 선이 세 갈래로 퍼졌다. 손목 안쪽에도 같은 흔적이 보였다.

도르반이 말했다.

“사흘 전부터 고열이 시작됐습니다. 태양신전의 축복을 두 번 받았고 궁정 약물을 네 차례 투약했습니다. 열은 내려갔다가 다시 오릅니다.”

“기침과 기억 공백은요?”

“그런 증상은 보고받지 못했습니다.”

“보고받지 못한 것과 없었던 건 다릅니다. 창을 여십시오.”

레오나가 걸쇠를 풀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들어왔다. 남자의 눈꺼풀이 떨렸다.

“누구냐.”

쉰 목소리가 침상에서 나왔다.

도르반이 고개를 숙였다.

“전하.”

카일은 침상 옆 의자를 당겼다.

“이름을 말할 수 있습니까?”

“라시안.”

“지금 있는 곳은요?”

“동궁의 치료실.”

라시안의 시선이 일행을 훑었다.

“내가 죽었나?”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낫는다고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도르반이 발끈했지만 라시안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사람에게 말하게 두시오.”

카일은 마렌에게 철판을 내밀었다.

“전하의 말을 기록해도 됩니까? 처치와 실패를 함께 남깁니다. 원하시면 중단시킬 수 있습니다.”

“실패도 남긴다고?”

“실패가 지워지면 다음 처치가 같은 곳에서 넘어집니다.”

“그 조건으로 하시오.”

마렌이 라시안의 동의와 시각을 적었다. 카일은 호흡을 셌다. 여덟 번 숨을 내쉴 때마다 목의 검은 선이 꿈틀거렸고 열여섯 번째 숨 뒤에는 손목의 선이 올라왔다.

그는 물그릇 옆에 작은 거울을 세웠다. 창으로 들어온 빛이 물 표면을 지나 침상 아래를 비췄다. 침상 밑은 비어 있었지만 은쟁반의 약병 하나에서 검은 실이 뻗어 바닥 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 약은 언제 가져왔습니까?”

“어젯밤입니다. 서고를 거친 황실 처방입니다.”

“황태자에게 투약했습니까?”

“한 번.”

도르반은 그 뒤 검은 선이 늘었는지 대답하지 못했다.

라시안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서고에서 보고서를 봤다.”

“어떤 보고서입니까?”

“갈고리 골짜기의 성수에 관한 문서였다. 기존 다섯 잔과 새로 만든 열한 잔을 합쳐 열여섯 잔이라고 적혀 있었다.”

마렌의 펜이 멈췄다.

“인장을 찍으려 했다. 그때 아래에서 종이 울렸다.”

“몇 번입니까?”

“한 번. 아주 낮게. 그 뒤로 숨이 막혔다.”

카일은 약병과 침상과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다만 확인할 이유는 충분했다.


궁정 서기관이 문을 두드린 건 라시안의 호흡이 잠시 고르게 된 직후였다.

“전하께서 보셨다는 보고서 사본을 가져왔습니다.”

문서철 맨 위에는 황실 보호령의 사본이 놓였고 그 아래에 재고 보고서가 끼워져 있었다.

카일은 문서철을 마렌에게 먼저 보냈다.

“받은 시각과 전달자를 적으세요.”

“지금 그런 절차가 중요합니까?”

“무엇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면 나중에 병과 문서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마렌이 봉인을 확인했다. 끈은 끊긴 흔적이 없었다.

카일은 맨 위 장을 펼쳤다.

‘성수 열여섯 잔. 황실 보호 자산.’

문장 아래에 검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얼룩은 은쟁반의 약병에서 뻗은 실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 순간 궁 안쪽에서 낮은 종이 울렸다.

라시안의 등이 활처럼 휘었다.

“전하!”

도르반이 손을 들었다.

“태양의 빛을 부르겠습니다.”

“잠깐.”

카일이 그의 팔을 막았지만 도르반의 손바닥에서 황금빛이 피어났다. 빛이 라시안의 목을 덮자 검은 선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열여섯 번째 숨에서 선이 가슴 쪽으로 길게 뻗었다.

라시안이 헛숨을 삼켰다.

“빛이 누르는 동안 안쪽으로 밀립니다. 다시 비추지 마십시오.”

카일은 레오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사람을 물리세요. 허락 없는 약병은 아무도 들지 못하게.”

레오나는 시종 둘을 문 쪽으로 밀어냈다.

“손을 뻗으면 손목을 꺾겠다.”

마렌은 종이 울린 시각과 라시안의 몸이 휘어진 시각을 나눠 적었다.

검은 얼룩이 종이 가장자리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느다란 선이 라시안의 목과 문서 사이를 이었다.

카일은 손을 폈다.

“사람의 숨은 먹지 않는다. 기억도 먹지 않는다.”

혀 밑에서 파멸의 별이 낮게 웃었다.

―그래도 남은 것은 배고프다.

‘남은 것만 삼킨다.’

―왕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공포는 달다.

‘내 허락 없이 닿지 마.’

카일은 라시안의 손목과 문서 사이에 손을 넣었다. 검은 선이 손등을 감았다. 안쪽에서 무언가 이빨을 세우는 감각이 올라왔다.

“전하. 열여섯까지 숨을 셀 수 있습니까?”

“하나…… 둘…….”

라시안의 숨이 열세에서 끊겼다. 카일은 검은 선을 당겼다.

검은 가닥 하나가 종이에서 떨어져 손바닥으로 흘러들었다. 닫힌 입 문양이 뜨거워졌다. 카일은 얼룩을 전부 삼키지 않고 라시안의 목에 붙은 연결만 잘라 냈다.

검은 선 일부가 잿빛으로 말랐다. 동시에 카일의 턱 아래 흔적이 쇄골 쪽으로 번졌고 입안의 낯선 이빨이 한 번 맞물렸다.

“카일!”

“계속 기록해.”

라시안의 열세 번째 숨이 돌아왔다. 열네 번째와 열다섯 번째가 이어졌다. 열여섯 번째 숨 뒤에도 검은 선은 가슴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도르반이 맥을 짚었다.

“호흡이 규칙적입니다.”

“안정됐다고 적으세요. 나았다고 쓰지 마십시오.”

마렌의 펜이 종이를 눌렀다.


해가 동궁 지붕을 비출 무렵 황실 총서기관이 치료실로 들어왔다.

“황태자 전하의 상태가 호전됐다는 발표문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카일의 철판을 보지도 않고 문서를 펼쳤다.

“황실의 처치가 성공했고 전하께서 위기를 넘겼다고 발표할 겁니다.”

카일은 라시안의 얼굴을 보았다. 황태자는 깨어 있었지만 말할 때마다 숨을 골랐다.

“호전은 맞습니다. 위기를 넘겼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황실은 불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환자에게 불안을 숨긴 대가를 다음 처치가 치르게 됩니다.”

“교주께서는 황실의 체면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저는 체면에 약을 먹이지 않습니다.”

카일은 마렌에게 철판을 가져오게 했다.

“라시안 전하의 동의. 태양신성 처치 뒤 검은 선의 이동. 문서와 몸 사이의 연결 일부를 끊은 뒤 호흡 안정. 성수 0잔. 완치와 원인은 확인되지 않음.”

총서기관이 손을 뻗었다.

“그 문장은 황실 문서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라시안이 침상에서 손을 들었다.

“들어가야 한다.”

황태자는 힘겹게 작은 인장을 눌렀다.

“세 부로 나누어 보관하라. 하나는 내 방에 두고 하나는 의관에게 주고 하나는 교주에게 보내라.”

총서기관은 문서철을 거두지 못한 채 물러났다.

카일은 검은 얼룩이 남은 사본을 빈 철판 옆에 놓았다. 선은 더 이상 라시안의 침상으로 뻗지 않았다. 대신 철판 아래에서 바닥 쪽으로 가늘게 내려갔다.

“마렌. 문서가 움직인 방향을 적어.”

“바닥 아래로 향한 것으로 보임. 구조와 목적은 확인되지 않음.”

그때 발밑에서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톡.

잠시 뒤 한 번 더 울렸다.

톡.

레오나가 검을 뽑으려 하자 카일이 손을 들었다.

“아직 아무도 지하에 있다고 쓰지 마.”

“소리는 들었다.”

“소리가 났다는 사실과 누가 냈는지는 다르다.”

카일은 빈 철판을 바닥 위에서 한 뼘 옮겼다. 검은 선이 흔들렸지만 완전히 따라오지는 않았다.

도르반이 문 가까이 다가갔다.

“전하의 방 아래에는 지하 통로가 없습니다.”

“확인했습니까?”

도르반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순간 바닥 아래에서 짧은 기침이 들렸다.

라시안이 눈을 떴다.

“저 소리는…… 사흘 전부터 들었다.”

카일의 목 안쪽에서 파멸의 별이 웃었다.

―이번에는 왕의 숨보다 아래가 더 굶주렸구나.

카일은 금속음이 난 바닥과 검은 얼룩이 남은 문서를 번갈아 보았다.

황태자의 숨은 잠시 고르게 됐다.

하지만 궁은 아직 아무것도 낫지 않았다.

이제 카일은 황실의 환자를 살린 대가로 그 아래에서 기침하는 것이 누구인지 확인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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