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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27화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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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귀족들의 잔치

귀족 회관의 문은 금빛으로 번들거렸다.

카일은 높은 칼라로 턱 아래를 가린 채 문 앞에 섰다. 황도 관문을 통과한 뒤에도 남아 있던 검은 흔적이 목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검은 맡기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회관의 집사가 레오나를 보며 말했다.

레오나는 검자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맡길 수 없다.”

“귀족 회관의 손님에게 필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신뢰가 필요하면 네가 먼저 무기를 내려놔라.”

집사의 얼굴이 굳었다. 카일은 레오나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검은 문서 상자를 지키기 위해 필요합니다. 상자 안에는 성수가 없습니다.”

마렌이 철제 상자의 잠금장치를 열었다. 안에는 성지 운영 문서 사본과 빈 철판 세 장만 들어 있었다.

집사는 안을 확인하고도 물러나지 않았다.

“성수는 다른 곳에 보관 중입니까?”

“이 일행은 성수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황도 관문 기록에도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 기록을 믿으십니까?”

“믿는 게 아니라 확인할 뿐입니다.”

카일은 상자를 닫았다.

문이 열리자 향신료와 달콤한 술 냄새가 한꺼번에 덮쳐 왔다.

연회장 중앙에는 금으로 도금한 받침대와 빈 유리병 열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병마다 은판이 달려 있었다.

성별교 성수. 황실 보호 자산.

“교주님을 위한 환영의 상징입니다.”

연회 주재 귀족이 다가왔다. 둥근 배 위로 붉은 비단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고 손가락마다 보석이 박혀 있었다.

“황실이 곧 인수할 성수 열여섯 잔을 소개하는 자리이지요.”

“빈 병을 소개합니까?”

귀족의 미소가 잠깐 흔들렸다.

“실물은 안전한 보관소에 있습니다. 중요한 건 제국의 귀한 손님들이 성별교의 기적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카일은 받침대 옆 장부를 훑었다. 병 번호는 하나부터 열여섯까지였지만 재고의 출처와 제조 시점은 없었다.

“확인할 기적이 없습니다. 이곳에는 성수가 없으니까요.”

음악이 멈췄다.

한쪽 식탁에는 고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포도주는 절반도 마시지 않은 채 버려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기침하는 하인 하나가 지나갔다. 하인이 접시를 내려놓다 비틀거리자 주인은 다른 하인을 불러 그를 끌어냈다.

“잔치 분위기를 망치지 마시오.”

주재 귀족이 낮게 말했다.

카일은 빈 병과 사라진 하인을 번갈아 보았다.

이들은 사람을 낫게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자신들의 식탁 위에 기적을 올려 두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방에서 가장 비싼 물건은 성수가 아니었다.

체면이었다.


식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금박 문서가 식탁 위에 놓였다.

“성지 운영 및 성수 관리 위임 계약서입니다.”

주재 귀족이 첫 장을 펼쳤다.

“귀족 관리위원회가 성수의 보관과 검사를 맡습니다. 황도에서 검증된 성수는 귀족과 황실에 우선 배급하고 남은 물량을 민간에 판매합니다. 성지 운영비도 우리가 부담하지요.”

마렌이 문서의 조항을 훑었다.

“성지의 물자와 사람은 주민 대표와 기록 담당자의 확인 없이 징발할 수 없습니다. 황실 보호령에 적힌 내용입니다.”

“보호령은 황실의 명령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옆자리 귀족이 포도주를 흔들었다.

“성수 열여섯 잔은 이미 황실 자산으로 정리됐습니다. 우리는 보관을 위탁받을 뿐입니다.”

카일은 문서를 집어 들지 않았다.

“그 숫자를 확인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황실 서고의 보고서입니다.”

“실물을 본 사람은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렌이 빈 철판을 꺼냈다.

“이 자리에는 성수 실물이 없음. 교주 일행의 휴대품에도 성수 0잔. 기존 여유분 다섯 잔과 감독 제조분 열한 잔은 갈고리 골짜기에 별도 봉인 중. 황실 인수는 확인되지 않음.”

“연회에 와서 장부부터 펼치는 교주라니.”

귀족 하나가 웃었다.

“우리를 도둑으로 몰겠다는 건가?”

“아닙니다. 아직 도둑질한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카일은 빈 유리병 열여섯 개를 가리켰다.

“여러분은 실물도 없는 물건의 가격을 이미 계산하고 있습니다.”

연회장 뒤편의 실무자가 마렌의 철판을 집으려 손을 뻗었다. 레오나가 한 걸음 움직여 그의 앞을 막았다.

“그건 기록이다.”

“귀족 회관의 문서는 회관이 보관할 권리가 있습니다.”

“작성자는 마렌이다. 손을 대려면 먼저 물어라.”

주재 귀족이 문서 끝을 두드렸다.

“좋은 말만으로는 운송비와 경비를 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운영을 맡기면 교주님은 매달 금화를 받게 됩니다.”

카일은 계약서를 넘겼다. 판매권과 보관권은 자세히 적혀 있었지만 환자의 동의와 치료 실패의 기록 의무는 없었다. 독립 관찰자도 없었다.

“이 계약서에는 실패한 치료를 누구의 책임으로 남길지가 없습니다.”

“기적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말을 귀족 앞에서 하실 겁니까?”

“그 말을 기록하지 않는 곳에서는 기적이 아니라 사기가 됩니다.”

카일은 계약서를 식탁 중앙으로 밀었다.

“이 계약은 맺지 않겠습니다.”

“황실의 보호 아래 온 자가 황실 자산을 거부하는군요.”

“실물 확인이 없는 자산을 거부하는 겁니다.”

카일은 빈 철판을 두드렸다.

“그리고 여러분이 원하는 건 성수도 성지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지요?”

“여러분의 이름을 기적 옆에 세우는 일입니다.”


카일은 식탁 위의 촛대를 치우고 빈 공간을 만들었다.

“성수를 팔지는 않겠습니다. 성지 운영권도 넘기지 않겠습니다.”

마렌이 세 장의 철판을 펼쳤다.

“대신 후원 계약을 받겠습니다.”

첫 번째 철판에는 구휼이라고 적었다.

“물과 식량과 무료 진료소에 씁니다. 후원자는 어느 환자가 먼저 치료받을지 정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철판에는 증명이라고 적었다.

“기록관과 계량 도구와 독립 검증에 씁니다. 후원자의 장부도 공개합니다. 실패와 부작용을 지우지 않습니다.”

세 번째 철판에는 자립이라고 적었다.

“작업장과 운송로와 주민 교육에 씁니다. 교주가 없어도 돌아갈 수 있게 만드는 돈입니다.”

“그 후원으로 우리는 무엇을 얻습니까?”

“이름입니다.”

카일은 귀족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후원자의 이름과 금액은 독립 기록에 남습니다. 황도에 세워질 구휼 창고에는 후원 가문의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이름이 환자의 순서보다 위에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돈을 내고도 성수를 받지 못한다는 말이군요.”

“성수는 실물 확인과 동의와 기록을 거친 뒤에만 사용합니다. 후원금으로 치료 순서를 살 수는 없습니다.”

한 귀족이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우리는 자선을 구걸하러 온 게 아니오.”

“맞습니다. 자선을 원하지 않으셨으니 후원을 제안한 겁니다.”

카일은 빈 병을 바라보았다.

“자선은 이름을 숨기지만 후원은 이름을 남깁니다.”

남자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연회장 구석의 상단 대표였다.

“구휼 항목에 금화 백 닢. 새 창고의 이름을 우리 상단명으로 해 주시오.”

“환자 명단보다 크게 쓰지는 않습니다.”

“그 정도면 되오.”

마렌이 금액과 조건을 철판에 적었다. 상단 대표가 서명하자 다른 귀족이 끼어들었다.

“증명 항목에 금화 오십 닢. 황도에서 가장 투명한 후원자라고 써 주시오.”

“사실에 맞을 때만 기록합니다.”

“그럼 가장 먼저 공개한 후원자라고 쓰시오.”

“그건 가능합니다.”

세 번째 귀족은 경쟁심을 못 이기고 자립 항목에 금화 백오십 닢을 걸었다. 주재 귀족은 두 가문이 이름을 얻는 것을 보며 체면을 포기하지 못했다.

“구휼과 증명에 각각 백 닢씩 내겠소.”

마렌의 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구휼 이백 닢. 증명 백오십 닢. 자립 백오십 닢. 합계 오백 닢입니다.”

마렌은 잘못 적은 합계를 지우지 않고 옆에 정정 표시를 남겼다.

카일은 귀족들의 시선을 그대로 받으며 말했다.

“틀린 숫자를 바로 고치는 게 오늘 계약의 첫 번째 증명입니다.”

레오나가 카일 곁으로 다가왔다.

“이들이 나중에 돈을 핑계로 성지에 들어오면?”

“들어오게 하되 혼자 들어오지는 못하게 해야지.”

카일은 세 철판을 가리켰다.

“돈을 낸 순간부터 기록과 증인도 함께 사는 겁니다.”

그 말은 귀족들에게 멋진 교리처럼 들렸다. 카일에게는 욕심 많은 후원자들을 서로 묶는 세 겹의 끈처럼 느껴졌다.


연회가 끝난 뒤 별실에는 밀봉된 봉투 다섯 개가 남았다.

마렌은 금액과 사용처와 서명한 사람을 세 장의 사본에 나눠 적었다. 레오나는 문 앞에 서서 봉투를 바꿔치기하려는 손이 없는지 지켜보았다.

카일은 금화의 무게를 확인했다.

수도에서 도망칠 때라면 이 정도 돈이면 충분했다. 국경을 넘고 작은 집을 사서 몇 년은 숨어 살 수 있었다.

그는 봉투 하나를 품에 넣으려다 손을 멈췄다.

“이건 도주 자금으로 쓰지 않겠습니다.”

“전부 교단 운영에 씁니까?”

“세 기둥에 적힌 대로만 씁니다. 내가 사라져도 남는 창고와 장부와 작업장이 필요합니다.”

카일은 금화를 세 묶음으로 나누었다.

“황도 안에서도 구휼을 시작합니다. 증명금으로 독립 기록관을 찾고 자립금으로 운송로와 작업장을 확보합니다. 골짜기 하나만 있으면 그곳을 빼앗는 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니까요.”

그때 문밖에서 세 번 노크가 울렸다.

“황실 내관입니다. 비공개 서신을 전하러 왔습니다.”

“시간과 방문 목적을 먼저 적으세요.”

내관이 문밖에서 짧게 웃었다.

레오나가 문을 열자 짙은 회색 옷의 내관이 붉은 밀랍이 찍힌 봉투를 내밀었다.

“황실의 귀한 분이 위독합니다.”

카일의 손이 봉투 앞에서 멈췄다.

“병명은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증상 기록은요?”

“궁 안에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환자의 동의는?”

내관의 표정이 굳었다.

“황실의 명령입니다.”

“그건 동의가 아닙니다.”

카일은 봉투를 받지 않았다.

“성수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병을 모른 채 낫게 하겠다고 약속할 수도 없습니다. 증상과 처치와 실패를 기록할 사람을 데려가겠습니다.”

“거절하시는 겁니까?”

“조건을 확인하는 겁니다.”

내관은 봉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해 뜨기 전 궁으로 오십시오. 환자의 얼굴과 병을 직접 확인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레오나와 마렌이 동행합니다.”

“궁은 연회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록이 더 필요합니다.”

내관이 물러가자 카일은 봉투를 바라보았다.

파멸의 별이 목 안쪽에서 낮게 웃었다.

―이번에는 더 맛있는 숨이구나.

‘사람의 숨을 먹지는 않는다.’

카일은 금화 세 묶음과 닫힌 봉투를 번갈아 보았다.

연회에서 얻은 것은 금화 오백 닢과 이름 몇 개였다. 그러나 그날 밤 황실이 내민 봉투 안에는 그보다 비싼 대가가 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가시겠습니까?”

마렌이 물었다.

“가야지.”

카일은 봉투를 들어 올렸다.

“낫게 하겠다고 가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 아픈지 확인하러 가는 겁니다.”

새벽이 오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짧았다.

황도에서 처음 얻은 후원금은 교단을 살릴 자금이 됐다.

그리고 그 자금을 얻은 바로 그날 밤 카일은 황실의 비공개 환자를 마주하러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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