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25화: 성지 선포
남쪽 수레를 향하던 검은 선이 바퀴 앞에서 멈췄다.
멈춘 것은 선뿐이었다. 빈 철판 아래의 가닥은 여전히 꿈틀거렸다.
낮은 종이 수레 안쪽에서 울렸다.
카일은 손잡이에 손을 대지 않았다.
“사람부터 물리십시오.”
레오나가 주민들을 환자 천막 쪽에서 밀어냈다.
“수레가 움직이면 흰 재 바깥으로 나가라.”
수레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북쪽 수레와의 간격이 손가락 하나만큼 줄었다.
마렌이 새 장부를 펼쳤다.
“남쪽 수레의 위치가 변했습니다. 봉인끈과 매듭은 그대로입니다.”
에단은 수레 아래로 황금빛을 흘렸다. 쇠테 아래의 홈과 빈 철판을 잇던 검은 선이 세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수레 밑에 머물렀고 하나는 환자 천막 아래로 파고들었다. 마지막 가닥은 서쪽 돌틈으로 향했다.
“사람 쪽으로 향한 선이 있습니다.”
“수레는 고정하고 선만 봅니다.”
카일은 빈 철판의 가장자리에 손을 올렸다.
―수레를 통째로 삼켜라.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안에 있는 걸 확인하지 않았다.’
―병과 물뿐이다.
‘네가 모르는 걸 내가 믿을 이유는 없어.’
카일은 이를 악물었다.
“사람의 숨은 먹지 마. 수레 안의 재고도 먹지 마. 원본 장부도 건드리지 마.”
검은 힘이 손바닥으로 올라왔다. 카일은 남쪽 수레에서 환자 천막으로 뻗은 가닥만 붙잡았다.
레오나가 바퀴 뒤에 받침돌을 밀어 넣었다.
“오른쪽 축을 고정했다.”
마렌은 레오나의 손과 발과 시간을 따로 받아 적었다. 에단의 빛이 가느다란 선의 양옆을 눌렀다.
검은 선이 꿈틀거리다가 잿빛으로 말랐다. 환자 천막 아래에서 급하게 들리던 숨도 차분해졌다.
하지만 남쪽 수레 안쪽의 낮은 종은 다시 울렸다.
한 번.
카일의 검은 흔적이 턱 아래에서 뛰었다. 입안에 낯선 이빨이 닿았다.
“끊은 건 환자 천막 쪽 하나뿐입니다.”
에단이 말했다.
“수레 안쪽과 서쪽 돌틈의 연결은 남았습니다.”
“그러면 남은 것도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주민 하나가 물었다.
카일은 봉인끈을 바라보았다.
“봉인이 멀쩡하다는 건 안에 있는 것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모르는 것을 없애서 안전하다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골짜기 관문에 황실 문장이 찍힌 수레 세 대가 나타났다.
“오레스 황실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짙은 회색 외투를 입은 남자가 봉인된 두루마리를 펼쳤다.
“갈고리 골짜기의 치료 시설과 성수 재고를 황실 임시 관리 아래 둔다. 제조자와 교단의 주요 인원은 황도로 동행한다. 모든 헌금과 물자는 황실 서고에 등록한다.”
주민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보호하러 왔다면서 수레부터 가져가겠다는 겁니까?”
마렌이 물었다.
파견관은 두 수레를 바라보았다.
“영주군과 상단이 노릴 만큼 커졌다. 황실이 보호하지 않으면 더 큰 군대가 올 것이다.”
“그 보호가 사람과 기록을 빼앗는 방식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카일은 두루마리를 받지 않고 장부 옆의 빈 철판을 가리켰다.
“초안부터 보겠습니다.”
서기관이 펼친 목록에는 성수 열여섯 잔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카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존 여유분 다섯 잔과 감독 제조분 열한 잔. 표식도 조건도 다른 재고였다.
“이 숫자를 어디서 얻었습니까?”
“골짜기에서 보낸 보고서다. 수레 두 대의 재고를 합산했지.”
“합산하면 안 됩니다.”
에단이 앞으로 나섰다.
“제조 조건과 검증 시점이 다릅니다. 합친 수량을 공문서에 올리면 사고가 나도 책임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파견관이 에단을 보았다.
“사제께서는 이 교단의 편입니까?”
“나는 확인되지 않은 것을 확인됐다고 쓰지 않는 편입니다. 그 원칙은 어느 신전에도 필요합니다.”
카일은 서기관의 붓을 보았다. 서기관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보고서의 숫자를 그대로 옮길 뿐이었다. 하지만 붓이 내려가는 순간 두 수레의 경계는 공적인 기록에서 사라진다.
“파견관.”
카일이 말했다.
“당신들은 골짜기를 보호하러 왔습니까? 아니면 골짜기라는 이름 아래 있는 것을 가져가러 왔습니까?”
“둘은 양립할 수 있다.”
“그렇다면 먼저 보호의 범위를 쓰십시오. 사람인지 물자인지 교주인지 분명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파견관 뒤의 수행원 둘이 수레 쪽으로 움직였다. 레오나가 길을 막았다.
“봉인선 안쪽으로 들어오지 마라.”
수행원들은 레오나의 검을 보고 멈췄다.
카일은 황실 문장과 남쪽 수레를 번갈아 보았다. 안전한 보호막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보호막 안에 자신과 교단을 통째로 넣는 순간 목줄로 바뀔 것이다.
“공개해서 결정합시다.”
카일이 말했다.
“주민과 방문객 앞에서 장부를 펼치고 성지의 조건을 정합시다. 황실이 사람을 보호하겠다는 문장을 넣으면 나도 황도에 가겠습니다.”
파견관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좋다. 정오에 중앙 공터에서 낭독한다. 합의하지 못하면 초안은 원래대로 시행한다.”
정오의 공터에는 골짜기 주민과 외부에서 온 환자 가족들이 모였다.
파견관은 상자 위에 서서 보호령 초안을 읽었다.
“갈고리 골짜기를 황실이 보호하는 성별교의 성지로 지정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렀다.
카일은 손을 들었다.
“성지라는 말부터 정확히 하십시오.”
“황실이 인정하는 성지다.”
“성지는 교주 개인의 창고가 아닙니다. 황실의 창고도 아닙니다.”
카일은 마렌에게 손짓했다. 마렌이 세 장의 얇은 철판을 세웠다.
“첫째는 구휼입니다. 환자와 피난민의 출입을 헌금이나 신분으로 막지 않습니다. 물과 식량과 안전한 잠자리를 먼저 기록합니다.”
마렌이 첫 번째 철판을 들었다.
“둘째는 증명입니다. 기존 여유분 다섯 잔과 감독 제조분 열한 잔을 분리합니다. 호전과 완치를 나누고 실패와 부작용을 같이 기록합니다. 출처 미확인 문장은 사실로 바꾸지 않습니다.”
에단이 파견관을 보았다.
“황실 서고에는 원본 사본을 보내겠습니다. 다만 검증 전 재고를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세 명의 독립 관찰자가 각 봉인과 이동을 확인해야 합니다.”
“셋째는 무엇이지?”
“자립입니다.”
카일이 대답했다.
“헌금과 식량은 주민 대표가 관리합니다. 전도단은 성수를 싣고 다니지 않습니다. 기록과 기술과 구휼 절차를 전합니다. 교주가 사라져도 사람들이 서로를 살릴 수 있어야 성지라는 이름을 지킬 수 있습니다.”
주민들 사이에서 작은 목소리가 나왔다.
“교주님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까?”
카일은 못 들은 척했다.
파견관이 서기관에게 초안을 내밀었다.
“이 조건을 넣으면 황실은 무엇을 얻지?”
“골짜기에서 벌어지는 일을 황실이 모르게 두지 않습니다.”
에단이 답했다.
“기록의 사본과 외부 위협에 대한 보고를 받게 됩니다. 대신 무장 세력이 환자를 징발하거나 성수를 강제로 가져가지 못하게 하십시오.”
카일은 한 걸음 더 나갔다.
“성지 안에서는 황실 관리관도 봉인된 수레를 단독으로 열 수 없습니다.”
파견관이 반박하려는 순간 남쪽 수레에서 낮은 종이 울렸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봉인끈은 그대로였다. 에단의 황금빛 아래에서 검은 선만 봉인 가장자리로 기어갔다.
“저것도 기적입니까?”
누군가 외쳤다.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확인한 건 종이 한 번 울렸고 봉인끈은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마렌은 그 말을 받아 적었다. 에단은 검은 선을 비췄지만 제거하지 않았다.
카일은 빈 철판을 남쪽 수레에서 한 뼘 떨어진 곳에 세웠다. 검은 선이 원본 장부와 공문서를 향해 움직이다가 철판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세 장으로 나누십시오.”
카일이 서기관에게 말했다.
“구휼과 증명과 자립을 따로 봉인하십시오. 두 수레의 재고도 따로 적으십시오.”
서기관이 세 장의 판에 문장을 나누어 쓰자 검은 선이 느리게 가라앉았다.
그것이 일반적인 규칙인지 카일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문서가 두 재고를 묶지 않자 종은 더 울리지 않았다.
파견관은 새 문서를 오래 읽었다.
“황실의 보호를 받는 대신 기록의 사본을 보내고 외부 병력의 진입을 막는다. 성수는 검증 전 반출하지 않는다. 주민 대표가 헌금을 관리한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좋다. 이 조건으로 선포하겠다.”
해 질 무렵 북쪽 관문 앞에 황실 깃발과 성별교의 깃발이 나란히 세워졌다.
파견관은 수정된 보호령을 큰 소리로 읽었다.
“갈고리 골짜기를 황실이 보호하는 성별교의 공식 성지로 선포한다. 성지 안의 환자와 피난민을 강제로 내보낼 수 없으며 무장 세력은 주민 대표와 기록 담당자의 확인 없이 물자와 사람을 징발할 수 없다.”
주민들의 함성이 골짜기 벽을 울렸다.
카일은 무릎을 꿇으려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무릎 꿇지 마십시오. 오늘 지켜진 건 제 힘이 아니라 여러분이 나눈 기록과 역할입니다. 성지는 한 사람에게 기대는 곳이 아닙니다.”
마렌이 첫 번째 명단을 내밀었다.
기록단은 인근 광산 마을로 향한다. 환자와 물자의 흐름을 적고 재고를 섞지 않는다.
구휼단은 강 하류의 피난민 촌으로 향한다. 성수 대신 안전한 물과 식량 창고를 먼저 확인한다.
자립단은 버려진 제분소 마을로 향한다. 주민들이 직접 장부와 작업 순서를 만들도록 돕는다.
“성수는 싣지 않습니다.”
마렌이 확인했다.
“필요하면 현지 재료와 감독 절차부터 요청합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레오나는 전도단의 로프와 표식을 점검했다.
“돌아올 때도 이름만 부르지 말고 시간과 행동을 남겨라.”
에단은 황실 봉인이 찍힌 세 장의 판을 들여다보았다.
“이 문서가 오래 버틸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래 버티게 만드는 게 기록관의 일 아닙니까?”
카일이 말했다.
첫 전도단이 관문을 나설 때 황실 파견관이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황실의 초청장이다. 성지를 인정받은 교주가 직접 황도에서 설명해야 한다.”
카일은 붉은 밀랍을 보았다. 손바닥의 닫힌 입 문양이 뜨거워졌다.
“거절할 수 있습니까?”
“그건 황도에서 논의하자고 하더군.”
카일은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 순간 남쪽 수레 안에서 낮은 종이 한 번 울렸다.
아무도 수레를 열지 않았다.
갈고리 골짜기는 보호받게 됐다.
대신 이번에는 도망칠 방향까지 황실이 정해 주었다.
파멸의 별이 아주 낮게 웃었다.
―황도에는 더 많은 별이 있다.
카일은 봉투를 품 안에 넣었다.
‘그 별들이 내 목을 조르기 전에 끝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