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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24화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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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기록을 먹는 선

두 수레 사이에 놓인 장부의 가장자리에서 검은 선이 멈췄다.

멈춘 것은 잠시뿐이었다.

선은 종이의 결을 따라 기어가더니 기존 여유분과 감독 제조분을 나누던 선을 눌렀다. 다섯 잔 아래의 표식과 열한 잔 아래의 표식이 검게 겹쳤다.

잉크가 번진 것이 아니었다. 종이 위에 새로 난 금이 두 줄을 하나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장부를 덮으십시오.”

주민 하나가 장부로 다가섰다.

“태워야 합니다. 저게 기록을 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마렌은 손가락이 종이에 닿기 직전에 멈췄다.

“태우면 다섯 잔과 열한 잔이 따로 있었다는 증거도 사라집니다.”

“증거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원본을 없애지 않는 겁니다.”

카일은 장부 주변으로 다가오던 주민들을 세 걸음 물렸다.

“아무도 숫자를 읽지 마십시오. 누가 말했는지도 적지 않습니다. 지금 보이는 변화만 기록합니다.”

마렌은 새 장부를 펼쳤다.

“네 번째 종 뒤. 두 표식 사이의 구분선이 검게 눌림. 봉인끈은 변화 없음.”

그녀가 문장을 끝내자 원본의 검은 선이 빈 여백으로 올라왔다.

열여섯.

주민들이 숨을 삼켰다.

“열여섯은 확인해야 한다.”

수레 아래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봉인을 열어라.”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낮게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카일은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다섯 잔은 기존 여유분이고 열한 잔은 감독 제조분이었다. 수량을 합치면 검증 조건도 함께 사라진다.

“열여섯이라는 숫자는 장부 밖에 있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우리가 확인한 건 다섯과 열한입니다. 봉인은 열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웃었다.

“기록 하나.”

검은 선이 원본의 여백에서 떨어져 나왔다.

카일은 곁의 빈 철판을 가리켰다.

“마렌. 이름 없이 적으세요. 두 수레의 위치와 봉인끈의 변화 없음. 검은 선의 방향.”

“숫자는요?”

“숫자는 원본에 있습니다. 옮기지 않습니다.”

마렌이 첫 줄을 끝내자 검은 선의 한 가닥이 종이에서 빠져나와 철판 가장자리로 향했다.

에단이 황금빛을 좁혔다.

“잉크를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새 기록이 생기는 순간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레오나는 장부와 철판 사이에 몸을 세웠다.

“그럼 저 철판도 버려야 하나?”

“아니요.”

카일은 선이 철판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았다.

“이번에는 버리지 않습니다. 어디까지 따라오는지 봅니다.”


철판은 원본 장부와 수레 사이의 빈 공간에 놓였다.

레오나는 북쪽 수레의 바퀴 뒤에 받침돌을 끼웠다. 에단은 쇠고리가 달린 세 갈래 홈을 비췄다. 마렌은 새 철판에 관찰 사실만 적었다.

카일은 철판을 직접 들지 않고 철제 받침 위에 올렸다.

“한 뼘씩 움직입니다. 손을 놓는 순간은 말하지 말고 시간으로 남기세요.”

주민 둘이 서로 마주 섰다.

“철제 받침을 잡은 손이 왼쪽으로 움직였습니다.”

“로프를 잡은 손과 발은 그대로입니다.”

마렌이 그 문장을 새기자 검은 선이 철판의 글자 위로 번졌다. 글자를 지우지는 않았다. 선은 철판의 뒷면으로 내려가 받침대 아래의 돌을 훑었다.

“원본에서 떨어졌습니다.”

에단이 말했다.

마렌은 원본을 확인했다. 다섯 잔과 열한 잔을 나누던 선은 검게 눌려 있었지만 아직 보였다. 열여섯이라는 글자도 여백에 남아 있었다.

“숫자를 지운 게 아니라 덧씌웠습니다.”

“그 차이를 적으세요. 거짓을 없앴다고 쓰지 말고 거짓이 위에 생겼다고 쓰십시오.”

철판을 한 뼘 당기자 수레 아래의 쇠고리가 안쪽에서 움직였다.

딸깍.

북쪽 수레의 바닥이 떨렸다. 봉인끈은 흔들리지 않았다.

레오나가 바퀴를 눌렀다.

“축이 당겨진다.”

에단이 바닥을 비추었다. 세 번째 홈의 검은 선이 철판 받침을 감고 있었다. 선은 수레를 움직이지 않았지만 철판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쇠고리를 한 번씩 당겼다.

“기록을 놓은 자리를 묶는 것 같습니다.”

“확정하지 않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철판의 위치가 바뀔 때 쇠고리가 반응했다는 것만 남깁니다.”

수레 아래에서 목소리가 흘렀다.

“증언 하나.”

이어서 방금 철판에 적은 것과 비슷한 문장이 나왔다.

“두 수레의 간격. 봉인끈은 움직이지 않음. 검은 선은 세 번째 홈.”

마렌의 펜 끝이 멈췄다.

“제가 적은 걸 읽은 걸까요?”

“처음부터 알고 있던 말을 되풀이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에단이 대답했다.

카일은 빈 철판의 뒷면을 두드렸다.

“말하지 않은 사실을 적어 봅시다. 지금 철판을 수레에서 한 뼘 떼어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마렌은 누구에게도 읽어 주지 않고 새 줄을 새겼다.

철판과 북쪽 수레 사이의 거리가 한 뼘 벌어짐. 이동 시각은 기록자만 확인함.

문장이 끝나자 검은 선이 떨렸다.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북쪽 수레의 쇠고리가 두 번 움직였다.

딸깍. 딸깍.

레오나가 검을 뽑았다.

“안쪽에서 누가 당긴다.”

“사람이라고 쓰지 마십시오.”

마렌이 말했다.

“쇠고리 두 번. 철판 이동 뒤 반응함.”

카일은 철판을 더 움직이지 않았다. 새 사실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말하지 않은 기록 뒤에 반응이 온 것은 분명했다.

그 순간 첫 봉인문 쪽에서 무거운 종이 울렸다.

한 번.


카일은 로프 끝의 철 조각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안쪽으로 보냅니다. 이름은 묻지 않습니다.”

레오나가 로프를 잡았다.

“사람을 끌어내지는 않겠지.”

“한 번의 대답만 확인합니다. 대답이 왔다고 쓰고 누가 보냈는지는 적지 않습니다.”

카일은 철 조각을 세 번째 홈 가까이에 놓았다. 빈 철판의 검은 선은 홈 안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끝은 첫 봉인문 아래로 사라졌다.

마렌이 장부의 가장자리를 눌렀다.

“기존 약속을 씁니다. 한 번은 응답이고 세 번은 부상 신호입니다.”

“그 약속을 안쪽에서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에단이 경고했다.

“그래서 하나만 보냅니다.”

카일은 로프를 한 번 당겼다.

철 조각이 홈을 긁으며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즉시 흘러나왔다.

“한 번. 대답했다.”

마렌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말이 먼저 나왔습니다.”

에단은 황금빛을 보조 통로 쪽으로 좁혔다. 가까운 돌틈에는 검은 밀랍의 흔적만 보였다. 공기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뒤 깊은 곳에서 마른 기침이 들렸다.

기침 다음에는 긴 호흡이 이어졌다. 숨이 막힌 사람이 억지로 공기를 나누어 마시는 소리였다.

그리고 금속이 한 번 울렸다.

이번에는 가까운 돌틈이 아니었다. 첫 봉인문 아래쪽에서 둔탁한 진동이 올라왔다.

레오나의 손이 로프를 움켜쥐었다.

“철 조각이 돌아옵니다.”

“당기지 마십시오.”

철 조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홈 안쪽에서 금속이 한 번 더 긁혔다.

마렌은 시간과 위치를 나누어 적었다.

가까운 음성은 신호 직후 발생함. 깊은 기침은 지연 후 발생함. 깊은 기침 뒤 긴 호흡 확인. 이후 첫 봉인문 아래에서 금속음 한 번.

“둘은 같은 소리가 아닙니다.”

에단이 말했다.

“위치가 다르고 공기의 흐름도 다릅니다.”

“그럼 안쪽에 사람이 있습니까?”

레오나가 물었다.

“있을 가능성은 올라갔습니다. 하렌이라고 부를 근거는 아직 없습니다.”

카일이 대답했다.

그가 말을 끝내자 검은 선이 움직였다.

빈 철판을 감고 있던 선 하나가 원본 장부의 마지막 빈 페이지를 향해 늘어졌다.

“원본을 노립니다.”

마렌이 장부를 덮으려 했다.

카일이 손을 내저었다.

“닫지 마세요. 지금 상태를 모두 봐야 합니다.”

“그럼 선이 페이지에 닿습니다.”

“닿게 두되 숫자와 이름은 건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카일은 빈 철판을 들어 올렸다.

“원본과 같은 높이에 놓습니다.”

에단이 그를 보았다.

“미끼를 만들겠다는 겁니까?”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확인되지 않았다고 남기는 겁니다.”

마렌은 새 철판의 마지막 줄을 비워 두었다.


레오나는 빈 철판을 흰 재 안쪽의 돌에 고정했다. 에단의 빛이 원본 장부와 철판 사이의 바닥을 가로질렀다.

검은 선은 두 갈래였다.

하나는 원본의 빈 페이지로 향했다. 다른 하나는 빈 철판 아래에 걸려 있었다.

“둘 중 하나를 끊어야 합니다.”

에단이 말했다.

“원본을 통째로 먹으면 기록이 사라집니다. 선을 그대로 두면 페이지가 통로가 됩니다.”

카일은 손바닥의 닫힌 입 모양을 내려다보았다. 문양은 이미 벌어져 있었다. 목 아래까지 번진 검은 흔적이 맥박처럼 뛰었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종이를 먹으면 말이 사라진다.

‘사람이 믿고 있는 건 종이가 아니야.’

―기록을 없애면 아무도 네 거짓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안 먹는다.’

카일은 빈 철판을 보았다. 이름도 재고 숫자도 없었다. 봉인끈과 선의 방향과 두 수레 사이의 거리만 남아 있었다.

“사람의 숨은 먹지 마. 수레 안의 재고도 먹지 마. 원본 장부도 먹지 마.”

검은 힘이 손바닥에서 흘러나왔다.

레오나가 로프를 당겼다.

“철판이 움직인다.”

“고정해.”

“이미 하고 있다.”

검은 선이 빈 철판의 가장자리로 몰렸다. 원본의 빈 페이지를 향하던 가닥이 종이를 스치며 흔들렸다. 카일은 그 가닥을 붙잡지 않았다.

대신 빈 철판 아래에 모인 선만 움켜쥐었다.

검은 힘이 안쪽으로 빨려 들어왔다.

어깨가 굳었다. 턱 아래가 타들어 갔다. 입안에서 낯선 이빨이 다시 자라났다.

에단이 빛을 유지하며 말했다.

“지금 멈추면 원본 쪽 선이 다시 살아납니다.”

“그럼 더 빨리 끝내야겠군요.”

카일은 철판에 남은 검은 선의 끝을 하나씩 눌렀다.

첫 번째 가닥이 잿빛으로 말랐다. 두 번째 가닥이 끊어지며 쇠고리 안쪽에서 낮은 종이 울렸다.

원본 장부의 숫자는 손상되지 않았다. 다섯과 열한은 여전히 서로 다른 줄에 남아 있었다.

마렌이 숨을 내쉬었다.

“원본 보존. 빈 철판의 검은 선은 대부분 소실.”

원본의 마지막 빈 페이지에 검은 자국이 생기고 있었다.

이번에는 숫자가 아니었다.

안쪽에 둘이 있다.

문장은 종이 위에 새겨진 것처럼 또렷했다. 누구의 손으로 적혔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카일은 장부를 만지지 않았다.

“주장입니다.”

마렌이 먼저 말했다.

“출처 미확인. 사실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적으세요.”

카일은 턱을 들었다.

“안쪽에 둘이 있다는 문장이 원본의 빈 페이지에 나타남. 생존자 수와 일치하지 않음. 발화자와 작성자는 확인되지 않음.”

그 순간 북쪽 수레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대신 남쪽 수레의 봉인 안쪽에서 낮은 종이 한 번 울렸다.

레오나가 몸을 돌렸다.

카일의 목 아래 검은 흔적이 한 치 더 올라왔다.

수레 두 대 사이 장부의 마지막 문장이 아주 느리게 흔들렸다.

그리고 빈 철판 아래에서 아직 끊기지 않은 선 하나가 남쪽 수레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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