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20화: 빈칸을 쓴 자
새벽이 밝았을 때도 카일의 이름은 장부에 돌아오지 않았다.
마렌은 새 종이를 펼치고 그의 이름을 적었다. 잉크가 스미기도 전에 글자가 흔들렸다. 번진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종이의 흰 결만 남았다.
“다시 적어 보겠습니다.”
“하지 마세요.”
카일이 펜을 막았다.
“기록을 복구해야 합니다. 교주님이 무엇을 잃었는지 확인하려면 이름부터 남겨야 합니다.”
“기억은 남았고 이름을 말하는 데도 문제가 없습니다.”
에단이 장부를 가져갔다.
“조사 보고서에는 네 이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보고서용 장부와 문 앞의 표식을 나눕니다.”
“기록을 나누면 증거가 흩어진다.”
“흩어지는 게 아니라 잠그는 겁니다. 이름이 연결된 장부는 철판 상자에 넣고 두 사람이 함께 확인합니다. 문 앞에서는 시간과 수량과 매듭만 씁니다.”
에단의 눈썹이 움직였다.
“사람을 숫자로 바꾸겠다는 건가?”
레오나가 카일보다 먼저 말했다.
“사람을 숫자로 바꾸는 것과 문에 이름을 내주는 것은 다르다.”
“맞습니다. 사람은 이름으로 확인하고 이동은 매듭으로 확인합니다. 둘을 섞지 않는 겁니다.”
그는 하렌의 원본 기록과 자신의 빈 줄이 있는 장부를 철판 상자에 넣게 했다. 상자의 열쇠는 에단과 마렌이 하나씩 나눠 가졌다.
“네 이름이 사라진 장부를 내게 맡기겠다는 건가?”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들어오는지 보셔야 하니까요.”
에단이 대답하기 전에 폐갱도 쪽에서 종이 한 번 울렸다.
카일은 손바닥을 감쌌다. 닫힌 입 모양의 문양은 새벽빛 아래에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이름을 들고 가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대신 이름 없이도 무엇을 가져가는지 확인합니다.”
첫 봉인문 아래로 빈 철판을 밀어 넣었다.
철판에는 글자도 문양도 없었다. 양쪽 끝의 구멍으로 로프가 지나갔고 로프에는 매듭 여섯 개와 철 조각 여섯 개가 번갈아 묶였다.
마렌은 입구 바깥에서 매듭의 위치와 시간을 적었다. 사람 이름 대신 첫 매듭이 문턱을 넘은 시각과 철판이 멈춘 횟수를 기록했다.
레오나는 로프를 허리에 묶었다.
“당겨지면 끊겠습니다.”
“세 매듭을 먼저 확인하세요. 문 안으로 끌려가면 그때 끊으십시오.”
에단은 황금빛을 문양에 쏘지 않고 바닥과 문의 가장자리만 비췄다. 검은 밀랍이 눌어붙은 틈이 얇게 젖어 있었다.
카일이 철판을 밀었다.
돌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냐?”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일.”
장부에서 사라진 이름인데도 발음은 또렷했다. 레오나가 로프를 움켜쥐었다.
“대답하지 마.”
“사람 셋. 로프 하나. 철 조각 여섯. 문은 열지 않는다.”
에단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 말을 왜 하지?”
“이름 대신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대답할 수 있는지 보려고요.”
돌문 안쪽에서 낮은 웃음이 났다.
“사람 셋. 로프 하나. 철 조각 여섯.”
목소리는 한 박자 늦게 따라 했다. 숫자와 물건은 정확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달랐다.
“문을 연다.”
레오나가 로프를 당겼다. 철판이 돌바닥을 긁으며 돌아왔다. 문틈 안쪽에서 검은 선 하나가 철판의 구멍으로 스며들었다.
“당기지 마십시오.”
에단이 외쳤다.
“이미 붙었습니다.”
카일은 철판을 바라보았다. 검은 선은 로프를 타지 않고 표면을 가로질러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하나는 문 쪽을 향했고 다른 하나는 서쪽 벽 쪽으로 기울었다.
“방향처럼 보입니다.”
“방향으로 확정하지 마세요.”
철판은 놓인 각도 그대로 보관했다.
그 순간 서쪽 벽 안쪽에서 마른 기침이 들렸다.
카일의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한 번의 기침 뒤에 짧은 간격이 있었다. 하렌이 성수를 마신 뒤 숨을 고르던 간격과 비슷했다.
레오나가 검을 뽑았다.
“저쪽이다.”
돌문 안쪽에서 같은 기침이 한 번 더 들렸다. 이번에는 간격이 없었다. 누군가 흉내 내듯 바로 이어 붙인 소리였다.
하렌의 신호일 수도 미끼일 수도 있었다.
“문부터 지킵니다.”
카일이 말했다.
“철판이 가리킨 곳은 문을 열지 않고 확인합니다.”
기록 천막 아래의 흙을 걷어 내자 낡은 돌틈이 드러났다.
마렌은 주민들에게 곡괭이를 내려놓으라고 했다. 돌을 잘못 건드리면 환자 천막 아래의 흙이 무너질 수 있었다. 카일은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눠 환자 천막 감시와 수레 봉인과 돌틈 감시를 맡겼다.
주민 하나가 카일의 이름을 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입구 쪽에서 들린 목소리 때문이었다.
“마렌.”
이번에는 천막 아래에서 소리가 났다.
마렌의 얼굴이 굳었다.
“방금 누가 불렀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소리는 이름을 부른 뒤 돌틈 속으로 가라앉았다.
카일이 주민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이름을 들었다고 안쪽으로 가지 마십시오. 서로 본 행동과 맡은 위치만 말하세요.”
마렌은 이름 대신 역할과 위치를 먼저 적었다. 글자가 종이에 남는 동안 돌틈의 검은 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에단이 황금빛을 아래로 흘렸다. 돌틈 안쪽에서 검은 밀랍 조각과 얇은 종줄이 드러났다. 종줄은 끊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한쪽 끝이 폐갱도 방향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레오나가 검끝으로 가장자리의 작은 돌만 밀어냈다. 틈 안에서 검은 선이 꿈틀거리며 바닥을 향했다.
그때 돌벽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지 마십시오.”
거칠고 낮은 목소리였다. 뒤에 짧은 기침이 붙었다.
카일은 숨을 멈췄다.
“하렌?”
레오나가 몸을 돌렸지만 카일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이름을 묻지 마십시오.”
돌벽 너머의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문을 열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기침이 없었다. 앞선 목소리의 거친 숨도 없었다.
에단이 낮게 물었다.
“두 소리는 같은 방향에서 왔나?”
카일은 철판의 각도를 보았다. 검은 선이 처음에는 첫 봉인문 쪽으로 향했다가 두 번째 목소리 뒤에는 천막 아래의 돌틈으로 꺾였다.
“같지 않습니다. 첫 번째는 안쪽 깊은 곳에서 올라왔습니다. 두 번째는 바로 아래에서 울렸어요.”
“그 차이를 어떻게 아나?”
“첫 번째는 기침 뒤에 숨을 고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말을 흉내 낸 뒤 바로 끊겼습니다.”
레오나가 돌틈을 내려다보았다.
“첫 봉인문과 이곳이 따로 연결됐다는 뜻인가?”
“가능성이 생긴 겁니다.”
카일은 에단에게 빛으로 선의 끝만 보여 달라고 했다. 황금빛이 돌틈을 따라 흐르자 검은 선은 서쪽 벽 아래로 들어갔다가 기록 천막 바닥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빈 철판의 검은 줄과 이어졌다.
첫 봉인문을 열지 않아도 길은 골짜기 안쪽까지 닿아 있었다.
“우리가 기록을 적어서 길이 생긴 겁니까?”
마렌이 물었다.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이름을 부른 뒤 움직였습니다.”
카일은 주민들을 바라보았다.
“소리가 들려도 대답하지 마세요. 누가 무엇을 들었는지는 기록하되 들린 이름은 입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에단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것도 기록을 포기하는 건 아닌가?”
“아닙니다. 기록은 남깁니다. 문과 주민 사이에 바로 놓지 않는 겁니다.”
검은 선이 천막 아래에서 갈라졌다. 하나는 환자 천막으로 뻗었고 다른 하나는 마렌이 들고 있던 빈 철판으로 돌아왔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철판을 먹어라.
‘저 안에는 사람도 이름도 없어.’
―그래서 먹기 쉽다.
‘먹을 건 선 하나뿐이야.’
―끝까지 먹으면 문도 열린다.
카일은 손가락을 굽혔다. 검은 선은 그 움직임을 기다린 것처럼 철판 가장자리를 타고 올라왔다.
카일은 철판을 바닥에 눕혔다.
“레오나. 철판을 고정하세요. 선이 손목을 넘어오면 바로 끊습니다.”
“당신의 손도?”
“가능하면.”
“가능하지 않으면?”
“그때는 당신이 정하세요.”
레오나는 철판 양쪽을 쇠못으로 눌렀다. 에단은 폐갱도 쪽과 철판 사이를 번갈아 비췄다. 황금빛은 선을 없애지 않았지만 어디까지 뻗었는지는 보여 주었다.
카일은 빈 철판 위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손바닥의 닫힌 입 모양을 철판 가까이 가져갔다.
“사람의 이름과 숨은 먹지 마.”
파멸의 별이 굶주린 듯 떨었다.
―이름을 돌려주면 되잖아.
“돌려주는 척하며 더 가져가려는 거겠지.”
―네 이름은 이미 비어 있다.
“빈칸은 먹이가 아니야.”
카일은 철판의 검은 선 중 캠프 쪽으로 이어진 부분만 붙잡았다. 선 전체를 끌어당기지 않고 가느다란 연결 하나를 잘랐다.
검은 힘이 손바닥에서 팔로 파고들었다. 쇄골 아래까지 번진 흔적이 목을 향해 한 치 올라왔다. 입안에서 낯선 이빨이 다시 돋는 감각이 났다.
레오나가 철판을 더 세게 눌렀다.
“지금 멈추면 선이 돌아옵니다.”
“돌아오기 전에 끊어야 합니다.”
에단의 빛이 철판 가장자리를 붙잡았다. 검은 선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하나씩 잿빛으로 말라 갔다. 환자 천막 쪽으로 향한 선이 먼저 끊겼다.
카일은 마지막 연결을 잘랐다. 철판 아래에서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손을 거두자 기록 천막과 환자 천막을 잇던 흔적은 사라졌다. 그러나 첫 봉인문 쪽으로 이어진 선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끊긴 건 하나뿐입니다.”
에단이 말했다.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고요.”
“그래서 다행입니다.”
카일은 빈 철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 글자도 없던 중앙에 검은 선이 천천히 글자를 만들고 있었다.
누구도 그 자리에서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마렌도 자신의 이름을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철판의 표면에 한 글자씩 흔적이 생겼다.
마렌.
마렌이 한 걸음 물러났다.
“제 이름을 썼습니다.”
“만지지 마세요.”
카일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이름만 적힌 기록은 저쪽이 원하는 겁니다.”
“그럼 지워야 하지 않습니까?”
“지우면 다시 빈칸이 생깁니다.”
에단이 철판을 내려다보았다. 황금빛이 이름 위를 지나갔지만 글자는 타지 않았다.
“이건 장부의 번짐과 다르다. 누군가 안쪽에서 새긴 것처럼 보인다.”
“안쪽만은 아닙니다.”
발밑의 종줄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폐갱도 안쪽에서 종이 두 번 울렸다. 짧은 소리 두 개였다. 하렌이 보냈던 신호와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모방 목소리의 말보다 일정했다.
마렌의 이름이 적힌 철판을 상자에 넣을 수도 없었다. 숨기면 그녀를 고립시키고 그대로 두면 목소리와 연결된 표식을 보존하는 셈이었다.
그때 첫 봉인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기록이 있다.”
카일의 손바닥 문양이 벌어졌다.
더 깊은 곳에서 무거운 종이 한 번 울렸다.
마렌은 이름을 기억했지만 철판의 글자는 지워지지 않았다.
카일은 그녀를 뒤로 물리지 않았다. 이름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대신 레오나에게 검을 들게 하고 에단에게 문 가장자리를 비추게 했다.
“아무도 마렌을 혼자 두지 마십시오.”
그가 말했다.
“그리고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문 쪽으로 부르지 마세요.”
종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첫 봉인문이 아니라 발밑의 돌틈에서 들려왔다.
카일은 빈칸을 쓴 자가 이미 골짜기 안에 손을 넣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렌에게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