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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19화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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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이름을 빌려간 자

하렌의 종은 폐갱도 입구에 홀로 떨어져 있었다.

흰 재로 표시한 선은 입구 앞에서 끊겼고 종 아래의 먼지만 둥글게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방금 전까지 그곳에 있었다는 흔적이었다.

“하렌!”

주민 하나가 폐갱도 안을 향해 소리쳤다.

카일이 손을 들었다.

“부르지 마십시오.”

“안에 있으면 대답하게 해야 합니다.”

“저 안의 것은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대답하는 척하며 이름을 가져가는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장부 천막에서 마렌의 외침이 터졌다.

“교주님! 하렌의 이름이 더 번집니다!”

카일은 천막으로 달려갔다. 마지막 줄에 적힌 하렌이라는 글자가 검은 물에 젖은 것처럼 퍼지고 있었다. 잉크는 종이의 결을 타고 다른 기록으로 올라갔다.

에단이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태워 버리자.”

“불에 타는 건 장부가 아니라 기록을 본 사람들의 기억일 수 있습니다.”

카일은 마렌에게 칼을 건넸다.

“하렌의 줄만 떼어 내세요. 다른 기록과 닿지 않게 철판 위에 올립니다.”

종이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밑면에 검은 실이 달라붙어 있었다.

레오나가 검을 뽑으려 하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칼로 자르면 안 됩니다. 하렌을 마지막으로 본 사실을 말하세요. 이름만 부르지 말고.”

마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렌은 전투가 끝난 뒤 종을 한 번 울렸습니다. 대답할 수 있다는 신호였습니다.”

검은 실이 움찔했다.

에단이 뒤를 이었다.

“감독 제조분을 마신 뒤 안정 시 호흡은 스물여덟이었습니다. 기침 뒤에는 서른까지 올랐습니다.”

실이 조금 물러났다.

레오나가 말했다.

“그는 폐갱도 입구 감시를 맡았고 혼자 들어가라는 명령은 받지 않았다.”

검은 글자의 끝이 가늘어졌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번짐은 멎었다.

카일은 그 변화를 보았다. 이름만 불렀을 때는 퍼졌다. 사람이 하렌을 보았던 시간과 행동을 말하자 멈췄다.

‘이름이 아니라 이름에 붙은 사람을 끌고 가려는 건가.’

파멸의 별이 가슴 안쪽에서 낮게 웃었다.

―이름은 껍질이다.

‘껍질을 벗기면 안쪽도 먹을 수 있다는 말이지.’

―안쪽이 비어 있으면 더 쉽게 삼킬 수 있다.

카일은 장부 아래에서 폐갱도 쪽으로 뻗은 검은 선을 발견했다. 누군가 기록을 길잡이로 삼아 돌아갈 길을 만든 것처럼 보였다.

그때 입구에서 종이 한 번 울렸다.

“이건 안쪽에서 온 신호가 아닙니다.”

에단이 물었다.

“어떻게 알지?”

“하렌의 종은 감시 위치에서 세 번 울리면 부상자를 뜻했습니다. 한 번은 대답할 수 있다는 뜻이었고요. 지금 소리는 너무 가깝습니다.”

종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울림은 계속됐다.

“누군가 종을 치는 게 아니라 종소리를 빌리고 있습니다.”


마렌은 새 장부를 펼쳤다.

“이름을 더 적으면 위험해지는 것 아닙니까?”

“적지 않으면 더 위험합니다.”

카일은 철판 위의 하렌 기록을 눌렀다.

“이름이 혼자 남아 있으면 저것이 마음대로 가져갑니다. 누가 언제 무엇을 보았는지 연결해야 합니다.”

에단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그 규칙을 확신하는 건가?”

“확신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기록입니다. 검증하면 됩니다.”

마렌은 하렌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들을 불렀다. 주민들은 이름 옆에 자신이 확인한 사실과 시간을 적었다.

“전투가 끝났을 때 하렌은 환자 천막 북쪽에 있었습니다.”

“한 번 종을 울린 뒤 손을 들었습니다.”

“종을 쥔 채 폐갱도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말이 이어질수록 하렌의 이름에서 번진 잉크는 움직이지 못했다.

이건 기적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같은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고 장부는 그 기억을 붙잡는 도구였다. 이름을 지키는 힘이 있다면 별이 아니라 사람 쪽에서 나오는 힘이어야 했다.

레오나가 입구를 보았다.

“안쪽에서 세 번 울렸습니다.”

이번에는 소리가 달랐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이가 길었고 마지막 종소리는 낮게 끌렸다.

카일은 하렌이 부상자를 알릴 때 쓰던 세 번의 신호를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소리는 정해진 간격을 흉내 내다가 끝에서 흔들렸다.

“진짜일 수도 있고 미끼일 수도 있습니다.”

에단이 봉인 상자를 닫았다.

“확인해야 한다. 단 혼자 들어가지는 마라.”

“문을 열지는 않습니다. 첫 봉인문 앞까지만 갑니다.”

카일은 레오나에게 로프를 건넸다.

“저와 함께 오십시오. 에단 사제님은 문 가장자리만 비추세요. 마렌은 바깥에서 이름과 증언을 계속 적습니다.”

레오나는 카일의 떨리는 오른손을 보고 로프를 자신의 허리에 묶었다.

“문 앞에서 네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도 대답하지 마라.”

“그건 제가 정할 일입니다.”

“아니. 오늘은 내가 정한다.”


흰 재의 선은 입구에서 끊겨 있었다. 마렌은 그 앞에 새 선을 긋지 않고 로프의 매듭마다 작은 철 조각을 달았다. 재가 지워져도 돌아올 수 있게 하려는 표식이었다.

카일이 통로로 들어섰다. 에단의 황금빛은 벽 전체가 아니라 로프와 바닥만 따라갔다. 장부에서 이어진 검은 선이 통로 아래로 스며들고 있었다.

통로 끝에 첫 봉인문이 나타났다. 문 가장자리의 검은 밀랍은 지난번보다 넓게 퍼져 있었다. 닫힌 입 모양의 문양은 누군가 숨을 쉬듯 열렸다 닫혔다.

“하렌.”

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났다.

레오나가 검을 뽑았다.

“대답하지 마.”

“알고 있습니다.”

“카일.”

이번에는 에단의 이름이었다. 에단의 빛이 흔들리자 카일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사제님도 대답하지 마십시오.”

문 안쪽에서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카일. 하렌을 돌려줘.”

“무엇을 돌려달라는 거지?”

“이름.”

검은 밀랍이 문틈을 타고 흘러내렸다. 카일의 손바닥 문양이 뜨거워지며 손목의 선과 맞물렸다.

그 순간 안쪽에서 짧고 마른 기침이 들렸다. 하렌이 성수를 마신 뒤 남아 있던 기침과 같았다.

“교주님.”

이번 목소리는 약했다.

“열지 마십시오.”

문 안쪽의 목소리가 하렌의 말투로 이어졌다.

“제가 하렌입니다. 문을 열어 주십시오.”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종이 두 번 울렸다. 첫 번째는 짧았고 두 번째는 길었다.

“교주님. 이름을 말해 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레오나가 검을 세웠다.

“저건 하렌이 아니다.”

카일은 손바닥을 문에 대지 않은 채 몸을 낮췄다. 검은 선 끝에서 두 개의 기척이 겹쳐 있었다. 하나는 문 안쪽 깊은 곳에서 불규칙하게 떨렸다. 다른 하나는 문 바로 뒤에서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었다.

“하렌. 마지막으로 종을 쳤을 때 손에 무엇이 들려 있었지?”

문 안쪽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종입니다.”

“틀렸습니다. 그때 하렌의 손에는 붕대가 들려 있었습니다. 종은 허리끈에 매달려 있었죠.”

문 뒤의 기척이 크게 흔들렸다.

잠시 뒤 진짜 하렌의 기침이 들렸다.

“붕대는 마렌에게 돌려줬습니다.”

거친 숨이 이어졌다.

“교주님. 제가 하렌인지 묻지 마십시오. 그 질문을 하면 저것이 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카일은 하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그의 이름이 이미 문 안쪽에서 여러 번 불렸다는 것도 알았다.

에단이 낮게 말했다.

“문양의 밀랍이 움직인다.”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오래 버틴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이 있군요.”


검은 입 모양의 문양이 벌어졌다.

“하렌의 이름을 돌려주겠다.”

이번 목소리는 하렌을 흉내 내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속삭이는 것처럼 겹쳐 있었다.

“네 이름을 주면.”

레오나가 카일의 앞을 막았다.

“거래하지 마라.”

“거래가 아니라 미끼입니다.”

“네가 먹히면 미끼도 끝이다.”

에단의 빛이 문 가장자리를 눌렀다. 황금빛에 닿은 밀랍이 안쪽으로 말려 들어갔다.

“카일. 이 문양이 네 힘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사람의 이름은 내놓지 않을 겁니다.”

카일은 로프를 당겼다. 바깥에서 마렌의 대답이 돌아왔다.

“듣고 있습니다!”

“하렌의 이름과 기록을 읽으세요. 이름만 부르지 마십시오.”

마렌이 장부를 펼쳤다. 골짜기 바깥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렌은 감독 제조분을 마셨습니다. 안정 시 호흡은 스물여덟이었습니다.”

“전투 뒤 종을 한 번 울렸습니다. 폐갱도 입구 감시를 맡았습니다.”

“그는 쓰러지지 않았고 종을 쥔 채 안으로 걸어갔습니다.”

하렌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검은 밀랍이 움찔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문 안쪽으로만 빨려 들어가지 않았다. 장부의 글자와 목소리 사이에 얇은 황금빛이 걸렸다.

에단이 눈을 크게 떴다.

“사람들의 증언이 선을 붙잡고 있다.”

“선이 아니라 하렌을 붙잡는 겁니다.”

카일은 손바닥 문양에 힘을 밀어 넣었다. 문 전체를 삼키지 않고 하렌의 이름에 붙은 검은 잔재만 찾았다.

검은 선이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손목에 머물던 흔적이 팔꿈치를 지나 쇄골 아래로 올라갔다.

―놓아라. 저 이름만 먹으면 문 안쪽도 삼킬 수 있다.

‘하렌은 먹이가 아니야.’

―네 이름을 주면 된다.

‘내 것도 아니다.’

카일은 검은 잔재를 움켜쥐었다. 문 안쪽에서 하렌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교주님. 제 이름을 가져가십시오.”

카일의 시야가 흔들렸다. 진짜 하렌의 말인지 목소리의 흉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때 마렌이 장부를 읽었다.

“하렌은 전투가 끝난 뒤 쓰러진 광부의 이름을 먼저 확인했습니다.”

에단이 뒤를 이었다.

“자신의 호흡이 완치되지 않았다는 기록에도 동의했습니다.”

레오나가 검을 문틈에 박았다.

“그는 혼자 죽으러 들어갈 사람이 아니다.”

카일은 검은 잔재를 손바닥 안에서 비틀었다.

“돌려줘. 이 이름은 네 것이 아니야.”

검은 잔재 하나가 끊어지며 그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카일은 비명을 삼켰다. 목구멍 안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올라왔다.

“카일.”

새 장부의 한 줄에서 카일의 이름이 흐려졌다. 마렌이 적어 둔 글자는 번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비어 있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카일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증명하던 기록 하나가 없어졌다.

레오나가 그를 붙잡았다.

“멈춰.”

“조금만 더.”

“더 하면 네 이름이 아니라 네가 사라진다.”

문 너머에서 하렌의 기침이 터졌다. 이번에는 모방하는 소리가 따라오지 않았다.

“교주님.”

하렌이 말했다.

“제 이름은 아직 제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살아 있습니다.”

장부 위의 검은 번짐이 멎었다.

카일은 손바닥을 뒤집었다. 닫힌 입 모양의 문양은 작아졌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첫 봉인문도 열리지 않았다.

문 안쪽 깊은 곳에서 종이 울렸다.

한 번.

이번에는 하렌의 종이 아니었다. 더 깊고 무거운 종소리였다.

“두 번째 문이 열리기 전에 오지 마십시오.”

하렌의 말이 끝나자 두 번째 종소리가 울렸다.

문양의 검은 입이 아주 조금 벌어졌다.

목소리가 카일의 이름을 빌려 웃었다.

“다음에는 기록 없이 와.”

카일은 비어 버린 장부의 한 줄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이름을 되찾으러 가는 쪽이 자신인지 하렌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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