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18화: 이름을 아는 굶주림
골짜기에 남은 것은 승리의 함성이 아니었다.
에단의 황금빛 아래에서 주민들은 쓰러진 이들을 옮겼다. 마수의 돌껍질은 잿더미가 되었지만 그 안쪽에는 아직 따뜻한 검은 알갱이가 박혀 있었다.
카일은 레오나의 어깨에 기대 선 채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검은 선은 어깨에서 멈춘 듯 보였다. 손가락 끝의 감각은 둔했고 심장이 뛸 때마다 선이 한 번씩 조여 왔다.
“교주님께 무릎을 꿇으십시오.”
누군가 외쳤다.
한 사람이 무릎을 꿇자 곁의 주민들도 몸을 낮췄다. 카일은 손을 들어 올렸다.
“일어나십시오.”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골짜기 곳곳으로 퍼졌다.
“무릎 대신 이름을 말하세요. 살아 있는 사람과 다친 사람의 위치부터 확인합니다.”
마렌이 장부를 펼쳤다.
“이름.”
“도린입니다.”
“다친 곳은?”
“팔에 돌조각이 박혔습니다. 걸을 수 있습니다.”
마렌은 내용을 적고 다음 사람을 불렀다. 하렌은 창백한 얼굴로 종을 한 번 울렸다. 대답할 수 있다는 신호였다.
“기존 여유분은 다섯 잔입니다. 감독 제조분은 열한 잔이고 모두 남았습니다.”
“두 수레를 떨어뜨려 놓고 봉인도 따로 하세요.”
카일은 대답하다 손을 움켜쥐었다. 손바닥 안쪽에서 낯선 문이 열리는 감각이 지나갔다.
―카일.
이번에는 소리가 아니라 맥박 속에서 이름이 울렸다.
카일은 폐갱도 입구를 보았다. 잿빛으로 마른 검은 길은 대부분 끊겼지만 하나만 가느다랗게 움직였다.
레오나가 그 앞을 막아섰다.
“아직 남았습니다.”
에단이 카일의 손을 보았다.
“네 팔의 흔적도 남아 있다.”
“검사는 나중에 하시죠.”
“계속 나중이라고 넘길 생각인가?”
“지금 비명을 지르면 주민들이 다시 무릎을 꿇을 겁니다. 사제님도 그건 원하지 않으시겠죠.”
에단은 반박하지 못했다. 폐갱도 쪽에서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톡.
잠시 뒤 한 번 더.
톡.
“레오나. 에단 사제님. 저와 함께 오십시오.”
“주민을 남겨 두고?”
“마렌이 있습니다. 선이 다시 움직이면 하렌이 세 번 칠 겁니다.”
카일은 어둠을 바라보았다.
“돌아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폐갱도 입구에 흰 재가 다시 이어졌다. 카일은 방벽처럼 두껍게 쌓지 않고 발이 지나간 곳을 알아볼 만큼만 가늘게 그었다.
에단은 일정한 간격으로 황금빛을 띄웠고 레오나는 빛이 닿지 않는 벽과 천장을 살폈다.
“돌아올 길을 남기는 건가?”
에단이 물었다.
“돌아올 생각이 없으면 사제님을 데려오지도 않았습니다.”
검은 선은 바닥 틈을 지나 북쪽으로 굽었다. 마수의 발톱 자국과 달리 흙이 일정한 간격으로 끌려 있었다.
레오나가 무릎을 굽혔다.
“무언가가 몸을 끌고 지나갔습니다.”
통로 끝에서 에단의 빛이 돌문 하나를 드러냈다. 암반과 이어진 문 가장자리에는 사람이 다듬은 홈이 있었고 그 틈에 검은 밀랍이 눌어붙어 있었다.
카일의 목이 말라 갔다.
“알고 있는 흔적인가?”
“봉인을 건드리면 안 되는 곳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어디서?”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카일은 말을 끊었다. 검은 밀랍은 문을 잠그는 재료라기보다 문을 열고 싶어 하는 손의 흔적에 가까웠다.
에단이 바닥의 흙을 걷어 냈다. 타원 안에 세 줄이 그어진 문양이 나타났다. 가운데 선은 칼로 긁혀 끊겨 있었다.
“고대 광산의 경고 표식은 아니다.”
“그럼요?”
“입을 닫으라는 뜻처럼 보인다. 확정은 못 한다.”
돌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일.”
레오나가 검을 뽑았다. 에단의 황금빛이 문 가장자리를 덮었다.
“누구냐?”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검은 밀랍만 젖은 살처럼 꿈틀거렸다.
“카일.”
이번에는 더 가까웠다.
“대답하지 마십시오.”
에단이 낮게 말했다.
“이름을 불렀을 뿐이다. 네가 그 존재를 안다는 뜻은 아니다.”
“제 이름을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네가 그렇게 말하면 더 이상해지는군.”
카일은 한 걸음 물러났다. 문 안쪽의 굶주림이 움직임을 따라왔다.
―문을 열어라.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싫어.’
―이름을 먹으면 목소리가 멎는다.
‘이름을 먹으면 내가 저것과 같아진다.’
에단이 문을 향해 물었다.
“무엇을 원하나?”
돌문 아래의 검은 선이 꿈틀거렸다.
“돌려줘.”
“무엇을?”
“이름.”
카일의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검은 흔적이 손가락 사이로 갈라졌다.
“나는 누구의 이름도 가져가지 않았어.”
돌문 안쪽에서 웃음 같은 소리가 났다.
“거짓말.”
카일은 문 앞에 흰 재를 한 줄 더 그었다.
“내 이름을 이미 알고 있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카…”
일부러 음절 하나만 내뱉고 입을 닫았다.
검은 밀랍이 문에서 떨어졌다. 바닥에 닿기 전 실처럼 늘어나 카일의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타원 안에 닫힌 입 같은 문양이 피어났다.
―더 줘.
카일의 무릎이 꺾였다. 레오나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교주님.”
“빛을 문양에 대지 마십시오.”
에단이 눈을 좁혔다.
“네 손을 태울 수도 있다.”
“문 가장자리만 막아 주세요. 저도 무엇인지 모릅니다.”
에단은 빛을 문양이 아니라 손목과 바닥 사이로 흘려 보냈다.
돌문 안쪽에서 낮은 숨이 새어 나왔다.
“에단.”
“대답하지 마십시오!”
카일이 외쳤다.
에단이 입을 다물자 검은 선이 흰 재를 넘어 발끝으로 뻗었다. 레오나가 검끝으로 선을 잘라 냈다. 칼날이 닿은 자리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건 네 힘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끊으십시오.”
―문을 통째로 삼켜라.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카일은 손바닥의 문양을 보았다. 닫힌 입이 조금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의 이름은 먹지 마.’
―이름이 있어야 찾을 수 있다.
‘찾는 것과 먹는 건 다르다.’
카일은 팔로 들어온 힘을 돌문 전체로 밀어 넣지 않았다. 손바닥과 바닥 사이에 좁은 고리를 만들어 문 앞에만 묶었다.
돌문 위쪽이 흔들렸다. 레오나는 쇠막대를 문틈에 박았다.
“더 버티면 무너집니다.”
“문이 열리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에단도 황금빛을 문양의 가장자리로 좁혔다. 빛이 검은 선을 태우지 않고 움직임을 늦췄다.
카일은 손바닥을 돌문에 대지 않은 채 말했다.
“내 이름을 먹지 마. 에단과 레오나의 이름도 먹지 마. 골짜기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숨과 이름도 건드리지 마.”
굶주림이 뒤틀렸다. 문양의 틈이 조금씩 닫혔다.
“돌려줘.”
“누구에게서 빼앗았는지부터 말해.”
질문이 끝나자 어둠이 깊어졌다.
“하렌.”
이름 하나가 흘러나왔다.
카일은 숨을 멈췄다. 목소리는 그 이름을 오래 기다린 열쇠처럼 말했다.
레오나가 검을 들었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대답 대신 금속이 세 번 울렸다.
톡.
톡.
톡.
카일은 손바닥의 문양을 주먹으로 눌렀다. 검은 선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나갑니다.”
에단이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가야 한다. 저것이 이름을 부르는 규칙을 알기 전에는 아무도 더 주지 않는다.”
돌문 아래에서 검은 계단 하나가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골짜기에서는 폐갱도를 불태우자는 말과 돌로 막자는 말이 부딪혔다.
“불을 던지면 안쪽까지 태울 수 있습니다.”
“공기가 환자 천막으로 흐르면 사람부터 죽습니다.”
카일은 두 의견을 모두 듣고 고개를 저었다.
“폐갱도는 봉쇄하되 감시합니다. 출입자는 이름을 적고 두 명씩 움직이세요. 혼자 들어가지 않습니다.”
마렌은 장부에 출입 시간과 동행자 칸을 만들었다. 기존 여유분 다섯 잔과 감독 제조분 열한 잔은 서로 다른 천막으로 옮겼다.
누구도 물자를 먼저 가지러 가지 않았다. 마렌은 부상자 명단을 확인한 뒤 수레의 봉인을 살폈고 주민들은 서로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카일은 그 순서가 마음에 들었다. 기적이 끝난 뒤에도 남는 것은 별빛이 아니라 사람이 정한 순서여야 했다.
에단은 검은 밀랍 조각을 봉인 상자에 넣었다.
“이 증거는 내가 보관한다.”
“수도에 보내실 겁니까?”
“보내기 전에 확인할 것이 있다.”
에단은 카일의 소매 아래를 보았다.
“네 손바닥의 문양은 신전 기록에 없다.”
“그럼 사제님 장부에 새로 적으십시오.”
“그 문양이 너를 부르면?”
카일은 손을 감췄다.
“부르는 쪽이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게 해야죠.”
해가 기울 무렵 하렌은 폐갱도 입구 감시를 맡았다. 마렌은 출입 명단 첫 줄에 그의 이름을 적었고 하렌은 종을 손에 쥐었다.
카일이 천막으로 돌아서려는 순간 종이 한 번 울렸다.
대답할 수 있다는 신호였다.
잠시 뒤 두 번 울렸다. 손이 떨린 탓인지 간격이 일정하지 않았다.
레오나가 입구로 달려갔다. 하렌은 보이지 않았다. 흰 재의 선은 폐갱도 앞에서 끊겼고 종만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마렌의 장부에서 하렌의 이름이 번졌다. 잉크가 검게 퍼져 종이 뒷면까지 스며들었다.
폐갱도 안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렌.”
카일은 손바닥의 닫힌 문양이 다시 벌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이름을 돌려달라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이름을 가져갔다는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