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16화: 허풍과 강림
레오나의 무릎이 흙 속으로 반쯤 박혔다.
거대한 마수의 앞발이 그녀의 검을 짓누르고 있었다. 돌껍질 사이에서 검은 진액이 흘러나와 칼날을 타고 손목까지 번졌다.
“세 번째 재의 선까지 물러나십시오. 놈을 그쪽으로 끌고 가세요.”
카일이 외치자 레오나는 검을 비틀어 발톱을 밀어냈다. 그녀가 뒤로 물러나자 마수는 눈 없는 얼굴을 들고 따라왔다. 턱 사이의 검은 핵이 세 갈래로 뛰었다.
에단의 황금빛이 마수의 옆구리를 때렸다. 돌껍질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놈은 멈추지 않았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의 검은 선을 비추십시오.”
“빛을 지휘할 생각까지 하는군.”
“사제님은 저걸 태울 수 있지만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묶으려는 겁니다.”
산비탈의 눈들이 하나둘 움직였다. 검은 길을 따라 내려오는 무리가 광산 터로 모이고 있었다. 주민들은 서로의 팔을 붙잡고 어디로 달아나야 할지 찾았다.
카일은 임시 제단과 환자 천막 사이에 남은 흰 재를 보았다. 선은 지워지고 있었지만 세 갈래의 흔적은 아직 남아 있었다.
“마렌. 남은 재를 세 번째 선 바깥으로 이어 주세요. 성수와 식량은 한곳에 두지 말고 광산 터 양쪽에 나눠 놓습니다.”
“마수를 유인하려는 건가요?”
“유인할 겁니다. 흰 재가 마수를 막는다고 말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게 하는 길이라고 하십시오.”
카일은 광산 수레와 물이 담긴 대야를 가리켰다.
“수레는 좁은 입구에 세우고 대야와 낡은 철판은 바깥쪽에 놓습니다. 횃불은 일곱 곳에 나눠 두세요. 싸울 수 있는 사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하렌이 기침을 참으며 종을 들었다.
“제가 신호를 맡겠습니다.”
“앞에 세우지는 마십시오. 두 번이면 이동이고 세 번이면 모두 고개를 듭니다.”
카일은 에단을 돌아보았다.
“광산 터의 안개를 일곱 지점으로 나눠 비춰 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이어 붙이겠습니다.”
“무엇을 하려는 거지?”
카일은 새벽이 오기 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을 띄웁니다.”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다.”
“농담이 아니라 허풍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허풍은 준비가 필요하지요.”
환자 천막 쪽에서 낮은 울음이 울렸다. 거대한 마수가 레오나를 밀어내며 재의 선 안으로 한 발을 들였다.
에단의 입술이 굳었다.
“내가 네 연출에 빛을 빌려주면 신전의 권능을 사기에 쓰는 셈이다.”
“그럼 사기가 아니라 방어 작전이라고 기록하십시오. 지금은 기록할 사람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실패하면 가장 먼저 너를 묶는다.”
“성공하면요?”
“그때도 묶는다.”
“공정하군요.”
카일이 웃었다.
광산 터로 이어지는 길에 일곱 개의 횃불이 세워졌다.
마렌은 주민들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름을 들으면 한 곳씩 켭니다. 옆 사람이 넘어지면 불보다 사람을 먼저 잡으세요.”
광부들은 낡은 철판을 들고 물 대야 뒤에 섰다. 표면에는 곡괭이 자국과 녹이 남아 있었다. 완벽한 반사면은 필요하지 않았다. 빛이 찢어지고 사람들이 같은 방향을 보게 되면 충분했다.
레오나는 마수의 앞발을 흘려 보내며 뒤로 움직였다. 마수가 따라올 때마다 검은 핵이 흔들렸다. 그 움직임은 배수로에서 올라온 검은 길과 맞물렸다.
“조금만 더. 세 번째 선까지.”
“그 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준비한 길이 있습니다.”
“당신이 준비한 길이 아니라요?”
카일의 목이 잠깐 굳었다.
“사람들이 손을 움직이지 않으면 제 길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레오나는 검으로 마수의 턱을 걷어 올렸다. 놈이 균형을 잃은 순간 광부들이 수레를 밀어 좁은 입구에 걸쳤다.
첫 번째 횃불이 켜졌다.
에단의 황금빛이 안개를 스쳤다. 빛은 철판에 부딪혀 물 대야에 번졌고 대야의 표면은 무너진 벽을 향했다.
두 번째 횃불이 켜지자 마수가 몸을 틀었다. 검은 핵이 빛이 닿지 않는 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세 번째 횃불과 함께 하렌의 종이 두 번 울렸다. 환자 천막 뒤쪽의 사람들이 침상을 붙잡고 움직였다. 아무도 빈 길을 막지 않았다.
에단이 네 번째 빛을 쏘았다.
카일은 빛이 닿은 지점을 이어 보았다. 그는 그 빈 공간에 환각을 밀어 넣었다.
검은 하늘 위에 작은 빛이 피어났다.
“고개를 드십시오.”
카일이 외쳤다.
마렌이 같은 말을 주민들에게 전했다. 하렌의 종이 세 번 울리고 에단의 황금빛이 마지막 지점을 찔렀다.
일곱 개의 불씨가 긴 꼬리를 만들었다. 안개 속에서 다섯 개의 끝이 펼쳐졌다. 산 위에 거대한 별이 떠올랐다.
주민들의 숨이 한꺼번에 멎었다.
마수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돌껍질 아래 묻혀 있던 검은 핵이 별 모양의 윤곽을 따라 떠올랐다.
“이건 환각인가?”
에단이 중얼거렸다.
“사제님은 무엇으로 보십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마라.”
“사람들은 이미 답을 골랐습니다.”
카일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별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길을 잃은 사람에게 길을 보여 주러 내려오는 겁니다.”
누군가 그 말을 따라 했다. 곧 다른 목소리가 겹쳤다.
“길을 보여 주러 내려온다.”
카일의 심장 안쪽에서 검은 불꽃이 일렁였다.
―열어라.
‘아직 아니야.’
―저들은 길을 원한다.
‘길만 보여 주면 돼.’
그때 거대한 마수가 몸을 들었다. 별빛에 드러난 검은 핵이 세 갈래로 벌어졌다. 놈은 환각을 무시한 채 앞으로 달려들었다.
레오나가 검을 들어 턱을 막았지만 충격에 뒤로 밀렸다. 마수가 별의 그림자를 물어뜯자 하늘의 빛이 크게 흔들렸다.
카일의 시야가 한쪽부터 검게 물들었다.
에단의 빛은 마수의 머리와 앞발을 눌렀고 레오나는 검을 세워 턱을 비껴 냈다. 하지만 광산 터 바깥의 작은 마수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별을 띄운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카일은 오른손을 보았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검은 선이 손목을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더 열면 모두 먹을 수 있다.
‘사람도 그 길 안에 있어.’
―그럼 사람을 먼저 먹지 않게 명령해라.
카일은 임시 제단 아래의 검은 길을 떠올렸다. 배수로에서 광산 터로 이어진 선 하나가 거대한 마수의 가슴까지 들어가 있었다.
그는 별의 중심을 그 선 위에 고정했다.
“사람의 숨은 먹지 마.”
카일이 낮게 말했다.
“검은 길만 먹어. 내가 정한 핵만.”
별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일이 손바닥을 펼치자 거대한 별의 꼬리 하나가 땅을 향해 늘어졌다. 환각의 빛에 검은 불꽃이 섞였다.
에단이 숨을 삼켰다.
“카일. 지금 네가 무엇을 했지?”
“빛의 중심을 잡아 주십시오.”
“그건 내 질문이 아니다.”
“나중에 장부에 적으세요.”
카일은 레오나를 보았다.
“세 번째 선 안으로 한 걸음만 더 끌어오십시오.”
레오나는 마수의 눈 없는 얼굴에 검을 꽂았다. 돌껍질이 갈라지고 검은 진액이 쏟아졌다. 놈이 고개를 젖힌 순간 레오나는 온몸으로 앞발을 밀어냈다.
“지금입니다!”
검은 별의 꼬리가 마수의 가슴에 박혔다.
카일의 머릿속으로 굶주림이 쏟아졌다. 마수의 분노와 폐갱도의 습기, 오래된 봉인이 무너질 때 남은 공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의 시야에 광산 터 대신 수많은 검은 문이 나타났다.
―열어라.
‘닫아.’
―내가 먹으면 닫힌다.
‘사람까지 삼킬 거잖아.’
카일은 마렌을 보았다. 그녀는 주민들의 이름을 부르며 대야를 옮기고 있었다. 하렌은 기침을 삼킨 채 종을 쳤다. 두 번. 다시 세 번.
사람들의 목소리가 별 아래에서 이어졌다.
“마렌.”
“하렌.”
“토마스.”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검은 굶주림 사이로 박혔다.
“그 이름들은 먹지 마.”
검은 꼬리가 마수의 핵을 감쌌다. 세 갈래로 뛰던 핵이 한 점으로 좁아지고 마수의 턱이 닫혔다. 배수로에서 광산 터로 이어진 검은 선 일부가 잿빛으로 말라붙었다.
카일의 손목까지 검은 선이 번졌다.
그는 비명을 삼켰다. 고통보다 끔찍한 것은 입 안에서 낯선 이빨이 자라는 듯한 감각이었다.
“저 힘은 빛이 아니다.”
에단이 말했다.
“지금은 구분하지 마십시오. 저걸 묶어야 합니다.”
에단은 의심하면서도 빛을 거두지 않았다. 황금빛이 별의 가장자리를 붙잡자 환각이 흩어지는 속도가 늦어졌다.
작은 마수 몇 마리가 뒤로 물러났다. 산비탈의 무리는 여전히 내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별이 골짜기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민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교주님. 별께서 오셨습니다.”
카일은 숨을 몰아쉬며 손을 들었다.
“무릎 꿇지 마십시오. 이름을 부르세요. 누구를 옮겼는지 누구를 찾았는지 말하십시오.”
마렌이 그 말을 받아 외쳤다. 주민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공포에 잠식되던 군중이 다시 역할을 찾았다.
하렌의 종이 두 번 울렸다. 북쪽 수레 옆에 쓰러진 광부의 이름이 불렸다. 세 번 울리자 에단의 빛이 서쪽 벽으로 이동했다.
카일은 별 아래에서 마수들의 핵을 살폈다.
검은 핵들은 제각기 뛰고 있지 않았다. 얇은 실 같은 선이 핵과 핵을 잇고 있었다. 선들은 광산 터 아래로 모였다가 폐갱도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듯했다.
그 끝에 문처럼 벌어진 틈이 보였다.
눈물 시료와 배수로에서 보았던 모양이었다. 지금은 별의 표면에도 같은 금이 생겨 있었다.
―더 열어라. 문을 통째로 먹으면 골짜기는 조용해진다.
‘조용해지는 게 아니라 비어 버리겠지.’
―비어야 굶주림이 끝난다.
‘사람이 남아 있어야 내가 이긴 거야.’
카일은 별의 중심을 더 밝히지 않았다. 힘을 끌어내면 산비탈의 마수까지 삼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안에 무엇이 섞일지는 알 수 없었다.
에단이 곁으로 다가왔다.
“저 별은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지?”
“모릅니다.”
처음으로 카일의 목소리에서 허풍이 빠졌다.
“그럼 당장 내려라.”
“내리면 저것들이 다시 움직입니다.”
“유지하면 네가 무너진다.”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별빛 아래에서 거대한 마수의 핵이 다시 뛰었다. 산비탈의 눈들도 동시에 광산 터를 향했다.
“레오나. 저 핵이 움직이면 세 번째 선을 지키세요. 환자 천막으로는 한 발도 들이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에단은 빛을 거두지 마세요.”
“네가 나를 명령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 마지막을 오래 유지해 주십시오.”
거대한 별이 한 번 맥박쳤다.
그 아래에서 산비탈 곳곳의 검은 핵이 동시에 눈을 떴다.
카일은 손목까지 번진 검은 선을 움켜쥐었다.
“좋아. 이번에는 네가 먹을 것을 내가 골라.”
별의 균열이 문처럼 벌어졌다.
그리고 골짜기 전체의 마수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