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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14화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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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검은 길의 발자국

새벽 종이 세 번 울리기 전에 에단의 천막에서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서기관. 이리 와라.”

카일은 임시 제단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조리 막사와 신전 천막 사이에 선 호위병들이 동시에 몸을 돌렸다. 붉은 천으로 싸인 상자는 밤새 에단의 침상 옆에 놓여 있었다.

상자의 밀랍 봉인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에단이 유리병을 들어 올리자 안에서 검은 실이 천천히 몸을 틀었다.

어제는 병 벽 아래쪽에 작은 원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은 원의 한쪽이 벌어져 가느다란 틈이 생겼다. 실이 물속에서 문처럼 구부러졌다.

“봉인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서기관이 말했다.

“병을 흔들었나?”

“옮길 때 손바닥에 올린 것뿐입니다.”

에단은 대답 대신 손끝에 황금빛을 모았다. 빛이 유리병을 감쌌다. 검은 실은 잠깐 떨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틈만 조금 더 벌어졌다.

카일의 목 안쪽이 말랐다.

‘네가 이걸 움직였어?’

―나는 만지지 않았다.

파멸의 별의 목소리는 낮았다.

―굶주림이 스스로 길을 찾은 것이다.

‘그 말은 아무 도움도 안 돼.’

―도움은 네가 만들고 있다. 길도 네가 만들었다.

하렌이 깨어 있었다. 동료의 어깨를 빌려 앉은 그의 호흡은 어제보다 느렸다. 하지만 기침이 터질 때마다 목의 검은 줄이 다시 짙어졌다.

“호흡은 분당 스물여덟.”

마렌이 말했다.

“어제보다 두 번 줄었습니다. 다만 기침 뒤에는 서른까지 올라갑니다.”

에단은 하렌의 목을 살폈다.

“검은 줄은 남아 있다. 지금은 약을 더 먹이지 않는다.”

하렌의 동료가 고개를 들었다.

“숨이 다시 막히면요?”

“그때 상태를 확인하고 결정한다.”

“제조를 멈추면 남은 환자들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네가 말하는 남은 환자는 누구지?”

에단의 눈이 카일을 찔렀다.

“이름과 상태를 등록한 사람들입니다. 장부에 있습니다.”

“등록된 사람에게 약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새로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면 어제의 열두 잔이 오염되지 않았다는 것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카일은 유리병을 가리켰다.

“검은 실이 봉인 안에서 움직였다는 사실과 성수의 효과는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둘을 한꺼번에 기적이나 독이라고 부르면 환자에게도 기록에도 거짓말입니다.”

에단의 손이 멈췄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카일의 궤변보다 섞여 버린 사실이었다.

“네가 검증 방법을 제시해.”

“누가 물을 만졌는지부터 적습니다. 물이 지나간 길도 나눠야 합니다.”

“또 네가 만든 규칙인가?”

“사제님이 만든 감시를 쓸 수 있게 만드는 규칙입니다.”

에단은 잠시 생각하다가 서기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남아 있는 정상 항아리에서 한 잔 분량만 다시 만든다. 환자에게 바로 쓰지 않고 대조 시료로 봉인한다. 경로를 하나라도 놓치면 중단한다.”


마렌은 조리 막사와 임시 제단 사이에 흰 재를 뿌렸다.

재가 얇은 선을 만들었다. 우물에서 막사까지 한 줄. 막사에서 작업대까지 한 줄. 작업대에서 환자 천막까지 또 한 줄이었다.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이름을 말하고 선을 넘은 시간을 적겠습니다.”

마렌이 말했다.

“계량은 제가 맡고 기록은 서기관님이 맡으세요. 운반은 호위병 둘이 교대로 합니다.”

카일이 덧붙였다.

에단이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무엇을 하지?”

“마지막 의례와 확인입니다.”

“인형은 없다.”

에단의 천막 안에는 밀랍 인형과 눈물 시료가 봉인돼 있었다. 카일은 제단의 빈 자리를 보았다. 어제까지 별 모양 인형이 놓였던 곳에는 촛농 자국만 남았다.

“오늘은 인형을 쓰지 않겠습니다.”

레오나가 카일의 옆에 섰다.

“검증을 위해서입니까?”

“검은 실이 인형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카일은 작게 말했다.

“그 생각을 확인할 때까지는 인형이 없는 편이 낫습니다.”

레오나는 그것을 교주의 책임감으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손이 검자루에서 떨어졌다.

첫 번째 항아리는 에단이 직접 열었다. 물을 맑은 잔에 따르고 황금빛을 통과시켰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두 번째 항아리도 같았다.

신전 서기관은 항아리의 봉인 번호와 개방 시각을 적었다. 마렌은 물의 양을 재고 자신의 장부에 같은 숫자를 옮겼다.

호위병이 항아리를 들고 재의 선을 넘었다.

그때 레오나가 손을 들었다.

“멈춰.”

제단 아래쪽의 재가 끊겨 있었다. 선이 끊긴 자리는 돌판과 돌판 사이의 좁은 틈으로 이어졌다. 틈 가장자리에는 검은 가루가 눌어붙어 있었다.

에단이 무릎을 굽혔다.

“어제는 저곳을 확인하지 않았다.”

레오나는 검 끝으로 돌판을 밀었다. 돌이 움직이자 눅눅한 흙 냄새가 올라왔다. 그 아래에는 사람 하나가 손을 넣을 만한 배수로가 있었다. 안쪽 벽에는 검은 선이 길게 번져 막사 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카일은 배수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선의 끝에 젖은 흙이 뭉쳐 있었다. 그 위로 발뒤꿈치 자국이 반쯤 남아 있었다. 발끝은 지워졌고 뒤꿈치만 눌려 있었다.

“사람이 지나간 흔적입니다.”

레오나가 말했다.

“범인의 흔적이라고 쓰겠습니다.”

“아니요.”

카일이 막았다.

“배수로에 사람이 접근했다는 흔적이라고 적으세요. 주인을 모르는 발자국을 범인의 이름으로 바꾸면 기록이 아니라 선동입니다.”

“서기관. 발견 시각과 위치를 그대로 적어라. 가루는 채취하지 말고 주변을 먼저 봉인한다.”

“왜 가져가지 않습니까?”

카일이 물었다.

“네가 만지면 증거가 사라진다.”

“사제님이 만져도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만지지 않는다고 했다.”

에단은 호위병 둘에게 배수로 앞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마렌에게 깨끗한 판자를 가져오라고 했다.

“작업대는 이 위로 옮긴다. 조리 막사와 제단 사이의 바닥을 밟지 않는다.”

카일은 배수로의 어두운 안쪽을 보았다. 검은 선은 끊겨 있었지만 완전히 끝난 것 같지 않았다.

―길이 짧아졌다.

‘짧아진 게 아니라 우리가 본 거겠지.’


작업대는 배수로 위를 건너지 않는 높이로 설치됐다.

에단은 남아 있던 정상 항아리의 물을 다시 확인했다. 산엉겅퀴와 형광 이끼는 마렌이 세 번 털어 깨끗한 천에 올렸다. 백설탕은 서기관이 봉투의 봉인 번호를 읽은 뒤 계량했다.

주민들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았다.

“별이 울지 않으면 약도 사라지는 겁니까?”

어떤 여자가 물었다.

카일은 끓는 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별의 눈물이 약을 만드는지 확인하는 날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오늘은 누가 물을 고르고 누가 시간을 재고 누가 그릇을 옮겼는지 확인하는 날입니다. 확인할 수 없는 기적은 환자를 지키지 못합니다.”

마렌의 펜이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물이 식자 카일은 평평한 그릇을 받았다. 그는 손을 씻고 마지막 의례를 시작했다. 인형도 촛불도 없었다. 손바닥 아래에 맑은 물이 있었고 주변에는 사람들의 시선만 있었다.

“고통을 바치지 않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누군가의 눈물을 기적이라고 부르기 전에 무엇이 닿았는지 확인합니다. 오늘의 증명은 눈물이 아니라 손과 시간입니다.”

파멸의 별의 미세한 파동이 물에 스며들었다. 카일은 그 힘을 더 부르지 않았다. 검은 실이 길을 타고 들어올 수 있다면 힘을 크게 흔드는 일은 문을 여는 것과 같았다.

―조금만 더.

‘안 돼.’

―저들은 믿고 있다.

‘믿음으로 문을 열 생각 없어.’

카일은 마지막 문장을 삼켰다. 주민들은 그 침묵을 또 다른 계시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릇의 물은 맑았다.

에단이 황금빛을 비췄다. 검은 실은 나타나지 않았다. 서기관이 그릇을 들어 빛의 방향을 바꾸어도 마찬가지였다.

마렌은 제조 시각과 의례 시작·종료 시각을 나란히 적었다.

“즉시 오염 없음.”

에단이 말했다.

“장기 안전성은 확인되지 않음.”

카일이 덧붙였다.

“대조 시료로 봉인하십시오. 환자 투약용 재고에는 넣지 말고요.”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료를 환자에게 주지 않았고 하렌의 추가 투약도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은 상태만 본다. 호흡이 다시 나빠지면 그때 동의를 받고 결정한다.”

하렌의 동료는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검증되지 않은 잔을 서둘러 먹이는 순간 기록의 의미가 사라진다.

빈 제단에는 마렌의 장부와 에단의 시선이 남았다.


해가 기울 무렵 신전 천막에서 서기관이 뛰어나왔다.

“사제님. 눈물 시료를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에단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카일과 레오나도 뒤따랐다.

붉은 천과 상자의 봉인은 그대로였다. 에단이 뚜껑을 열자 유리병 안의 검은 실이 병 바닥에 닿아 있었다.

어제 생긴 틈은 더 길어졌다. 실의 양끝이 유리벽을 향해 벌어지며 문 모양을 만들었다.

“병을 열었나?”

“아닙니다.”

서기관이 고개를 저었다.

에단은 유리병을 천 위에 내려놓았다.

“대조 시료에는 검은 흔적이 없었다. 눈물 시료는 봉인 안에서 변했다.”

카일은 병과 자신의 빈 손을 번갈아 보았다. 자신의 장치가 들킬까 걱정했던 오전과는 다른 두려움이 올라왔다.

인형이 없어도 흔적은 움직였다.

“배수로를 신전으로 가져가실 겁니까?”

카일이 물었다.

“현장 봉인을 먼저 유지한다. 발자국과 검은 가루는 내일 다시 확인한다.”

에단이 말했다.

“그리고 너는 오늘 밤 조리 막사와 제단 사이를 벗어나지 마라.”

“저를 범인으로 묶으려는 겁니까?”

“범인으로 확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묶어 두는 것이다. 네가 증거를 만들 수도 없애 버릴 수도 있으니까.”

카일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호위병도 같은 조건으로 두십시오. 제단과 막사를 지키는 사람 모두 현장을 떠날 수 없게 하세요.”

에단은 잠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오늘 밤 누구도 배수로에 접근하지 않는다.”

마렌이 두 장부를 펼쳤다.

“발자국의 깊이와 발견자도 적을까요?”

“적으세요.” 카일이 말했다. “누가 봤는지까지 남겨야 나중에 장부가 사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에단은 새 밀랍을 받아 배수로 입구에 눌렀다. 자신의 인장을 찍지 않고 현장 기록 번호만 새겼다.

밤이 깊어지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카일은 임시 제단 앞에서 비어 있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인형은 에단의 천막 안에 있었다. 눈물은 자신이 만들었지만 울음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붉은 천 너머에서 유리 긁는 소리가 났다.

카일이 고개를 돌렸다.

에단의 천막 안쪽에서 황금빛이 한 번 번졌다가 꺼졌다. 곧 서기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제님. 틈이 더 벌어졌습니다.”

카일은 배수로 입구의 새 밀랍을 보았다. 봉인은 멀쩡했다. 젖은 흙 위의 발자국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검은 실은 다시 문을 만들고 있었다.

카일은 빈 제단의 촛농을 손끝으로 눌렀다.

다음에는 배수로의 끝을 찾아야 했다. 그곳에 누가 발을 디뎠는지 확인하지 못하면 성수도 장부도 환자도 다시 누군가의 길이 될 터였다.

그리고 그 길이 폐갱도 안쪽까지 이어져 있다면 카일은 오래전 어둠 속에서 보았던 검은 외투를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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