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계를 뒤흔든 오트쿠튀르 디자이너

4화: 낡은 천의 반격
리엔은 가봉된 드레스의 사선 솔기를 손끝으로 눌렀다.
푸른 실과 은사가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빛을 냈다. 하지만 겉면에는 아직 비어 있는 부분이 많았다. 보라색 실크만으로는 사선의 흐름을 받칠 안쪽 보강층도 부족했고 치맛자락을 정리할 장식도 남아 있지 않았다.
“셀레스트 하우스가 정말 수도의 자재를 전부 사들였나요?”
마레나가 물었다.
집사가 전한 소식은 단순한 품절이 아니었다. 고급 염료와 장식용 비단은 물론이고 은사와 보석 단추까지 셀레스트 하우스가 선점했다. 정통 코르셋을 입지 않은 사람은 무도회 입장을 제한한다는 소문도 퍼지고 있었다.
“전부는 아닐 거야. 사람들이 값이 붙은 것만 물건이라고 부르는 법이지.”
리엔은 드레스의 옆선을 다시 살폈다.
“창고를 열어 줘. 베르네가에 남은 천을 확인하겠어.”
“창고에는 오래된 연회 물품밖에 없습니다. 습기를 먹은 커튼과 얼룩진 식탁보뿐입니다.”
“쓸 수 없는 이유가 있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겠습니다.”
뒤편 창고의 자물쇠는 세 번이나 녹슬어 있었다. 문이 열리자 눅눅한 천 냄새와 오래된 밀랍 냄새가 흘러나왔다.
벽에는 연회용 커튼이 돌돌 말린 채 기대어 있었다. 바닥 상자에는 얼룩진 식탁보와 끝이 풀린 리본이 뒤섞여 있었다. 마레나는 한숨을 삼켰다.
“이걸로 무도회 드레스를 만들 수 있다고요?”
“겉감으로 쓰겠다고 한 적은 없어.”
리엔은 커튼을 펼쳤다. 겉은 누렇게 바랬지만 안쪽에는 희미한 광택이 남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결을 쓸자 한 방향에서는 까슬한 감촉이 느껴졌고 반대 방향에서는 섬유가 부드럽게 밀렸다.
“북부 마직이야. 상품 가치는 없어도 날실은 아직 버티고 있어.”
리엔이 세로로 잡아당기자 천은 팽팽하게 버텼다. 가로로 당기자 조금씩 밀렸고 사선으로 비틀자 손바닥에 부드럽게 감겼다.
“보라색 실크 안쪽에 넣어 사선 솔기의 힘을 나누는 층으로 쓸 거야.”
리엔은 얼룩이 적은 부분을 분필로 표시했다. 전체의 삼분의 일은 습기로 굳어 있었지만 나머지는 살릴 수 있었다.
“이 커튼은 세로 결로 네 폭. 식탁보 가장자리는 테이프로 만들고 리본은 은사와 겹쳐 쓴다.”
그때 창고 바깥에서 말발굽 소리가 멈췄다.
“셀레스트 하우스의 구매 담당입니다. 계약에 따라 원단과 부자재를 확인하러 왔습니다.”
짙은 회색 외투를 입은 하인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지만 시선은 리엔의 뒤편으로 미끄러졌다.
“계약서에 베르네가의 폐기 물품까지 적혀 있던가요?”
“독점 범위에는 향후 상품으로 사용될 수 있는 원단이 포함됩니다.”
“향후 상품인지 아닌지는 사용자가 판단합니다.”
리엔은 몸을 옆으로 비켜섰다. 얼룩진 천과 풀린 리본이 한눈에 드러났다.
“확인하세요. 폐기 예정 물품을 가져가겠다면 셀레스트 하우스의 운반 책임자와 서명을 함께 남겨 주세요. 납품 이력 없는 물품을 반출했다가 채무 목록에 섞이면 곤란할 테니까요.”
하인의 입가가 굳었다. 그는 창고를 둘러보았지만 리엔이 골라 둔 커튼은 낡은 식탁보 아래에 가려져 있었다.
“오늘은 목록만 대조하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주인의 허락 없이 창고 문을 열지 마십시오.”
하인이 물러난 뒤 집사는 걸쇠를 걸었다. 마레나는 손에 쥔 리본을 내려다보았다.
“아가씨는 저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셨네요.”
“가져갈 권리가 없다는 걸 알려 줬을 뿐이야. 이제 더 서둘러야 해.”
리엔은 커튼을 작업실로 옮겼다. 습기를 먹은 자국은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물에 오래 담그면 날실이 풀려요.”
“그래서 먼저 밀랍을 걷어 내고 짧게 여러 번 세척할 거야.”
마레나는 체에 거른 재를 미지근한 물에 풀었다. 리엔은 커튼을 사선으로 접어 가장자리부터 담갔다. 탁한 기름막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지금 당겨. 세로가 아니라 가로로.”
마레나는 천을 풀었다가 다시 당기는 동작을 반복했다. 굳은 부분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세 번의 세척이 끝났을 때 작업대 위에는 얼룩이 지워진 네 폭의 마직이 남았다.
색은 새것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연한 회색과 누런 청색이 섞인 표면은 오히려 보라색 실크와 잘 어울렸다.
리엔은 식탁보의 가장자리를 잘라 폭을 쟀다. 실밥을 풀자 안쪽에서 가는 은색 실이 드러났다.
“이건 장식용 테이프가 아니었어요. 가장자리를 받치는 보강선이에요.”
“그럼 폭을 다르게 나눠 줘. 어깨에서 허리로 내려오는 선은 넓게. 허리에서 옆선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얇게.”
마레나는 가봉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앞 중심도 조금 더 받쳐야 해요. 지금은 걸을 때 사선 솔기가 너무 크게 벌어져요.”
리엔은 즉시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른쪽 허리 아래가 한 박자 늦게 따라왔던 감각이 떠올랐다.
“어느 부분을 고치면 되지?”
“가슴 아래에서 옆선으로 내려오는 폭을 반으로 나눠 양옆에서 받치면 돼요. 길게 누르는 보강재보다 움직임이 덜 막힐 거예요.”
리엔은 표시된 선을 따라 손바닥을 눌렀다.
“좋아. 그 구조로 가자.”
마레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바늘을 집었다.
두 사람은 풀린 날실을 감아 폭이 다른 테이프로 만들었다. 은사 리본은 세 겹으로 겹쳤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가는 한 줄뿐이었고 나머지는 마직과 실크 사이에 숨겼다.
문제는 염색이었다.
리엔은 작은 시험 조각을 염액에 담갔다. 푸른 실을 풀어 물에 넣고 염료석은 옆에 두었다. 마력을 아주 조금 흘리자 색이 번졌지만 마직 표면에만 탁하게 달라붙었다.
“밀랍이 남았거나 마력이 직접 닿은 거야.”
리엔은 푸른 실 한 가닥을 염액에 먼저 담갔다. 실이 천천히 청색을 머금자 염료석의 온기를 손끝으로 조절했다. 마력의 방향을 실에서 물로 향하게 하자 마직 안쪽까지 가느다란 푸른 선이 스며들었다.
“색을 직접 밀어 넣지 않고 실을 매개로 옮기는 거예요?”
“그래. 낡은 섬유에는 힘보다 순서가 중요해.”
염색한 테이프를 말린 뒤 보라색 실크 안쪽에 대자 회색 마직 사이로 맑은 청색이 떠올랐다. 은사 리본이 빛을 받으며 가는 선 하나를 더했다.
리엔은 테이프를 가봉 드레스의 사선 솔기에 시침했다. 마레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바늘을 움직였다. 리엔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솔기의 벌어짐을 확인했고 마레나는 핀의 위치를 바꿨다.
첫 번째 시도에서는 허리 아래가 걸렸다. 두 번째에는 어깨선이 뒤로 당겼다. 세 번째에서야 치맛자락이 발목을 따라 부드럽게 흘렀다.
리엔은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돌았다. 가봉 드레스 안쪽에서 청색과 은빛이 번갈아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마직은 겉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몸을 가두던 힘을 여러 갈래로 흩어 주었다.
“정말 낡은 커튼으로 만든 게 맞나요?”
“낡았다는 건 한 번 쓰였다는 뜻이지. 다시 쓸 수 없다는 뜻은 아니야.”
마레나가 웃음을 터뜨린 순간 창고 쪽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집사는 창고 열쇠를 자신이 보관한다고 했다. 셀레스트 하우스의 하인은 이미 돌아갔다. 그런데 바닥에는 아까 보지 못했던 붉은 리본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마레나가 리본을 집어 들었다.
“이건 제가 옮긴 상자에 있던 겁니다. 매듭이 이상해요.”
리본 끝에는 세 겹으로 묶은 작은 매듭이 있었다. 매듭 사이에는 은실이 박혀 있었다. 리엔은 어머니의 작업실에서 발견한 노트 가장자리의 선을 떠올렸다.
“풀어 보자.”
리엔이 바늘 끝으로 첫 고리를 건드리자 리본 안쪽에서 작은 천 조각이 밀려 나왔다. 누렇게 변한 천에는 글씨가 남아 있었다.
푸른 실은 겉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문장은 거기서 끊겨 있었다. 아래쪽은 누군가 칼로 잘라 낸 듯 비어 있었다.
“이 글씨…….”
“어머니가 쓰던 글씨와 닮았어.”
리엔은 천 조각을 소매 안쪽에 넣었다.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작업실 노트와 같은 잉크 번짐이 남아 있었다.
복도에서 집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채권 대리인이 다시 왔습니다. 이번에는 셀레스트 하우스의 서류를 들고 왔답니다!”
마레나는 붉은 리본을 움켜쥐었다.
“또 창고를 뒤지려는 걸까요?”
리엔은 아직 꿰매지 않은 은사 테이프를 손에 감았다. 겉으로는 미완성이었지만 이 옷은 더 이상 빌린 장식과 시장의 고급품에 기대지 않았다. 버려진 천과 끊어진 실 그리고 두 사람의 판단으로 다음 선을 얻었다.
“이번에는 문을 열어 줘.”
“숨지 않으시게요?”
“우리에게 숨길 것은 드레스가 아니야. 누가 이 집의 천을 먼저 만졌는지 확인해야 해.”
마레나는 떨리는 손으로 리본을 허리띠 안쪽에 숨겼다. 문이 열리기 직전 그녀의 표정에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리엔은 가봉 드레스의 사선 솔기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물자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누군가 베르네가의 과거를 뒤지고 있다면 그 손이 닿은 곳부터 되짚어야 했다.
그 시작은 바로 눈앞의 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