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계를 뒤흔든 오트쿠튀르 디자이너

3화: 첫 가위질과 새로운 선
리엔은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나무 계단을 삐걱거리게 누르는 발소리가 드레스실 입구 근처에서 울렸다. 서쪽 벽장의 걸쇠가 흔들리며 마찰음이 서늘하게 퍼져 나갔다.
“아가씨…….”
마레나가 떨리는 손으로 소매를 쥐었다. 작업실 중앙에 놓인 돌 조각과 낡은 도구들이 불빛 아래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불부터 꺼.”
리엔은 낮게 속삭이며 등불의 덮개를 내렸다. 작업실 안이 순식간에 짙은 어둠에 잠겼다. 그녀는 소매 안쪽에 넣은 푸른 염료석 조각과 시험용 천을 손끝으로 단단히 눌렀다.
발소리가 계단 맨 위턱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리엔은 마레나의 손목을 잡고 어둠 속을 헤쳐 계단으로 발을 디뎠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도망치듯 숨는 대신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가야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리엔은 벽장 문 안쪽의 걸쇠를 손바닥으로 밀어젖혔다.
끼익.
어둠을 뚫고 쏟아진 드레스실의 노을빛에 먼지가 하얗게 부유했다. 벽장 바로 앞에 서 있던 채권 대리인이 놀라 반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늙은 집사 역시 눈을 크게 떴다.
“……베르네 양?”
대리인의 시선이 리엔의 손에 쥐인 낡은 가위와 옷감 부스러기로 향했다.
“내 옷장에서 무얼 찾는 거지?”
리엔은 차분하게 문턱을 넘어 드레스실 바닥을 밟았다. 뒤따라 나온 마레나는 고개를 숙인 채 벽장 문을 등 뒤로 닫아 걸었다.
“서쪽 별채의 처분 대상 목록을 실사하던 중이었습니다. 벽장 뒤에서 기척이 들려 확인하려던 것뿐입니다.”
대리인은 헛기침을 하며 서류철을 고쳐 쥐었다. 눈동자가 벽장 틈새를 훑으려 집요하게 움직였다.
“기한은 사흘 뒤 정오라고 분명히 밝혔을 텐데.”
리엔은 한 걸음 다가서며 대리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막아섰다.
“법률상 기한이 도래하기 전까지 이 저택의 모든 가구와 벽장은 베르네가의 사적 관리 하에 있어. 채권자가 저택의 문과 벽장을 마음대로 열 권리는 사흘 뒤 정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아.”
대리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저희는 담보물의 훼손 여부를 확인할 권리가 있습니다.”
“훼손? 나는 사흘 뒤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어머니가 남기신 옷을 정리하던 중이었어. 귀족의 사적인 드레스실을 동의 없이 수색하는 것은 제국 사교계의 명예 훼손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겠지.”
리엔의 음성은 낮았지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파리에서 무수한 계약서와 투자자들의 압박을 마주하며 단련된 단호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대리인은 리엔의 서늘한 청회색 눈동자를 마주 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병상에서 갓 일어난 유약한 귀족 영애의 눈빛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사흘 뒤 정오가 되면 본채와 별채의 모든 문은 저희의 권한으로 개방될 것입니다.”
“사흘 뒤에 다시 와. 그전에는 이 저택의 문턱 하나도 넘지 마.”
대리인은 짧게 목례한 뒤 몸을 돌렸다. 복도를 울리며 멀어지는 그의 구두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 때까지 드레스실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탁.
집사가 조용히 드레스실 문을 닫고 나가자 마레나가 바닥에 주저앉듯 깊은 숨을 내쉬었다.
“숨이 멎는 줄 알았어요. 아가씨, 대체 언제 그런 법률을 다 외우셨어요?”
“법을 다 외운 게 아니야.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지 않으면 상대는 없는 권리까지 만들어 낸다는 걸 알 뿐이지.”
리엔은 소매 안에서 천에 싼 푸른 염료석을 꺼내 작업대 구석의 작은 서랍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이제 방해꾼은 물러갔어. 우리에겐 사흘이 남아 있고 할 일은 산더미야.”
리엔은 바닥에 놓인 커다란 보라색 실크 드레스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수년 동안 방치되어 구김이 가고 광택이 바랬지만 섬유의 탄력과 무게감은 훌륭했다.
“마레나.”
“네, 아가씨.”
“너는 이 옷이 무도회에서 통할 거라고 생각해?”
마레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힘들어요. 지금 사교계는 황후 전속인 셀레스트 하우스의 양식이 지배하고 있어요. 허리를 갈비뼈가 부러질 만큼 조이고 치마를 거대한 종 모양으로 부풀리는 게 기본이에요. 이 옷은 유행도 한참 지났고 낡았어요.”
“그 유행이라는 게 누구를 위한 거지?”
리엔의 물음에 마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 옷이야. 의자에 편히 앉을 수도 없고 누군가의 부축이 없으면 계단도 오르내리지 못하지. 그건 옷이 아니라 사람을 가두는 새장이야.”
리엔은 드레스실 한쪽에 걸려 있던 낡은 칠판과 재단용 분필을 끌어당겼다.
“나는 몸을 조여서 실루엣을 억지로 만드는 옷을 만들지 않을 거야. 몸이 움직이는 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옷을 만들겠어.”
분필이 칠판 위를 미끄러지며 유려한 선을 그렸다. 허리를 가로지르는 딱딱한 수평선 대신 어깨에서 가슴을 지나 골반으로 사선 방향을 타고 부드럽게 흐르는 새로운 실루엣이었다.
마레나의 눈이 커졌다.
“이런 선은…… 본 적이 없어요. 코르셋 없이 이 선이 유지가 돼요?”
“직물의 결을 이용하면 가능해. 천을 직선으로 자르지 않고 결에 맞춰 사선으로 자르면 실크는 몸의 곡선에 맞춰 늘어나고 조여져. 바이어스 재단이야.”
리엔은 칠판을 톡톡 두드렸다.
“마레나. 나는 네게 단순한 하녀의 바느질을 시키려는 게 아니야. 나의 설계를 현실로 구현할 유일한 기술자로서 함께해 주길 바라는 거야.”
“제가…… 기술자요?”
“그래. 이 무도회에서 우리가 성공한다면 베르네가는 빚을 털어내고 독립된 쿠튀르 하우스를 열 거야. 그때 너를 하우스의 첫 공방장으로 임명하겠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네 이름을 건 바느질을 할 수 있게 해 줄게.”
마레나의 밤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귀족의 하녀로 태어나 늘 그림자처럼 이름 없이 남의 옷을 꿰매던 삶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걸린 공방장이라는 자리는 꿈조차 꿔 본 적 없는 미래였다.
마레나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손이 닳아 없어지더라도 해낼게요. 지시만 내려 주세요.”
“좋아. 그럼 첫 해체부터 시작하자.”
리엔은 날카로운 족집게와 실뜯개 칼을 들었다.
두 사람은 보라색 실크 드레스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옷 안쪽을 지탱하고 있던 딱딱한 고래수염 심지와 쇠로 만든 허리 보강재가 하나씩 뜯겨 나갔다. 무겁고 뻣뻣한 안감을 걷어내자 실크 본래의 유연하고 부드러운 드레이프가 손끝에 감겼다.
“안쪽 결이 아주 깨끗해요. 햇빛을 받지 않아서 변색도 거의 없고요.”
마레나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보고했다.
“겉면의 보라색은 너무 무거워. 안쪽의 맑은 원단을 겉으로 뒤집어 쓸 거야. 그리고 치맛자락을 여덟 폭의 사선 조각으로 나누어 재단한다.”
리엔은 넓은 재단대 위에 원단을 펼치고 자와 분필을 들었다.
숨소리조차 멎은 정적 속에서 분필이 원단 위를 달렸다. 리엔의 머릿속에는 서윤으로서 수천 번 그려온 인체 해부학적 곡선과 무게 중심의 계산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등 뒤에서 흐르는 견갑골의 곡선. 가슴 아래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굴곡. 억지로 조이지 않아도 걸을 때마다 다리의 움직임을 따라 파도처럼 물결치는 밑단.
사각, 사각.
가위날이 실크를 가르는 경쾌한 마찰음이 드레스실을 채웠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한 손놀림이었다. 낡은 원단은 여유분이 없었기에 단 한 번의 실수도 파멸로 이어질 수 있었다.
마레나는 숨을 삼키며 리엔의 가위질을 지켜보았다. 거침없는 재단선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 숨 쉬는 조각을 깎아내는 듯했다.
“마레나, 이 사선 솔기 사이에 아까 확인한 은사와 지하의 푸른 실을 꼬아서 함께 물려 줘.”
리엔이 지시하며 실타래를 건넸다.
“실을 솔기 안쪽에 넣으면 겉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데요?”
“가만히 서 있을 땐 단아한 실루엣만 보이지만 걸음을 뗄 때마다 사선 솔기가 벌어지며 은빛과 푸른빛이 번갈아 드러날 거야. 빛의 각도에 따라 색이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거지.”
마레나의 입가에 벅찬 미소가 번졌다.
“정말 굉장해요…….”
마레나는 곧바로 바늘을 쥐고 리엔이 잘라낸 원단 조각들을 시침핀으로 고정하며 굵은 땀으로 가봉을 엮어 나갔다. 그녀의 손놀림은 정확하고 빨랐다.
어느덧 창밖의 붉은 노을이 잦아들고 밤하늘에 별빛이 돋아났다.
탁자 위에 놓인 촛불이 일렁이며 가봉을 마친 드레스의 형태를 드러냈다. 아직 정식 봉제를 거치지 않은 가봉 상태였지만 그 자태는 이전의 무겁고 답답했던 옷과는 완전히 달랐다. 허리를 짓누르는 코르셋 없이도 유려하게 떨어지는 곡선이 마치 밤안개처럼 부드러웠다.
리엔이 마레나의 도움을 받아 가봉된 드레스를 자신의 몸에 둘렀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낯설 만큼 매혹적이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가 자유롭게 팽창했고 발을 내딛자 치맛자락이 물 흐르듯 가볍게 발목을 감쌌다.
“완벽해. 이 구조라면 충분히 통할 수 있어.”
리엔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드레스실 문이 조급하게 두드려지더니 집사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들어왔다.
“아가씨, 큰일이 났습니다.”
“무슨 일이죠?”
집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교계의 전언을 전했다.
“로제트 공작부인의 후원을 받는 셀레스트 하우스에서 이번 봄 무도회를 앞두고 수도의 모든 고급 염료와 장식용 비단, 보석 단추를 독점 구매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귀족 영애들에게 셀레스트의 정통 코르셋 양식이 아닌 옷을 입고 오면 무도회 입장을 제한하겠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마레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우리 같은 낡은 옷을 개조한 드레스는 문전박대하겠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리엔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가위를 쥐었다. 눈동자에는 두려움 대신 차가운 투지가 불타올랐다.
“그들이 독점한 것은 비싼 껍데기일 뿐이야. 진짜 옷은 그 안에 담긴 사람의 몸과 움직임으로 완성되는 법이지.”
리엔은 가봉된 드레스의 깃을 매만지며 단호하게 말했다.
“규칙을 그들이 독점했다면 우리는 그 규칙 자체를 무너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