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계를 뒤흔든 오트쿠튀르 디자이너

2화: 지하에 잠든 푸른 실
리엔은 첫 계단에 발을 올렸다.
돌계단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깊었다. 등불을 앞으로 내밀어도 불빛은 두세 칸 아래에서 힘을 잃었다. 축축한 냄새와 오래된 기름 냄새가 목구멍을 긁었다.
“제가 먼저 갈게요.”
마레나가 리엔의 팔을 잡았다.
“아니. 내가 앞에 설게.”
“아가씨가요?”
“내 어머니의 작업실이잖아.”
말하고 나서도 ‘내 어머니’라는 말은 낯설었다. 기억 속 어머니는 얼굴보다 잉크 얼룩이 남은 손으로 먼저 떠올랐다. 그 손이 이 계단을 오르내렸다는 감각만은 선명했다.
열일곱 번째 계단 끝에 낮은 문이 있었다. 문짝 중앙에는 드레스실 벽장에서 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두 겹의 실이 둥글게 얽히고 가운데에 바늘 하나가 세워진 모양이었다.
리엔이 문을 만지자 안쪽에서 작은 진동이 전해졌다.
“열쇠가 또 필요한 건 아니겠죠?”
“자물쇠가 아니라 걸쇠야.”
리엔은 문 아래의 금속 틈을 살폈다. 마레나가 건넨 머리핀을 틈에 밀어 넣고 손끝으로 저항을 찾았다. 한 번 비틀고 아래로 밀자 안쪽에서 걸쇠가 움직였다.
찰칵.
문이 열리며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작업실은 생각보다 작았다. 벽을 따라 선반이 놓였고 가운데에는 넓은 나무 작업대가 있었다. 꺼진 유리등 안쪽에는 검푸른 얼룩이 남아 있었다. 등불을 가까이 대자 얼룩이 미약하게 빛났다.
마레나가 숨을 삼켰다.
“이런 곳이 있었는데 아무도 몰랐다고요?”
“아무도 모른 게 아니라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 거겠지.”
작업대 위에는 낡은 가위와 작은 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옆에는 굵기별 바늘을 꽂은 패드와 실을 당겨 보는 금속 고리가 있었다. 손잡이가 닳은 가위를 집자 손바닥에 무게가 맞았다. 몸 어딘가에 남은 기억이 그 도구를 알아보았다.
“어머니가 쓰시던 건가요?”
마레나는 작업대 모서리를 쓸었다. 먼지가 끊긴 자국이 두 군데 있었다.
“누군가는 얼마 전까지 여길 정리했어요. 하지만 저는 이런 도구를 본 적이 없어요.”
작업대 아래에는 작은 상자가 세 개 있었다. 그중 하나는 뚜껑이 비뚤게 닫혀 있었다. 상자 옆 바닥에는 신발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발끝이 안쪽을 향하다가 급히 돌아선 모양이었다.
리엔은 상자를 열었다. 손톱만 한 돌 조각들이 천에 싸여 있었다. 대부분은 빛을 잃은 회색이었지만 가장 아래의 세 조각만 푸른빛을 머금었다.
손을 가까이 대자 차가운 기운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힘이라기보다 반응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이게 염료석인가요?”
“시장에 있는 것보다 작아요. 어머니는 색이 약한 돌도 버리지 않았어요. 천과 맞으면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고 했죠.”
리엔은 푸른 조각 하나를 천에 싸 두었다. 전부 가져가면 누군가 뒤졌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작업대 뒤 벽에는 얇은 나무틀이 걸려 있었다. 세로실과 가로실을 고정하는 틀이었다. 네 모서리에는 방향을 표시하는 금속판이 달려 있었다.
“이건 염색 전에 쓰는 틀인가요?”
“저도 처음 봐요.”
리엔은 세로실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낮고 맑은 소리가 났다. 실이 팽팽한 방향과 느슨한 방향이 달랐다.
“마레나. 드레스실에서 보라색 실크 조각과 푸른 실을 가져와 줘.”
“여기서 시험하게요? 위에서 대리인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래서 더 빨리 확인해야 해.”
마레나는 계단을 돌아보았다.
“혼자 두고 가기 싫어요.”
“작업실을 본 사람은 이제 둘이야. 문을 닫고 금방 다녀와.”
마레나가 올라간 뒤 리엔은 작업대 위의 낡은 노트를 펼쳤다. 표지는 눅눅하게 부풀어 있었고 몇 장의 글자는 번져 있었다. 그나마 읽을 수 있는 기록이 한 줄 남아 있었다.
염료석을 물에 오래 담그지 말 것. 돌의 양보다 중요한 것은 실이 눕는 방향이다. 마력을 억지로 밀어 넣으면 색이 아니라 굳음만 남는다.
리엔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마력 염색은 염료석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섬유의 결과 힘의 양이 맞아야 한다.
노트의 마지막 장에는 물에 젖은 흔적과 반쯤 찢긴 문장이 남아 있었다.
리엔이 돌아온다면 적어도 이 색만은……
문장은 거기서 끊겼다. 어머니가 무엇을 기다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작업실이 단순한 보관실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위쪽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가씨?”
마레나의 목소리가 계단 위에서 들렸다. 그녀는 보라색 실크 조각과 푸른 실타래를 품에 안고 작은 물병을 들고 내려왔다.
“집사님이 대리인한테 붙잡혔어요. 오늘 안에 처분 물품을 확인해야 한대요. 서쪽 별채 벽장도 목록에 넣겠다고 했어요.”
리엔은 노트와 돌 조각을 번갈아 보았다. 대리인이 작업실을 발견하면 염료석과 도구도 귀중품으로 분류될 수 있다.
“시험을 끝내고 나가자. 실패하면 바로 접고 옷만 개조해.”
리엔은 작업대 중앙의 얕은 홈에 푸른 염료석을 올렸다. 마레나가 작은 금속 그릇에 물을 조금 따랐다.
리엔은 푸른 실을 세 가닥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세로로 팽팽하게 걸고 하나는 가로로 눕혔다. 마지막 실은 비스듬히 걸어 결이 교차하는 지점에 고정했다.
“셋을 다르게 거는 이유가 있나요?”
“색이 머무는 방향을 비교할 거야.”
리엔은 실을 물에 적신 뒤 염료석을 손끝으로 눌렀다. 마력을 크게 불러내지 않고 미지근한 열을 아주 조금만 흘렸다.
첫 번째 실은 회색으로 변했다. 두 번째 실은 푸르게 물들었지만 표면이 뻣뻣해졌다. 세 번째 실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실패네요.”
“첫 번째는 물이 많았고 두 번째는 힘이 과했어. 세 번째는 방향을 바꿔야 해.”
리엔은 뻣뻣해진 실을 비볐다. 겉면에만 색이 머물러 섬유 안쪽은 아직 부드러웠다.
“아가씨는 염색을 해 본 적이 없잖아요.”
“직물은 결과로 말해 줘. 나는 그걸 읽는 거고.”
리엔은 마레나에게 보라색 실크 조각을 내밀었다.
“끝단에서 손가락 두 마디만 잘라 줘.”
“이건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입으신 옷이에요.”
“알아. 전부 자르지 않을 거야.”
마레나는 안쪽 솔기를 찾아 낡은 실밥을 끊었다. 안쪽에 은빛 실이 드러났다. 은사는 보강재 사이를 가로질러 허리에서 옆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건 장식이 아니었네요.”
“허리의 힘을 옆으로 흘리려고 넣은 것 같아.”
“그럼 코르셋을 빼도 버틸 수 있겠어요?”
“확인해 보자.”
리엔은 실크 조각을 비스듬한 방향으로 틀에 걸었다. 푸른 실 한 가닥을 옷감 위에 얹고 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이번에는 마력을 더 약하게 흘렸다.
염료석이 손끝의 열에 반응했다. 보라색 실크에서 붉은 기가 빠지고 푸른빛이 번졌다. 등불의 각도가 바뀌자 청록색이 드러났다. 리엔이 조각을 들어 올리자 가장자리에서 은빛이 한 번 스쳤다.
마레나가 숨을 삼켰다.
“색이 움직였어요.”
“보는 빛에 따라 드러나는 면이 달라진 거야.”
리엔은 조각을 접었다 폈다. 접힌 부분에서는 청록이 깊어졌고 평평한 부분에서는 은빛이 얇게 떠올랐다. 물방울은 천에 스며들었다. 방수도 발광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었다.
리엔은 낡은 드레스를 떠올렸다. 무거운 보강재를 걷어 내고 은사를 사선으로 다시 연결하면 몸을 누르지 않고 선을 세울 수 있다. 색이 변하는 부분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드러날 것이다.
“허리 보강재를 전부 빼겠어요?”
“앞 중심의 얇은 띠는 남겨. 양옆은 풀고 은사를 사선으로 옮기자.”
“치맛자락은요?”
“뒤쪽은 넓히고 앞쪽은 걸음을 방해하지 않게 줄여. 레이스는 목에서 떼어 소매 끝으로 옮겨.”
마레나는 잠시 계산하다 고개를 들었다.
“오늘 밤까지 첫 봉제는 가능해요. 피팅은 한 번밖에 못 해요.”
“한 번이면 충분하게 만들자.”
“제가 망치면요?”
“같이 고치면 돼.”
마레나는 푸른 실과 낡은 가위를 바라보았다.
“전에라면 제 판단을 묻지도 않았을 텐데요.”
“전에 내가 어땠는지는 전부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네 손이 필요해.”
마레나의 표정이 굳었다가 조금 풀렸다.
“그럼 지시를 정확하게 해 주세요. 저는 대충하는 일은 싫거든요.”
“나도 싫어해.”
두 사람은 작업대 위에 실크를 펼쳤다. 리엔은 어머니의 낡은 재단 도구로 허리선을 표시했다. 자르기 전에 옷감을 몇 번 접어 선을 맞추고 은사의 위치를 확인했다.
“새 천을 만들 수 없다는 건 약점이 아니야.”
리엔이 말했다.
“남은 천의 장점을 살려 구조를 바꾸면 돼. 입는 사람이 몸을 참는 옷이 아니라 옷이 움직임을 따라가게 만들 거야.”
마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계단 위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서쪽 벽장 뒤까지 확인하겠습니다. 목록에 없는 물건은 모두 처분 대상입니다.”
채권 대리인의 목소리였다.
마레나가 염료석을 움켜쥐었다.
“이걸 전부 숨겨야 해요.”
“전부는 안 돼.”
리엔은 반응이 좋았던 조각 하나만 천에 싸서 소매 안쪽에 넣었다. 나머지는 상자에 돌려놓았다. 노트는 젖은 천 아래에 밀어 넣고 작업대 위에는 낡은 가위와 보라색 실크만 남겼다.
“다 가져가면 누군가 이미 뒤졌다는 걸 알아차려. 우리는 하나만 확인한 거야.”
리엔은 시험 조각을 접어 옷감 아래에 끼웠다. 그때 노트 마지막 장의 문장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리엔이 돌아온다면 이 색을 이름 없이 두지 말 것.
그 문장이 어머니의 유언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름 없이 두지 말라는 뜻만큼은 분명했다.
리엔은 가위를 들었다. 보라색 실크의 안쪽 솔기에 칼끝을 넣었다.
“이건 내 이름으로 만들 거야.”
첫 실밥이 끊어졌다.
바로 그때 위층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벽장을 여는 둔탁한 마찰음이 들렸다.
마레나가 숨을 들이켰다.
리엔은 사선으로 그은 첫 재단선을 바라보았다. 지하 작업실도 푸른 염료석도 아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손에 든 가위와 눈앞의 실크만큼은 빼앗기게 둘 생각이 없었다.
“등불을 낮춰.”
“문이 열리면요?”
리엔은 가위를 다시 옷감에 댔다.
“그때는 이 옷이 왜 여기서 시작됐는지 보여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