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계를 뒤흔든 오트쿠튀르 디자이너

1화: 죽은 이름으로 깨어나다
죽음 뒤에 남은 것은 박수 소리가 아니었다.
서윤은 숨을 들이켰다. 낯선 천장의 균열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슴이 조여 왔고 손끝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작업실 바닥에 흩어진 견본과 꺼지지 않던 재봉틀 소리였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다 베개 옆에 놓인 유리잔을 쳤다. 물이 흰 이불 위로 번졌다.
“아가씨!”
문밖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가씨라는 호칭보다 이 방의 공기가 더 낯설었다. 창문 밖 회색 지붕 너머로 첨탑 끝의 푸른 불빛이 피어올랐다.
마법 도시.
그 단어가 떠오른 순간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 이름 하나와 짧은 감각들이 밀려왔다. 베르네. 남작가. 어머니의 잉크 냄새. 그리고 비어 있는 아버지의 서재.
나머지는 안개였다.
서윤은 침대에서 내려와 거울 앞으로 갔다. 거울 속에는 잿빛 금발의 여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낯설었지만 눈동자의 색은 몸 어딘가에 남은 기억과 맞아떨어졌다. 청회색 눈. 리엔 베르네.
“리엔.”
입 밖으로 이름을 내자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에는 바늘을 오래 잡은 사람처럼 얇은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손등의 작은 흉터를 보는 순간 낯선 어린 시절의 장면이 스쳤다.
몸은 리엔의 것이었다. 기억은 서윤의 것이었다.
문이 열리며 밤색 곱슬머리의 여자가 들어왔다. 손에는 물수건과 약병이 들려 있었다.
“정신이 드셨어요? 물부터…….”
여자는 서윤과 거울을 번갈아 보았다. 서윤은 여자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마레나. 베르네가의 하녀 출신 재봉사. 손이 빠르고 목소리가 크다.
“마레나.”
“네. 저예요.”
마레나의 얼굴이 환해졌다가 금세 굳었다. “머리를 부딪치신 건 아니죠? 어제부터 계속 열이 올랐어요.”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기억이 안 나.”
리엔은 대답 대신 약병을 받아 냄새를 맡았다. 쓴 뿌리와 희미한 박하 향이 섞여 있었다. 독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레나에게는 약을 의심하는 귀족 아가씨보다 머리를 다친 주인이 편할지도 몰랐다.
“조금 흐려졌어. 내가 누구인지도 잠깐 헷갈렸고.”
마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리엔 베르네 아가씨예요. 베르네 남작님의 장녀고요.”
남작. 장녀. 저택.
“아버지는?”
마레나의 손이 약병을 쥔 채 굳었다.
“……아직 소식이 없어요.”
짧은 말에 빈 서재와 닫힌 문이 겹쳐졌다. 리엔은 더 묻지 않았다. 마레나가 감추고 싶은 일과 자신이 아직 알 수 없는 일을 구분해야 했다.
“콜트 양. 도착한 서류를 이쪽으로 가져오게.”
마레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방을 나갔다. 잠시 뒤 돌아온 손에는 검은 밀랍 봉인이 찍힌 봉투와 푸른 테두리의 카드가 들려 있었다.
“아가씨가 직접 보셔야 해요.”
첫 번째 봉투를 뜯자 차가운 잉크 냄새가 났다. 리엔은 줄을 따라 읽었다.
베르네 남작가의 미납금. 사흘 뒤 정오까지 원금과 연체료를 납부할 것. 불이행 시 저택 서쪽 별채와 보관 중인 귀중품을 채권자의 처분에 맡길 것.
마지막 줄에는 더 작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푸른 방 무도회에 참석할 명분을 잃는 즉시 사교 명부에서 베르네가의 이름이 삭제될 수 있음.
“이게 무도회 초대장인가?”
리엔이 푸른 카드를 들어 보이자 마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 폐하께서 여시는 봄 시즌 개막 무도회예요. 사흘 뒤 밤에 열려요.”
“돈을 못 갚으면 참석도 못 하고?”
“초대장은 있어도 입을 옷과 동행할 사람을 마련하지 못하면 문 앞에서 돌아와야 하죠. 이번 무도회에서 베르네가가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정말로 끝났다고 생각할 거예요.”
마레나는 봉투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무도회에서 새 옷을 선보이면 후원자를 구할 수도 있어요. 주문을 받아 빚을 늦출 수도 있고요.”
그때 문이 세 번 두드려졌다.
“베르네 양. 채권 대리인입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집사가 문을 열었다. 회색 외투를 입은 남자가 서류철을 안고 서 있었다. 그는 리엔을 위아래로 훑더니 고개를 숙였다.
“의식을 회복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서명만 하시면 처분 절차를 사흘간 보류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처분하죠?”
“서류에 적힌 대로입니다. 서쪽 별채와 귀중품. 필요하다면 본채의 사용권도 검토됩니다.”
“대가가 있겠죠.”
“연체료가 추가됩니다.”
남자는 서류를 내밀었다. 리엔은 받지 않고 첫 장의 하단을 바라보았다. 채권자의 이름은 본문과 떨어진 곳에 작은 인장으로만 찍혀 있었다. 이 몸의 기억에도 없는 이름이었다.
“정산 금액은?”
“집사에게 전달한 내역과 같습니다.”
“나는 아직 그 내역을 받지 못했어.”
남자의 미소가 얇아졌다.
“기억이 흐려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서명부터 하시는 편이 안전합니다.”
리엔은 서류를 밀어냈다.
“금액과 담보 목록을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서명하지 않겠어.”
“사흘 뒤면 확인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그때는 저희가 확인할 테니까요.”
협박은 정중한 문장 안에 숨겨져 있었다. 익숙한 방식이었다. 불리한 계약서일수록 상대는 서명하는 사람의 조급함을 먼저 산다.
“돌아가서 전해.”
리엔은 봉투를 다시 집어 들었다.
“사흘 뒤 정오까지 내놓을 것을 내놓겠다. 대신 그 전에는 집 안의 물건 하나에도 손대지 마.”
“무엇을 내놓으실 생각입니까?”
“그건 내가 정해.”
대리인은 비웃음에 가까운 숨을 흘리고 서류철을 닫았다.
“무도회에 입고 갈 옷도 없으면서 말입니까?”
리엔은 그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낡은 잠옷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옷이 없다는 말은 아직 옷장을 보지 않았다는 뜻이야.”
대리인이 나간 뒤 마레나는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숨을 죽였다.
“아가씨. 사흘 안에 드레스를 새로 만드는 건 정말 불가능해요.”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려면 옷장을 먼저 봐야지.”
리엔은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손이 떨렸지만 글씨는 흔들리지 않았다. 서윤이 죽은 이유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고 끝까지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같은 실수를 할 수 없었다.
“마레나. 나를 드레스실로 데려가.”
“정말 괜찮으세요?”
“괜찮지 않아. 그래서 움직여야 해.”
마레나는 한숨을 쉬며 앞장섰다.
드레스실은 저택 남쪽 끝에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 먼지와 말린 장미 향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벽면을 채운 옷걸이에는 색이 바랜 드레스들이 걸려 있었다.
리엔은 하나씩 옷을 만졌다. 실크는 빛을 잃었지만 안쪽 결은 아직 살아 있었다. 레이스는 가장자리를 잘라내면 소매 장식으로 쓸 수 있었다.
“이걸 왜 안 버렸지?”
“버릴 돈도 없으니까요.”
마레나의 대답은 가벼웠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대여품과 가문의 옷은 뒤섞여 있었다. 새 옷을 만들 재료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있는 것을 분해해 다시 세우는 일은 가능했다.
“마레나. 이 보라색 실크를 펼쳐 줘.”
“그건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입으신 옷이에요.”
손이 멈췄다.
어머니. 잉크 얼룩이 묻은 손가락. 차가운 지하 계단. 한밤중에 빛을 내던 푸른 유리병.
“그래서 더 봐야겠어.”
마레나는 실크를 조심스럽게 내려 바닥에 펼쳤다. 옷은 아름답지 않았다. 어깨선은 무겁고 허리에는 딱딱한 보강재가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치맛자락의 폭은 넉넉했다. 몸판과 치마를 분리하면 다른 구조로 바꿀 수 있었다.
“허리를 조이는 보강재를 뺄 거야. 치맛자락은 세로로 나눠서 몸판에 다시 붙인다. 레이스는 목이 아니라 소매 끝으로 옮기고.”
“그러면 허리가 무너져요.”
“무너지게 만들지 않을 거야. 안쪽에 남은 은사 띠를 사선으로 대면 움직일 때 선이 살아나.”
마레나는 옷을 바라보다가 작은 가위로 안쪽 솔기를 확인했다.
“은사 띠가 두 줄뿐인데요.”
“두 줄이면 충분해. 대신 색을 바꿔야 해.”
“염색할 돈은요?”
“돈을 쓰자는 게 아니야. 먼저 우리가 가진 걸 전부 확인하자.”
리엔은 드레스실 구석의 낡은 상자를 열었다. 실패한 리본과 단추가 뒤섞여 있었다. 붉은 염료가 묻은 천 조각과 오래된 푸른 실타래도 나왔다. 실타래를 집는 순간 손끝이 저릿했다.
“이 실은…….”
“어머니께서 아무도 만지지 말라고 하셨어요.”
마레나가 낮게 말했다. “서쪽 벽장도 마찬가지였고요.”
리엔은 마레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바늘 자국 사이에 실밥과 푸른 섬유가 박혀 있었다. 이 사람은 낡은 옷의 결을 읽고 다시 살려 온 사람이다.
혼자서는 사흘 안에 봉제와 피팅을 끝낼 수 없다. 리엔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마레나.”
“네?”
“내가 선을 정할게. 당신은 손이 할 수 있는지 판단해 줘.”
마레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귀족 아가씨가 재봉사의 판단을 먼저 묻는 일은 이 집에서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가요?”
“당신 말고 이 옷의 솔기를 이렇게 빨리 찾을 사람이 있어?”
마레나는 잠시 침묵했다. 이내 어깨를 폈다.
“없지는 않지만…… 제가 해 볼게요.”
“좋아. 그럼 이 옷이 무도회까지 버틸 수 있는지부터 보자.”
드레스실 안쪽에는 천장까지 닿는 나무 벽장이 있었다. 문짝에는 다른 곳과 달리 작은 금속 문양이 박혀 있었다. 두 겹의 실이 원을 이루고 그 가운데에 가느다란 바늘이 서 있는 모양이었다.
리엔은 문양 위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안쪽에서 미약한 열이 번졌다.
“이 벽장 안에는 뭐가 있지?”
“몰라요. 열쇠를 본 사람도 없어요.”
“그럼 열어 보자.”
마레나가 놀라 고개를 저었다.
“집사님이 절대 건드리지 말랬어요.”
“집사님은 우리 빚을 대신 갚아 주나?”
“그건 아니지만…….”
“사흘 뒤면 이 집의 서쪽 별채가 넘어가. 안에 금화가 있든 썩은 천 조각이 있든 확인해야 해.”
리엔은 크림색 드레스의 허리에서 낡은 금속 버클을 떼어 냈다. 버클 끝은 얇고 평평했다. 마레나는 주머니에서 머리핀 하나를 꺼내 건넸다.
“이걸로 될까요?”
“자물쇠가 오래됐다면.”
두 사람이 벽장 앞에 무릎을 꿇자 복도에서 구두 소리가 다가왔다. 집사였다.
“아가씨. 대리인이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리라고 해.”
“서류에 서명하셔야 합니다.”
“읽을 것은 읽었어. 서명할 것은 없어.”
문밖이 조용해졌다. 집사는 곧 물러갔지만 발소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리엔은 자물쇠에 버클을 넣었다. 안쪽에서 걸쇠가 두 번 움직였다. 마지막 틈은 머리핀으로 밀어야 했다.
찰칵.
벽장 안쪽에서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나무판이 뒤로 물러나며 찬 공기가 발목을 스쳤다. 벽장에는 옷이 없었다. 대신 아래로 이어지는 좁은 계단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둠에서 젖은 돌과 오래된 염료 냄새가 올라왔다.
마레나가 숨을 삼켰다.
“이런 곳이 있었다고요?”
리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계단 아래 어딘가에서 유리병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리엔은 책상 위의 푸른 초대장을 떠올렸다. 사흘. 빌린 드레스는 돌려줘야 한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손과 눈이 있었다.
그리고 아직 확인하지 않은 지하가 있었다.
“등불을 가져와.”
“아가씨, 내려가시게요?”
“내 드레스가 어디서 시작되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리엔은 마레나가 건넨 등불을 받아 들었다. 불꽃이 어둠의 첫 계단을 희미하게 밝혔다.
그녀는 망설임을 접고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