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침묵까지 통역하겠습니다

2화: 편집된 녹음
은별은 원본 파일을 법원 근처의 작은 상담실에서 열기로 했다. 그는 수현과 현우가 함께 들어오는 데 동의했지만, 노트북은 자신이 직접 켜겠다고 했다. 현우는 화면을 보려다 의자를 뒤로 당겼다. 수현은 통역 노트를 닫아 둔 채 기다렸다.
“먼저 조건을 말할게요.” 은별이 수어로 말했다. “파일을 복사하지 않아요. 기사에도 쓰지 않아요. 재판 증거로 낼지 오늘 결정하지 않습니다.”
수현이 옮겼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건대로 하겠습니다.”
은별은 노트북의 암호를 입력했다. 폴더에는 날짜별 영상이 정리돼 있었다. 그는 사고 당일의 원본과 회사가 제출한 편집본을 나란히 열었다. 수현은 통역을 위해 입을 열었지만, 은별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파일을 재생하고 자막을 켰다.
원본 영상의 앞부분에는 안전 교육이 없었다. 현장 감독자가 장비를 끄지 않은 채 작업대에 올라갔다. 은별은 뒤쪽에서 수신호를 보냈다. 감독자는 그 손짓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몇 초 뒤 장비가 갑자기 돌아갔고 은별이 끼어들어 사람을 밀어냈다. 사고는 그때 발생했다.
편집본은 그 직전 19초를 잘라 냈다. 남은 화면에서는 은별이 장비 가까이에서 혼자 움직였다.
현우는 턱을 굳혔다. “이건 증거로 제출해야 합니다.”
은별은 노트북을 닫았다.
“당신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수현이 통역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원본을 내면 제 얼굴도 나와요. 회사는 제가 작업장 규칙을 어겼다고 할 거예요. 동료가 감독자에게 신호를 보낸 것도 드러나고요.”
현우는 의자를 더 뒤로 밀었다. “다른 사람 얼굴을 가릴 수 있습니다. 재판부에 비공개 제출을 요청할 수 있고요.”
“그렇게 하면 동료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어요.”
수현은 은별의 문장을 정확히 옮겼다. 현우는 질문지에 적어 온 문구를 지웠다. 그는 준비해 둔 합의안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치료비와 미지급 임금, 안전 교육 재실시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회사가 책임을 인정한다는 문구는 없었다.
은별은 합의안을 읽었다.
“이걸 받으면 재판은 끝나요?”
“네. 빠르게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문구는요?”
현우는 종이를 넘겼다. 하단의 작은 글씨에 ‘당사자 상호 간에 귀책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었다. 은별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요.”
“그걸 인정하는 문구를 넣으면 회사가 합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 안 해요.”
현우가 반박하려는 순간 수현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은별이 계속 말하고 있었다.
“돈도 필요해요. 병원비를 내야 하고, 일자리도 잃었어요. 그런데 제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없으면, 회사는 또 같은 영상을 보여 줄 거예요.”
현우는 합의안을 접었다. “저는 보상부터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은별은 그의 눈을 봤다. “제가 원하는 걸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렇습니다.”
“다시 물어보세요.”
현우는 펜을 내려놓았다.
“어떤 조건이 가장 중요합니까?”
은별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요구를 말했다. 미지급 임금과 치료비, 회사의 안전 교육 재실시, 편집 영상의 정정 공지, 자신이 잘못했다는 문구를 쓰지 말 것. 그리고 동료의 이름과 얼굴은 공개하지 않을 것.
수현은 각 항목을 통역하고, 은별에게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현우는 한 항목씩 적었다. 그는 “정정 공지”를 “내부 안내”라고 완화하려 했지만, 은별은 그 차이를 알아차렸다.
“공개 정정이 아니면 받지 않겠습니다.”
“회사가 외부 공지를 거부하면, 재판을 계속해야 합니다.”
“알아요.”
“그럼 보상이 늦어질 수 있어요.”
“그것도 알고 있어요.”
현우는 펜을 멈췄다. 그는 처음으로 은별의 선택이 자신이 선호하는 방향과 달라도 그대로 적었다. 그 순간 상담실 문 밖에서 노크가 들렸다. 회사 측 변호사가 원본 파일을 무단으로 열람했다는 통지가 도착했다. 은별은 노트북 화면을 닫고 자신의 손으로 암호를 바꿨다.
“누가 알려 줬죠?” 현우가 물었다.
“회사 서버에 접속한 흔적이 있어요.”
“파일을 복사했나요?”
“모르겠어요. 그래서 지금 제출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은별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지만, 손이 떨렸다. 수현은 파일 사본을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현우는 법원에 임시 보존 요청을 제출하겠다고 했다.
“은별 씨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 영상이 사라지는 건 원하지 않아요. 하지만 제 동료가 노출되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세 사람은 법률 상담소의 보안 담당자에게 연락했다. 원본을 복사하지 않고 파일 해시와 접근 기록만 보존할 수 있는지 확인했다. 담당자는 기술적으로 가능하지만, 은별이 직접 노트북을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은별은 노트북을 자기 가방에 넣었다.
“저장 장치는 제가 들고 있겠습니다.”
현우는 보존 요청서 초안을 쓰기 시작했다. 수현은 통역을 위해 문장을 확인했다. 요청서에는 회사가 파일을 열지 못하게 막는 대신, 법원이 지정한 담당자 앞에서만 확인하도록 적혔다. 이 방법이면 프레임 속 동료의 신원이 노출될 가능성은 줄지만,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이 위험을 받아들이나요?” 수현이 물었다.
은별은 한참 생각했다.
“지금은 원본을 지키는 게 먼저예요. 공개 여부는 나중에 결정할게요.”
현우는 그 선택을 문서에 그대로 적었다. 그는 더 이상 ‘사실 확인을 위해 필요하다’는 말을 앞세우지 않았다. 대신 요청서를 은별에게 보여 주고, 이해하지 못한 단어를 표시하도록 기다렸다.
보존 요청서를 제출하기 전, 상담실의 보안 담당자가 은별의 노트북을 확인하러 왔다. 그는 파일을 복사하지 않고 원본의 해시값과 수정 시각만 대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은별은 담당자에게 질문했다.
“그 값을 알면 제 동료를 찾을 수 있나요?”
“파일 안의 얼굴이나 음성을 보지 않으면 개인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파일이 바뀌었는지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은별은 노트북을 닫았다. “화면에 얼굴이 나오는 구간은 제가 먼저 가릴 수 있어요?”
“그렇게 편집한 파일은 원본과 달라져 검증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원본을 유지하고 재생을 제한해야 합니다.”
현우는 담당자를 향해 “그럼 법원에서만 원본을 확인하는 게 가장 안전하겠군요”라고 말했다. 은별은 그를 바라봤다.
“제가 허락하기 전에는 법원에도 보내지 않습니다.”
“네. 요청서는 접근 금지와 보존만 신청합니다.”
담당자는 접근 로그를 보여 줬다. 어젯밤 11시 42분에 회사의 공용 계정이 파일 폴더를 열려고 했지만 암호가 바뀌어 실패했다. 파일은 열리지 않았다. 은별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노트북을 빼앗긴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 자신의 작업 공간을 들여다보려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회사에서 제가 갖고 있다는 걸 알아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우가 말했다. “내일 출근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은별은 고개를 저었다. “제 일자리를 또 제가 포기해야 하나요?”
수현은 현우의 말을 대신 다듬지 않았다. 현우는 잠시 후 말을 고쳤다.
“제가 걱정돼서 말했지만, 출근 여부는 은별 씨가 정할 일입니다. 안전하게 출근할 방법을 같이 확인할까요?”
은별은 그제야 대답했다. 회사 건물 출입구에는 경비가 있고, 동료가 아침에 같이 와 줄 수 있다고 했다. 그 동료는 영상에 나온 사람일 수 있어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현우는 구체적인 이름을 묻지 않았다.
보안 담당자는 파일을 외장 저장장치에 복사하지 않고, 노트북의 네트워크 연결을 끄는 방법을 안내했다. 은별은 직접 와이파이를 비활성화하고, 접근 기록 화면을 휴대전화로 촬영했다. 수현은 화면에 나온 시간과 계정명을 읽어 주되, 사진을 가져가지 않았다. 은별은 기록을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은별은 상담실을 나가기 전에 보안 담당자에게 오늘 확인한 접근 기록을 자신에게만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현우는 사건 파일에도 같은 기록을 붙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제가 동의하기 전에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개인 보관본을 만들고, 제출 여부는 나중에 정하죠.”
그는 종이를 출력해 건네려다 멈추고, 은별이 직접 수령할지 물었다. 은별은 출력물 대신 파일을 암호화한 뒤 자기 휴대전화에 저장했다. 누구의 사건 자료인지 먼저 정하는 사람이 본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상담실을 나설 때 비가 그쳐 있었다. 현우는 계단 앞에서 수현에게 말했다.
“당신이 침묵을 기다려서 사건이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게 사건의 조건이에요.”
“그래도 덕분에 은별 씨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았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낸 게 아니에요. 은별 씨가 말했죠.”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수현의 손에 들린 우산을 대신 들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계단 난간 쪽으로 물러섰다. 수현은 그가 지나갈 자리를 내줬다.
그날 밤 법원은 회사 측에 영상 파일의 삭제와 변경을 금지하는 임시 보존 명령을 내렸다. 사본은 만들지 않고, 접근 시각만 기록하도록 했다. 은별의 노트북은 그녀 손에 남았다.
현우는 합의안 수정본을 보냈다. 외부 정정 공지와 안전 교육의 내용, 임금 지급 날짜가 적혀 있었다.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 그는 “검토용이며 결정은 은별 씨가 한다”고 덧붙였다.
수현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 대신 다음날 법정 통역 준비를 위해 용어집을 펼쳤다. 종이 사이에 자신이 초년 시절 잘못 옮겼던 증언의 정정 기록이 끼어 있었다. 그녀는 기록을 다시 접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