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침묵까지 통역하겠습니다

1화: 당신의 침묵까지 통역하겠습니다
이수현은 법정 통역석에서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피고석 쪽에 앉은 오은별이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목의 밝은 노란 밴드가 조명 아래서 눈에 띄었다. 은별은 수현을 보지 않았다. 방청석 첫 줄의 빈 의자만 보고 있었다.
재판장이 사건 번호를 불렀다. 회사 측 변호사가 먼저 진술을 시작했다. “원고는 사고 당시 안전 수칙을 충분히 안내받았고, 본인이 장비를 임의로 조작했습니다.”
수현은 한국수어로 옮겼다. 안전, 안내, 장비, 본인이. 은별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손을 들었다.
“통역을 멈춰 주세요.”
법정 안이 조용해졌다. 수현은 두 손을 내리고 재판장을 바라봤다.
“증인이 통역 정정을 요청합니다.”
재판장은 속기사를 확인하고 은별에게 질문했다. 은별은 수현을 보며 천천히 수어로 말했다. ‘회사는 교육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그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장비를 조작한 것은 내가 아니라 감독자입니다.’
수현은 그 문장을 그대로 옮겼다. 현우가 변호인석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는 은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예상한 답을 확인한 듯했다.
심리가 잠시 중단되자 강현우가 통역 대기실로 들어왔다.
“은별 씨가 통역을 요청했을 때 바로 정정해 줘서 다행입니다.”
“정정한 건 증인 본인입니다.”
“그 말은 알죠. 그런데 회사 쪽 표현을 그대로 두면 오해가 생길 수 있어요.”
“제가 먼저 바꾸면 더 큰 오해가 생깁니다.”
현우는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그는 자신이 준비한 질문지에 “안전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문장을 표시해 두었다.
“은별 씨는 사고 후 회사와 합의하려고 했어요. 공개 진술보다 빠른 보상이 낫다고 했습니다.”
“당사자에게 그 선택을 다시 확인했나요?”
“어제 통화했습니다.”
“통화에서 은별 씨가 뭐라고 했죠?”
현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질문지 한 줄을 손톱으로 눌렀다.
“그건 통역 범위가 아닙니다.”
“맞아요. 그래서 저는 묻지 않았습니다.”
수현은 대기실 문을 열어 두었다. 은별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대화를 읽으려 들지 않았지만, 현우가 가까이 다가가자 시선을 들었다.
“제가 설명할게요.” 현우가 말했다.
은별은 휴대전화 메모장을 열어 타이핑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통역해 주세요. 서로 합의하지 마세요.’
수현은 문장을 읽고 현우에게 옮겼다.
“그럼 직접 물어보겠습니다.” 현우가 말했다.
은별은 고개를 저었다. 타이핑을 이어 갔다. ‘지금은 아니요. 조정실에서 다시 말하겠습니다.’
현우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가 질문을 덧붙이려 하자 수현이 말했다.
“지금은 기다려야 합니다.”
“증거 제출 마감이 오늘이에요.”
“마감 때문에 당사자가 답할 시간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수현을 바라봤다. 둘 사이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는지 찾는 듯했다. 결국 현우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알겠습니다. 조정실에서 다시 이야기하죠.”
심리가 재개되었다. 회사 측은 사고 당일의 안전 교육 영상 일부를 제출했다. 화면에는 은별과 비슷한 작업복을 입은 사람이 장비를 다루고 있었다. 수현은 영상의 시점을 설명하는 발언을 통역했다. 하지만 영상 속 손목밴드는 파란색이었다. 은별이 착용한 노란색과 달랐다.
은별은 손을 들었다. 이번에도 수현은 속기록을 보며 발언을 기다렸다. 은별은 영상 화면을 가리키고, 손목밴드를 보여 준 뒤 말했다. ‘저는 이 날 이 장비를 만지지 않았어요. 화면 속 사람은 내가 아닙니다.’
회사 측 변호사는 “얼굴이 정확히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우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상 원본의 메타데이터와 촬영 시간을 확인해 주십시오.”
재판장은 양측에 원본 파일 제출을 명했다. 법원 속기사는 영상을 다시 틀 수 있는지 재판장에게 물었다. 수현은 화면을 보며 은별의 손짓을 기억해 두었다. 재판장이 재생을 허락하자 회사 측 변호사는 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원고는 ‘제가 조작했습니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영상의 배경음이 커서 문장 끝이 잘 들리지 않았다. 수현은 그 자리에서 통역을 멈췄다.
“발화의 마지막 부분이 들리지 않습니다. 다시 재생해 주시기 바랍니다.”
회사 측 변호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미 모두 들었습니다.”
“저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추측해 옮길 수 없습니다.”
재판장은 영상을 뒤로 돌리게 했다. 스피커에서 잡음이 다시 흘렀다. 이번엔 현우도 이마를 찌푸렸다. “조작했습니다”라는 말처럼 들렸지만, 앞의 음절은 분명하지 않았다. 은별이 손을 들었다. 그는 화면 속 입 모양을 보고 천천히 수어로 말했다. ‘제가 조작한 게 아닙니다. 장비를 멈추려고 조작했습니다.’
수현은 문장을 그대로 통역했다. 회사 변호사는 “원고의 기억일 뿐”이라고 했지만, 재판장은 발화가 불명확한 부분을 기록에 표시하고 원본 제출 전까지 해석을 유보하라고 했다. 현우는 질문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준비한 “사고를 인정했습니까”라는 질문은 더 이상 그대로 쓸 수 없었다.
속기사는 방금 재생된 말의 일부를 기록에서 물음표로 남겼다. 회사 측 변호사는 자신이 말한 문장이 분명했다고 주장했다. 수현은 기록을 확인하려고 은별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재판장이 직접 증인에게 발언을 확인했다. 은별은 “조작했다”가 아니라 “조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부정 표현 하나가 빠져 있었다. 수현은 정정된 말을 1인칭으로 통역했고, 속기사는 앞선 문장에 정정 표시를 붙였다. 재판장은 원본 제출 전까지 영상의 대사를 사실로 전제하지 않겠다고 고지했다. 현우는 그 결정에 안도한 듯했지만, 은별은 웃지 않았다. 그녀가 지키려 한 건 자기 말의 정확성이지, 현우의 사건이 아니었다.
은별은 영상 재생이 멈추자 손을 내렸다. 손끝이 빠르게 떨리고 있었다. 수현은 사건 기록을 보느라 그 떨림을 통역하지 않았다. 대신 재판장에게 5분 휴정을 요청했다. 심리 일정이 밀렸지만, 은별은 복도에서 물을 마시고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
“아까 멈춰 줘서 고마워요.” 은별이 말했다.
“소리가 안 들려서 멈춘 거예요.”
“그게 충분했어요.”
수현은 그 말을 받아 적지 않았다. 감사는 법정 기록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시 확인했다.
심리는 다시 연기될 수 있었다. 회사 측 변호사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자 은별은 손바닥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현우는 그녀 대신 말하지 않았다.
휴정 뒤, 은별은 복도 창가로 걸어갔다. 수현은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현우는 다른 쪽에서 전화 통화를 하느라 다가오지 않았다.
“제가 통역을 잘못했나요?” 수현이 수어로 물었다.
은별은 잠깐 생각한 뒤 답했다. ‘당신은 처음에 회사의 말을 그대로 옮겼어요. 그게 맞았어요. 내가 정정한 뒤에도 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고요. 그게 더 중요했어요.’
“원하는 표현이 있으면 다음에도 직접 고쳐 주세요.”
‘당신이 알아서 바꾸면 안 돼요.’
“네. 알아서 바꾸지 않겠습니다.”
은별은 휴대전화를 내렸다. 그는 구체적 요청을 적었다. ‘오늘 나온 교육 영상, 원본이 아닐 수 있어요. 내가 편집 전 파일을 갖고 있어요. 아직 제출할지 결정하지 않았어요.’
수현은 그 말을 현우에게 전달해야 하는지 물었다. 은별은 지금은 아니라고 했다. 증거 제출 전까지는 자신이 보관하고 싶다고 했다. 수현은 그 선택을 확인했다.
그날 법정 밖 비가 내렸다. 현우는 수현에게 우산을 건네려다 멈췄다.
“같이 쓰실래요?”
“아니요. 제 우산이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는 우산을 다시 접었다. 고백도 친절도 상대가 받지 않으면 멈춰야 한다는 걸 배우는 듯했다. 수현은 자신의 접이식 우산을 펴고, 은별이 택시를 잡을 때까지 건물 처마 밑에 함께 섰다.
은별은 택시 문을 열기 전에 휴대전화를 보여 줬다. ‘원본은 내일 보겠습니다. 변호사와 같이 볼지 제가 정할게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별이 떠난 뒤 현우가 다가왔다.
“제가 오늘 너무 빨리 물었네요.”
“증인에게요?”
“당신에게도요.”
“제가 뭐라고 답했는지는 들었죠.”
“네. 당신이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럼 그 말만 기억하세요.”
현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수현은 그와 같이 걷지 않았다. 법원 계단 아래에서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다.
그날 밤, 수현은 통역 일지를 정리하다 은별의 사건 파일에서 이상한 시간을 발견했다. 회사 영상은 오후 3시 14분에 촬영된 것으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사고 보고서의 발생 시각은 오후 2시 52분이었다. 영상이 교육 증거가 아니라 사고 뒤에 찍혔을 수 있었다.
수현은 내용을 수정하지 않았다. 대신 현우에게 사실 확인 요청을 보냈다. “영상 촬영 시각과 사고 보고서 시각이 다릅니다. 원본을 확인해 주세요.”
보내고 나서야 그녀는 오후 내내 손목이 아팠다는 걸 느꼈다. 두 손을 씻고, 따뜻한 물에 손가락을 담갔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현우의 답이었다.
‘내일 원본을 확인하겠습니다. 은별 씨가 허락할 때까지 파일을 열지 않겠습니다.’
수현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문장이 약속인지,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규칙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수현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고, 내일 법정에서 다시 기다릴 말을 천천히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