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31화: 이름을 빌리지 않는 브랜드
W&U 랩의 회의실 화면에 새로운 의뢰서가 떠 있었다.
친환경 생활 브랜드 ‘들꽃’ 외부 전략 파트너 제안 요청.
은우는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마지막 페이지부터 확인했다. 발주처는 신성리테일이었다. 그러나 의뢰서에는 지혁의 이름도 배우자 관계도 적혀 있지 않았다.
“범위가 넓네요.”
소라가 태블릿을 옆으로 밀었다.
“브랜드 이름과 패키지뿐 아니라 협력사 선정과 첫 입점 전략까지예요. 그런데 기간은 여섯 주입니다.”
“신성리테일이 원하는 건 브랜드가 아니라 홍보용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아요.”
은우는 세 번째 페이지를 두드렸다.
“친환경 인증과 생산자 스토리 검증은 누가 하죠?”
“발주서에는 외부 전략 파트너가 검토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검토가 아니라 의사 결정으로 바꿔 달라고 하세요.”
소라가 눈을 크게 떴다.
“처음부터 조건을 올리면 수주가 어려워질 수도 있어요.”
“조건을 낮추면 수주하고도 우리가 만든 결과를 지킬 수 없어요.”
은우는 요청서 아래에 메모를 적었다.
- W&U 독립 의사 결정.
- 협력사 계약 조건 공개.
- 신성리테일의 독점 요구 금지.
- 검수 자료에 대한 W&U 접근권.
“이 네 줄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검토하지 않겠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민규가 들어왔다.
“대표님. 오늘 오전 열한 시에 신사업본부 브리핑이 잡혔습니다. 신성리테일 친환경 신사업 담당인 김현준 상무가 참석한답니다.”
“상무님이 직접 들꽃을 맡고 계신가요?”
“정식 담당은 아니지만 신성리테일의 친환경 신사업 전체를 보고 있습니다. 전무님도 참석하십니다.”
은우의 시선이 지혁에게 향했다.
그는 회의실 입구에 서서 들꽃 의뢰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날 저녁처럼 손을 대신 뻗지도 않았고 내용을 먼저 설명하지도 않았다.
“지혁 씨는 발주 책임자로 참석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내부 이해관계 조정이 필요한 경우에만 배석합니다.”
“그럼 오늘도 제가 요청하기 전에는 발언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지혁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은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 이제는 무관심이 아니라 약속처럼 느껴졌다.
신성리테일 본사 회의실에는 들꽃 관련 자료가 세 겹으로 쌓여 있었다.
김현준 상무는 첫 인사부터 일정표를 펼쳤다.
“여섯 주 뒤에 신성리테일의 주요 매장 열두 곳에서 동시 입점을 시작합니다. 소비자에게는 신성의 친환경 전환을 보여 줘야 합니다.”
“제품은 정해졌습니까?”
“고체 세제와 리필형 세정제 그리고 재사용 용기입니다. 협력사 후보도 있습니다.”
“후보를 이미 정하셨다면 외부 전략 파트너는 무엇을 결정합니까?”
김 상무의 입꼬리가 굳었다.
“대표님은 광고 전략을 맡아 주시면 됩니다. 공급망은 신성리테일의 경험을 따르는 편이 빠르겠죠.”
은우는 파일 안쪽에서 한 장의 부록을 꺼냈다.
“그렇다면 이 부록은 왜 협력사에게 전달됐습니까?”
부록에는 협력사 우선 선정과 삼 년간 독점 납품 그리고 대금 지급일을 늦추는 조항이 적혀 있었다. 우측 상단에는 흐릿한 코드가 인쇄돼 있었다.
ITF-04-17.
“내부 검토용 초안입니다.”
김 상무가 손을 내밀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문서를 협력사에 보낸 건 문제 아닌가요?”
“협력사와의 사전 협의 과정에서 나온 자료일 뿐입니다.”
“사전 협의라면 발신 부서와 승인자가 있어야 합니다. 이 문서에는 둘 다 없습니다.”
회의실 안의 시선이 지혁에게 쏠렸다. 그는 곧장 말하지 않았다. 은우가 시선을 보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오늘 회의록에 적어 주십시오. W&U 랩의 의사 결정권을 보장하고 전무인 저는 발주나 협력사 선정에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김 상무가 비웃듯 물었다.
“배우자 회사에 발주하는데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이 통할까요?”
“통하게 만들 겁니다.”
은우가 잘라 말했다.
“공개된 조건으로 경쟁 제안을 받고 신성리테일은 발주처로만 남으세요. 제 배우자라는 이유로 W&U를 선택했다는 문장도 삭제합니다. 대신 제가 공급망과 소비자 검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섯 주 안에 성과가 나오겠습니까?”
“성과의 기준부터 다시 정하죠. 이름을 친환경으로 바꾸는 건 성과가 아닙니다. 협력사가 손해를 감수하지 않고 소비자가 다시 사는 구조를 만드는 게 성과입니다.”
김 상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결국 브리핑은 W&U의 독립 검토안을 받아 적는 것으로 끝났다. 단 협력사 현장 조사는 당일 안에 끝내야 했다.
은우는 오후가 되기 전에 도심의 작은 리필숍으로 향했다.
가게 안쪽 선반에는 이름 없는 세제와 샴푸가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손님들은 필요한 만큼만 덜어 갔고 빈 용기는 다시 가져왔다.
“들꽃이 신성리테일에 들어간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가게를 운영하는 대표가 말했다.
“그런데 저는 참여하지 않으려고요.”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소량으로 시작한다더니 계약 조건이 계속 바뀌었어요. 신성리테일 매장에만 납품하고 다른 매장에는 같은 제품을 팔지 말라는 조항도 붙었습니다. 대금은 납품 뒤 90일 후라고 적혀 있고요.”
대표가 내민 사본의 우측 상단에 같은 코드가 보였다.
“이 문서를 누가 보냈습니까?”
“협력사 관리팀이라고 했습니다. 담당자 이름은 없었고 메일 주소도 일반 계정이었어요.”
은우는 사진을 찍기 전에 사본을 들어도 되는지 물었다.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소라가 촬영했다.
세라에게서 곧 전화가 왔다.
“대표님. 코드가 찍힌 파일의 작성 시각을 확인했습니다. 신성리테일 공식 제안서가 만들어지기 하루 전입니다.”
“발송 계정은요?”
“ITF-04-17 폐쇄 계정의 표시명을 사용했습니다. 다만 계정 자체가 접속한 건지 외부에서 이름만 바꾼 건지는 아직 모릅니다.”
은우는 유리병에 붙은 작은 생산자 라벨을 바라보았다. 라벨에는 제조자의 이름과 연락처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계약을 거절하셔도 됩니다. 대신 조건을 바꾼 안을 다시 만들겠습니다. 그때 검토해 주시겠어요?”
“신성 이름으로 또 압박이 오면요?”
“이번에는 발신자와 승인자부터 공개하겠습니다.”
가게를 나선 뒤 지혁이 주차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 문을 열어 주려던 그는 손을 멈췄다.
“태워 드려도 됩니까?”
은우는 잠시 그를 보았다.
“네. 대신 다음 장소는 제가 정해요.”
“알겠습니다.”
차 안에서 지혁은 현장에 대해 묻지 않았다. 은우가 먼저 사본 내용을 설명하자 그때서야 메모를 꺼냈다.
“선지급이 필요하면 예산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제가 요청하면요.”
“네.”
그 대답이 짧아서 은우는 오히려 웃음이 날 뻔했다.
W&U 랩으로 돌아오자 소라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고체 세제 제조사 세 곳 중 두 곳이 참여를 철회했어요. 방금 김 상무 쪽에 메일을 보냈다고 합니다.”
화면에는 짧은 문장이 떠 있었다.
기존 조건으로는 생산을 맡을 수 없습니다. 신성리테일과 거래하기 어렵습니다.
김 상무의 전화가 바로 울렸다.
“이래서 내부 경험을 따르자고 한 겁니다. 지금이라도 기존 대행사에 맡기면 일정은 맞출 수 있습니다.”
“기존 대행사가 협력사 조건을 해결해 줍니까?”
“브랜드를 만들면 공급사는 따라옵니다.”
“따라오지 않는 공급사를 밀어붙이는 건 브랜드가 아니라 유통 압박입니다.”
은우는 회의실로 들어가 화이트보드에 숫자를 적었다.
6주.
열두 매장.
대량 발주.
그 아래에 선을 그었다.
2주 파일럿.
세 곳의 생산자.
세 개 매장.
“대량 입점 대신 소량 파일럿으로 시작합니다. 첫 생산분은 신성리테일이 선지급하고 반품 기준과 생산자 이름을 공개합니다. 독점 조항은 없애고 두 주 뒤 판매와 재사용 데이터를 함께 공개합니다.”
소라가 계산기를 두드렸다.
“수량은 줄지만 브랜드 검증에는 시간이 더 필요해요.”
“리필숍에서 확인한 재사용 횟수와 반품 이유를 공개해야 들꽃이 실제로 다시 쓰이는 브랜드인지 검증할 수 있어요. 대형 입점 숫자만으로는 그걸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광고비 중 일부를 검증 비용으로 전환합니다. 제품이 잘 팔렸다는 말보다 누가 만들었고 몇 번 다시 쓰였는지가 먼저 나와야 해요.”
지혁이 문밖에서 조용히 말했다.
“그 조건이면 신성리테일의 선지급 예산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은우가 그를 보았다.
“확인해 주세요.”
“네.”
지혁은 김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길지 않았다. 그는 승인된 예산 범위와 독립 검수 비용을 확인한 뒤 바로 끊었다.
“가능합니다. 단 신사업본부는 대량 입점 지표가 빠진다고 반발할 겁니다.”
“반발하는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도 제 일입니다.”
은우는 새로운 제안서의 첫 문장을 적었다.
‘들꽃은 친환경 제품을 파는 브랜드가 아니라 다시 쓰는 관계를 설계하는 브랜드입니다.’
저녁 회의에서 김 상무는 수정안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건 신성리테일의 캠페인이 아니라 협력사 공동 사업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요청하셨습니다. 외부 전략 파트너에게 공급망 검토까지 맡기셨으니까요.”
“파일럿에서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집니까?”
“전략과 검증은 W&U가 책임집니다. 생산비와 납품 대금은 발주처가 계약대로 책임져야 합니다. 책임을 맡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비용을 떠넘기지는 않겠습니다.”
김 상무는 지혁을 바라보았다.
“전무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지혁은 은우를 먼저 보았다.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의견은 W&U의 조건을 따르는 겁니다. 단 저는 발주 결재에서 빠지겠습니다.”
그 말이 회의록에 적혔다.
김 상무는 결국 세 개 매장과 세 곳의 생산자를 대상으로 한 조건부 파일럿을 승인했다. 계약서에는 선지급 비율과 반품 기준 그리고 생산자 이름 공개가 적혔다. 협력사에 대한 독점 요구와 무단 자료 전송은 즉시 감사 사유가 된다는 조항도 들어갔다.
서명이 끝나자 소라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대표님. 첫 독립 수주예요.”
“첫 수주가 아니라 첫 번째로 우리가 결정권을 지킨 수주예요.”
은우는 계약서를 접지 않고 파일 안에 그대로 넣었다.
그때 세라에게서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다.
제목은 ITF-04-17 접속 로그 원본이었다.
“폐쇄 계정이 들꽃 제안서 초안보다 먼저 접속했습니다.”
세라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표시명은 JH-04로 마스킹돼 있습니다. 계정 주인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어요.”
은우는 지혁을 보았다. 그의 이니셜과 겹치는 표기였다.
“이름이 겹친다고 지혁 씨를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지혁은 파일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내 계정과 접근 기록도 모두 열어 두겠습니다.”
세라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JH-04 접속 직후 들꽃 협력사 명단 파일이 외부 메일 서버로 전송됐습니다.”
“어느 서버입니까?”
“대성기획 도메인과 연결된 서버입니다.”
은우의 손가락이 계약서 모서리에서 멈췄다.
첫 수주는 끝났지만 누군가는 시작도 하기 전에 들꽃의 생산자들을 흔들고 있었다.
지혁이 낮게 물었다.
“지금 확인할까요?”
은우는 메일 원본을 내려받는 세라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네. 이번에는 제가 요청합니다. 누가 우리 이름을 빌렸는지 끝까지 확인해요.”
열린 서재 문 너머로 밤의 불빛이 번졌다. W&U의 첫 계약서 옆에 새로운 파일명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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