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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30화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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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경계의 계약

인쇄소 안쪽 벽시계가 오전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은우는 낡은 작업대 위에 펼쳐진 장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워진 발신 번호의 흔적과 그 아래 남은 문장이 어젯밤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원본 자료는 계약서보다 먼저 확보할 것.’

지혁은 장부 옆에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서 있었다. 전화를 걸지도 메시지를 보내지도 않았다. 은우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서정호가 재단기 옆에서 마른기침을 했다.

“동우출판에서는 오늘 오전까지 답을 달라고 했어. 신성리테일이 미수금을 정리해 준다는데 그걸 거절하면 우리 물량도 끊길 수 있대.”

“거절할 필요는 없어요.”

은우가 장부를 덮었다.

“다만 누구의 이름으로 어떤 조건을 쓰는지는 우리가 결정해야 합니다.”

지혁이 재킷 안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봉투 앞면에는 동우출판과 미래문구가 각각 적혀 있었다.

“두 거래선에 보낸 제안 철회 통지서입니다.”

“철회하면 거래선이 손해를 보지 않습니까?”

“그래서 재협상 일정과 비용 보전 조항을 함께 보냈습니다. 기존 거래가 중단되는 동안 생기는 검토 비용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지혁은 서류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잘못 판단했습니다. 따님과 상의하지 않았고 거래 주체까지 바꾸려 했습니다. 도움보다 통제에 가까웠습니다.”

서정호가 난처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전무님이 도와주려고 한 것까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선의였다는 이유로 결정권을 가져도 되는 건 아닙니다.”

지혁의 대답은 짧았다.

은우의 손가락이 장부 모서리를 눌렀다. 사과만으로 마음이 풀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지혁은 자신이 옳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늘 미팅은 제가 진행합니다.”

“네.”

“제 배우자라는 사실과 신성의 보증은 먼저 꺼내지 마세요. 제가 필요하다고 말할 때만 발언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지혁은 또 한 걸음 물러났다.

“당신이 정한 조건으로 다시 제안할 준비를 해 왔습니다. 최종 결정은 당신이 하셔야 합니다.”

봉투 안에는 원가표와 생산 수량표 그리고 계약서 초안이 들어 있었다. 계약 주체를 신성리테일로 바꾸지 않고 대금은 에스크로 계좌를 통해 지급한다는 조항이 선명했다. 신성리테일의 발주는 별도 공개 견적을 거친다는 문장도 있었다.

은우는 서류를 덮었다.

“좋아요. 동우출판부터 갑시다.”


동우출판 회의실에는 김도현 차장과 미래문구 박미정 대표가 함께 와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에는 경계와 피로가 겹쳐 있었다.

“신성리테일에서 연락이 왔을 때는 안도했습니다.”

김도현이 말했다.

“미수금이 묶인 채로는 인쇄소 물량을 계속 받기 어려웠으니까요. 그런데 철회 통지서가 오니 저희도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지혁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보낸 제안은 거래 주체 변경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서정호 인쇄소의 동의 없이 진행할 수 없는 조건이라 철회합니다.”

그는 그 말 뒤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은우가 자료를 펼쳤다.

“오늘 드릴 안은 세 가지입니다. 기존 거래 관계를 유지합니다. 신성리테일이 새 발주를 내더라도 인쇄소와는 별도 계약을 씁니다. 단가는 원가와 생산 가능 수량을 기준으로 공개합니다.”

박미정이 원가표를 훑었다.

“지금보다 낮춰 달라는 뜻은 아니네요.”

“낮추지도 부풀리지도 않습니다. 용지와 잉크 그리고 인건비를 항목별로 적고 기본 원가에 합리적인 마진만 더했습니다.”

서정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금 낮추면 당장 물량이라도 붙잡을 수 있지 않겠니?”

“헐값으로 받은 물량은 다음 달 인쇄소를 더 어렵게 만들어요.”

은우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우리가 부탁하는 사람이 아니라 납품 조건을 제시하는 거래 당사자로 서야 해요.”

박미정이 수량표를 가리켰다.

“한 번에 삼천 세트는 부담스럽습니다. 지난번에도 정산이 늦어져서 자금이 묶였습니다.”

“첫 발주는 오백 세트로 나누겠습니다. 검수 기준을 계약서에 먼저 적고 첫 납품 확인 뒤 다음 물량을 진행합니다.”

김도현의 시선이 지혁에게 향했다.

“신성 쪽 보증은요?”

은우가 입을 열기 전에 지혁이 멈칫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말했다.

“보증을 명분으로 거래에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신성리테일이 별도 발주를 내는 경우에도 같은 단가와 에스크로 조건을 적용하겠습니다. 인쇄소가 원하지 않으면 그 발주를 받을 의무도 없습니다.”

“전무님 회사가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겁니까?”

“정상 거래의 비용을 부담하는 겁니다. 부채를 명분으로 독점 조건을 얻는 것이야말로 더 큰 손해입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누그러졌다.

은우는 거래선에서 보관하던 정산 안내문 사본을 꺼냈다. 하단에는 신성건설 협력업체 관리팀 도장이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이 문서가 도착한 뒤 발주를 줄이신 건가요?”

“네. 신성건설과 연결된 업체 쪽에서 정산 지연 가능성이 있으니 거래 규모를 낮추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김도현이 사본을 뒤집었다.

“도장 옆의 숫자도 이상했습니다. ITF-04-17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은우의 눈빛이 변했다. 세라가 보낸 재단 보관실 초안 사진에도 비슷한 숫자가 붙어 있었다.

“이 번호는 확인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거래 조건부터 확정하시죠.”

두 거래선은 소량 선발주와 분할 결제에 동의했다. 서정호 인쇄소의 거래 주체는 그대로였고 신성리테일의 이름은 계약서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서정호가 서명한 뒤 펜을 내려놓았다.

“네가 나를 대신해 숨기는 줄 알았는데 거래 당사자로 세워 주는구나.”

“아버지가 만든 품질이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에요.”

지혁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은우의 뒤에 서 있었다. 한 번의 발언조차 그녀의 신호를 기다린 뒤에 했다.

그 조심스러움이 은우의 마음 한쪽을 건드렸다.


W&U 랩으로 돌아오자 세라가 노트북 세 대를 책상 위에 펼쳐 두었다.

“ITF는 예전 신성리테일의 혁신사업지원 TF입니다. 폐쇄·이관 로그상 해산된 조직이고 공식 승인 체계도 폐기됐어요.”

세라가 화면을 넘겼다.

“그런데 협력업체 관리팀이 최근 문서에 같은 코드 형식을 다시 사용했습니다. 발급자 계정은 비활성화됐지만 코드가 사용된 시점과 문서 원본은 남아 있습니다.”

인쇄소 정산 안내문과 재단 보관실 초안 사진 그리고 정우진 기자의 휴대폰으로 도착한 메시지가 나란히 놓였다.

“문장 배열도 같습니다. ‘원본 자료’가 먼저 나오고 ‘계약서’가 그다음에 나옵니다.”

소라가 물었다.

“그럼 지성 부사장님이 한 건가요?”

“아직은 아니에요.”

은우가 잘라 말했다.

“의심과 증거를 섞으면 다음 문서도 놓칩니다. 누가 폐쇄된 승인 코드를 다시 살렸는지부터 확인해야 해요.”

지혁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었다.

“신성 내부 자료 접근권이 필요하겠군요.”

“협력업체 관리팀의 최근 3년 거래 기록과 TF 폐쇄·이관 로그만 확인해 줄 수 있습니까? 자료를 받는 과정에서 제 이름이나 W&U를 앞세우지는 마세요.”

“당신이 원하는 범위만 열겠습니다.”

지혁이 세라에게 말했다.

“정식 열람 절차를 준비해 주세요.”

“이번에는 허락을 먼저 받으셨네요.”

세라의 말에 지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배우는 중입니다.”

그날 저녁 펜트하우스 서재에서 지혁은 종이 한 장을 은우에게 건넸다.

가족과 회사에 관한 개입 절차.

첫째. 사전 동의 없이 거래 주체와 자산을 변경하지 않는다.

둘째. 긴급 상황에서는 최소한의 보전 조치만 취하고 즉시 보고한다.

셋째. 거절을 받으면 대안을 제시하되 상대의 결정을 대신하지 않는다.

은우는 종이를 끝까지 읽었다.

“이걸 계약 부속 합의서로 남기자는 겁니까?”

“네.”

“제가 바로 용서할 거라고 생각하진 마세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과를 받았다고 신뢰가 원상복구되는 것도 아니고요.”

“압니다.”

지혁은 잠시 손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위험할 때 먼저 움직이면 지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필요한 건 내가 앞에 서는 일이 아니라 어디로 갈지 스스로 정하는 일이더군요.”

은우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지키려다 선택권을 빼앗았던 손이었다. 지금은 문서 한 장을 내밀고 자신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혁 씨.”

“네.”

“손을 잡아도 됩니까?”

지혁이 먼저 물었다.

은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었다.

“오늘은 됩니다.”

지혁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왔다. 갑자기 힘을 주지 않고 놓고 싶으면 언제든 놓을 수 있는 정도로만 감쌌다.

“지금도 손을 놓을까요?”

“아니요.”

대답이 너무 빨리 나왔다. 은우는 시선을 피했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지혁이 경계를 지킬수록 그가 만든 거리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고 싶어졌다. 그 사실이 계약서의 어떤 문장보다 위험했다.


소라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놓았다.

“대표님. 신성리테일에서 W&U에 외부 전략 제안서 요청이 들어왔어요.”

소라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친환경 생활 브랜드 ‘들꽃’의 초기 방향을 독립적으로 맡길 수 있는지 검토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요청서에는 지혁의 지분이나 신성가의 후원에 관한 문장이 없었다. 발주처와 외부 전략 파트너의 역할만 적혀 있었다.

“받으시겠습니까?”

지혁이 물었다.

“검토는 해 보죠. 조건이 있습니다.”

은우는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의사 결정은 W&U가 맡습니다. 신성리테일은 발주처로만 참여합니다. 제 배우자라는 이유로 저를 선택했다는 문장도 넣지 않아요.”

“그 조건으로 전달하겠습니다.”

“지혁 씨가 전달하지 마세요. 민규 과장에게 제가 직접 답하겠습니다. 지혁 씨는 내부 자료 접근권만 확인해 주세요.”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은우는 책상 위의 개입 절차 문서를 계약서 파일 안에 넣었다. 아직 서명하지 않았지만 버리지도 않았다.

노트북을 열고 새 문서의 제목을 입력했다.

W&U 랩 - 들꽃 외부 전략 제안서

커서가 깜빡이는 화면 옆으로 지혁의 손이 조용히 놓였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대신 입력하지 않았다.

은우는 그 침묵을 확인한 뒤 첫 문장을 썼다.

‘이름을 빌리지 않고도 살아남는 브랜드는 무엇으로 시작되는가.’

그때 세라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제목은 ITF-04-17 승인 코드 원본 확인이었다.

첨부된 폐쇄 로그에는 승인 코드의 마지막 사용일이 적혀 있었다.

삼 년 전이 아니었다.

불과 두 달 전이었다.

은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지혁도 화면을 보았지만 그녀보다 먼저 말하지 않았다.

서재의 문은 열려 있었다. 이번에는 누구도 닫으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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