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29화: 선의의 경계선
아침 일곱 시 십 분. 지혁은 서재 문을 열어 둔 채 태블릿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서의 제목은 어젯밤과 같았다. 서정호 운영 인쇄소 납품 거래선 정상화 지원 방안.
“동우출판과 미래문구의 미수금은 신성리테일 협력기금으로 우선 매입해.”
수화기 너머 민규가 잠시 말을 잃었다.
“전무님. 그러면 두 거래선의 계약 주체가 신성리테일 쪽으로 넘어갑니다.”
“납품 재개가 먼저야. 서정호 대표의 인쇄소가 거래선에서 완전히 밀리면 가처분 결정이 나오기 전에 문을 닫을 수 있어.”
“대표님께 말씀은 하셨습니까?”
지혁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아직이다.”
“은우 대표님이 알게 되면 반발하실 겁니다. 지난번에도 도움을 받는 대신 거래 구조를 직접 확인하겠다고 하셨고요.”
“이번 건은 도움을 받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오늘 안에 위험을 없애야 해.”
지혁은 문서 하단의 승인 칸을 눌렀다. 서명 대신 보류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안으로 서정호 대표에게 직접 연락하지 마. 은우 씨가 알기 전까지는 가족에게 접근하지 않는다.”
민규가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지혁은 이미 동우출판 담당자에게 전달된 제안서를 떠올리고 있었다. 신성의 이름을 숨긴 채 시작한 협상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전됐다.
서재 밖에서 커피 내리는 소리가 났다. 지혁은 태블릿을 닫고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지혁 씨. 아침 회의 전에 이 파일을 봐도 될까요?”
은우가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내부 자료입니다.”
“그럼 나중에 보여주세요.”
은우는 더 묻지 않고 돌아섰다. 하지만 지혁은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주머니를 스친 것을 보았다.
W&U 랩에 도착한 뒤 은우는 전날 갈라 성과 보고서를 검토했다. 후원금은 예상치를 웃돌았고 윤해정의 작업실에는 신규 주문이 쌓이고 있었다.
소라가 노트북을 들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오늘 오전에 동우출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은우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와 거래한 적은 없는데요.”
“서정호 인쇄소의 납품처입니다. 담당자가 신성 계열사 쪽에서 미수금을 정리하고 거래를 재개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대요. 대신 다음 계약부터는 발주와 정산을 신성리테일 협력사 명의로 바꾸자는 조건이 붙었다고 합니다.”
은우의 손이 보고서 위에서 멎었다.
“누가 제안했는지는요?”
“신성이라는 이름만 전달받았답니다. 담당자는 대표님이 관여한 일인지 묻더군요.”
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젯밤 서재 문이 열려 있었고 지혁은 그녀가 보지 못하게 태블릿을 감췄다. 민규가 아침에 말끝을 흐린 것도 떠올랐다.
“동우출판에 제안서 원문을 보내 달라고 하세요. 그리고 미래문구에도 같은 연락이 갔는지 확인해 주세요.”
“지혁 전무님께 먼저 물어보실 건가요?”
“확인할 자료를 모은 뒤에요.”
은우는 오후 회의를 취소하고 펜트하우스로 돌아갔다. 서재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서랍을 열자 파일 하나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서정호 운영 인쇄소 채무 현황 및 납품 거래선 정상화 지원 방안.
은우는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빠르게 넘겼다. 신성리테일이 두 거래선의 미수금을 대신 지급하고 신규 발주를 보증하는 안이었다. 겉으로는 구제였지만 거래선의 계약 상대가 바뀌면 서정호 인쇄소는 신성의 하청 구조 안으로 들어간다.
마지막 장에는 지혁의 메모가 있었다.
‘은우 씨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처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지혁이 걸음을 멈췄다.
“그 문장을 쓰신 분이 지금 들어오셨네요. 제게 설명해 주세요.”
은우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지혁은 변명하지 않고 문을 닫지 않은 채 책상 앞에 섰다.
“보셨군요.”
“보지 말아야 할 문서였습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왜 제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지혁의 턱이 굳었다.
“당신 부모님의 인쇄소가 압류 절차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래선 두 곳은 이미 미수금 지급이 늦어졌다는 이유로 발주를 줄이고 있고요. 내가 가진 자금과 신성의 신용을 쓰면 적어도 당장 문을 닫는 일은 막을 수 있습니다.”
“제가 묻는 건 해결할 수 있느냐가 아니에요. 왜 제 동의 없이 해결하려 했느냐는 겁니다.”
“동의받는 동안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건 제 선택을 기다릴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은우가 파일을 들어 올렸다.
“이건 제 부모님을 돕는 문서가 아니에요. 거래 주체를 바꾸고 신성의 납품망으로 편입시키는 문서입니다. 아버지가 빚을 갚기 위해 인쇄소를 지켰는데 이제는 신성의 이름을 빌려야만 살아남는 구조가 되죠.”
“빌리는 이름이 아니라 안전장치입니다.”
“저는 이름을 빌려서 살아남는 방식이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 압니다.”
은우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처음 계약서를 쓸 때도 제게 그랬죠. 서로의 회사와 가족에 관해 상대의 동의 없는 결정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지혁 씨는 제 가족을 위험으로 분류하고 혼자 결재하려 했어요.”
“당신이 자존심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까 봐 그랬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은우의 표정이 굳었다.
“제 자존심을 지켜주는 방법은 제가 결정할 기회를 빼앗는 게 아닙니다.”
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은우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는 분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했다는 기색이 더 아팠다.
“나는 당신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저는 지켜져야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압니다.”
“모르시는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은우는 파일을 내려놓았다.
“동우출판과 미래문구에 들어간 제안은 오늘 철회하세요. 돈을 보낼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아버지와 직접 확인하고 거래선과 다시 협상하겠습니다.”
“이미 제안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제가 수습해야 해요.”
지혁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당신 혼자 가겠다는 겁니까?”
“아니요. 제 방식으로 가겠다는 겁니다. 필요하면 함께 와도 됩니다. 다만 제가 부탁하기 전에는 앞에 나서지 마세요.”
그 문장은 계약서의 조항보다 단단했다.
인쇄소 셔터는 반쯤 내려가 있었다. 서정호는 낡은 재단기 옆에서 거래 명세표를 정리하고 있었다.
“은우야. 이런 데까지 웬일이냐?”
“아버지. 동우출판에서 신성 이름으로 미수금을 정리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으셨어요?”
서정호의 손이 멈췄다.
“네가 어떻게 알았어?”
“저한테 말하지 않고 받으려고 하셨습니까?”
“받으려고 한 게 아니다.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네가 요즘 신성가 일로 바쁜데 괜히 걱정시킬까 봐…….”
“조건은요?”
서정호는 명세표 아래에 끼워 둔 종이를 꺼냈다.
“동우출판 미수금 일부를 대신 지급하고 앞으로 신성리테일 발주 물량을 연결해 주겠다는군. 대신 계약서를 새로 쓰자고 했어.”
은우는 종이를 읽었다. 예상대로 발주처 변경과 정산 계좌 지정 조항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 이건 도움을 받는 게 아니라 거래선을 넘기는 일입니다.”
“그래도 인쇄소가 살아야 하지 않겠니?”
“살리는 방법은 제가 찾을게요. 빚이 신성건설 하청업체의 어음 문제에서 시작됐다는 자료도 있고요. 책임져야 할 곳에 정식으로 청구하고 거래선에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환 계획을 제시하면 됩니다.”
서정호는 딸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네 남편이 도와주겠다고 한 거냐?”
은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
“선의로 움직인 건 맞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제가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인쇄소 밖에서 자동차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지혁이 안으로 들어왔지만 문턱을 넘은 뒤 더 다가오지 않았다.
“저는 거래선에 들어간 제안을 철회하겠습니다.”
지혁이 서정호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서정호가 난처한 얼굴로 은우와 지혁을 번갈아 보았다.
은우는 지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철회만으로 끝내지 마세요. 앞으로 제 가족과 회사에 관한 일은 반드시 먼저 물어보세요. 선의도 동의 없이 행사되면 간섭입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대답하지 않아도 결정하지 말고요.”
지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습니다.”
세 사람이 계약서를 다시 정리하는 동안 세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은우가 스피커를 켰다.
“대표님. 인쇄소 명세표를 확인하다가 이상한 도장을 찾았습니다. 최근 거래선에 전달된 정산 안내문 뒷면에 신성건설 협력업체 관리팀의 발신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그 안내문은 누가 보냈습니까?”
“발신처는 협력업체 관리팀으로 되어 있지만 공식 문서 번호가 없습니다. 그리고 같은 도장이 재단 보관실에서 촬영된 초안 사진 파일의 메타데이터에 남아 있습니다.”
지혁의 얼굴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정우진 기자가 찾던 자료와 연결되는군요.”
은우가 낮게 말했다.
세라는 말을 이었다.
“아직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압박은 전무님이 지원안을 검토하기 전부터 시작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은우는 지혁을 바라보았다. 선의로 시작한 개입은 분명 잘못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 선의를 이용해 인쇄소와 지혁을 같은 함정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지혁 씨.”
“말씀하세요.”
“이번에는 제가 묻겠습니다. 신성건설 협력업체 관리팀의 거래 기록을 함께 확인해 주실 수 있습니까?”
지혁은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질문이었다.
“네. 당신이 원한다면요.”
은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인쇄소 안쪽 벽에는 오래된 납품 장부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세라가 보낸 사진 속 도장은 그중 3년 전 장부의 한 페이지와 똑같았다.
은우가 장부를 펼치는 순간 낯선 발신처 아래에 짧은 문장이 드러났다.
‘원본 자료는 계약서보다 먼저 확보할 것.’
재단 보관실에서 정우진의 휴대폰으로 도착했던 메시지와 같은 문장이었다.
이번에는 지혁도 그 문장을 보았다.
은우는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이제 누가 우리를 한꺼번에 묶으려 했는지 찾아야겠네요.”
지혁은 대답 대신 장부 옆에 자신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은우가 먼저 손을 뻗을 때까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장부 가장자리에는 이미 지워진 발신 번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오래전부터 같은 손으로 거래의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