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26화: 빌려주는 이름은 없습니다
정우진 기자의 휴대폰 화면이 꺼진 뒤에도 은우는 그 문장을 놓지 못했다.
원본은 보관실에 있다.
계약서보다 먼저 그걸 확보해.
원본 드레스는 보존 케이스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 메시지가 노리는 것이 드레스 한 벌뿐이라면 굳이 계약서보다 먼저라는 말이 붙을 이유가 없었다.
“보관실을 즉시 폐쇄하겠습니다.”
경호팀장의 목소리는 낮았다.
지혁은 곧장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은우가 그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폐쇄는 하되 사람을 몰아내지는 마세요.”
경호팀장이 은우를 보았다.
“보안상 위험합니다.”
“그래서 절차가 필요합니다. 접근 로그, CCTV 사본, 물품 목록부터 확보해 주세요. 보관실 안의 물건을 만지는 사람은 재단 법무 담당자와 명희 여사님 비서실로 제한하고요.”
지혁의 시선이 은우에게 닿았다.
“당신이 직접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알아요. 지금은 안 들어갑니다.”
그 대답에 지혁의 굳은 턱선이 조금 풀렸다. 그는 문을 당장 막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은우가 세운 선을 건너오지는 않았다.
“민규 씨.”
“네, 서 대표님.”
“정 기자는 운영실에서 자료 출처와 출입 경위를 제출받으세요. 외부 연락은 제한하되 장비 압수는 하지 말고요. 압수하면 우리가 불리해집니다.”
“절차대로 하겠습니다.”
은우는 다시 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구 전시 앞에서는 윤해정의 손이 천을 자르는 영상이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방금 전의 소란을 이야기하면서도 투명 보드에 뜬 기부금 집행 내역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
행사를 멈추면 공격자는 성공한다.
은우는 그 단순한 결론을 붙잡았다.
“갈라는 끝까지 갑니다.”
지혁이 짧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은우는 그를 보았다.
“혼자 괜찮다고 말하면 싫다면서요.”
지혁의 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괜찮지 않은 부분은 말하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제 옆에서 시간을 벌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경호팀과 민규에게 손짓해 동선을 조정했다. 은우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넓어졌고 소란이 번질 길은 좁아졌다.
갈라의 마지막 순서가 끝났을 때 박수는 처음보다 자연스러웠다.
윤해정은 제작자 테이블 앞에서 하객 몇 명과 조심스럽게 명함을 주고받고 있었다. 주문 문의가 들어온 화면을 보고도 바로 웃지 못했다.
명희는 그 모습을 오래 지켜보다가 은우를 재단 응접실로 불렀다.
응접실에는 강태준도 와 있었다. 그는 갈라 내내 홀 뒤쪽에서 지켜보다 이제야 의자에 앉았다.
“오늘 행사는 성공입니다.”
명희가 먼저 말했다.
“후원금은 지난해 같은 시간보다 이십삼 퍼센트 늘었고 제작자 지정 후원이 전체의 절반을 넘었어요. 해정 씨 작업실 주문 페이지도 문의가 폭주한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소식입니다.”
은우는 짧게 웃었다.
“다만 무리하게 받으면 안 됩니다. 오늘 뜬 이름이 내일의 야근이 되면 곤란합니다.”
명희의 눈가가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말인데요. 은우 씨가 재단 홍보대사를 맡아 주면 어떨까요.”
지혁은 은우를 보았지만 대답을 대신하지 않았다.
명희는 말을 이었다.
“얼굴마담으로 세우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오늘 당신이 만든 기준을 재단의 방향으로 삼고 싶습니다. 공식 직함이 있으면 외부 공격도 막기 쉽고요.”
은우는 물잔을 내려놓았다.
그 제안이 호의라는 것을 알았다. 명희는 재단이라는 큰 우산 아래 은우를 넣어 지키고 싶은 쪽이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홍보대사는 맡지 않겠습니다.”
명희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태준이 낮게 물었다.
“이유를 들어 보지.”
“제 이름이 재단의 얼굴이 되는 순간 오늘 보여 준 제작자들의 이름은 다시 뒤로 밀립니다. 갈라가 바꾸려 한 순서를 제가 다시 뒤집게 돼요.”
은우는 명희를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저는 강지혁 전무의 아내입니다. 지금 공식 직함을 받으면 아무리 좋은 뜻이어도 재벌가 며느리가 재단 자리를 받았다는 기사부터 나갈 겁니다.”
명희의 입술이 굳었다.
“내가 그 정도 기사 하나 못 막을 사람으로 보이나요?”
“막으실 수 있죠.”
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막을 수 있기 때문에 더 받으면 안 됩니다. 제가 보호받는 그림이 되면 W&U도 재단도 독립성을 잃습니다.”
지혁의 손이 무릎 위에서 천천히 쥐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준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럼 이름도 빌리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건가.”
명희가 그를 날카롭게 보았다.
“여보.”
“시험이 아니라 확인이야.”
태준의 시선은 은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홍보대사는 빠르고 간단하다. 오늘 공격받은 여론을 덮기에도 좋고 재단이 방향을 바꿨다는 신호도 된다. 그보다 나은 안이 있나.”
은우는 가방에서 얇은 파일을 꺼냈다.
“있습니다.”
파일에는 소라가 정리한 갈라 현장 수치와 지혁이 조용히 넘겨준 후원 분류표가 함께 들어 있었다.
“첫째, 제작자 자문위원회를 만듭니다. 지원 대상이 예산 항목과 계약 조건을 검토하게 해요.”
태준의 눈썹이 움직였다.
“지원받는 사람이 예산을 본다?”
“네. 지원받는 사람이 가장 먼저 압니다. 어디서 돈이 새고 어떤 조건이 현장을 망치는지요.”
은우는 다음 장을 넘겼다.
“둘째, 모든 협업 계약에 표준 조항을 넣습니다. 제작 과정 공개 범위, 판매 권리, 2차 사용 동의, 적정 작업 기간을 문서로 남깁니다.”
명희의 시선이 파일 위에 멈췄다.
“셋째는요?”
“분기별 집행 리포트를 공개합니다. 후원자 이름보다 돈이 도착한 곳을 먼저 보여주는 방식으로요. 홍보대사가 필요하면 제가 아니라 이번 분기 지원 제작자들이 돌아가며 맡는 게 맞습니다.”
태준이 파일을 넘기며 짧게 웃었다.
“돈 드는 안이군.”
“홍보대사 위촉식도 돈이 듭니다. 다만 그 돈은 사진에 남고 이 돈은 구조에 남습니다.”
명희가 은우를 바라보았다.
서운함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서 다른 감정이 올라왔다.
“은우 씨는 내가 주는 자리를 자꾸 거절하는군요.”
“자리는 감사합니다. 다만 앉으면 안 되는 의자가 있습니다.”
은우는 정중히 대답했다.
“제가 필요한 건 명패가 아니라 공개된 절차 안에서 기준을 만들 권한입니다.”
명희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럼 홍보대사가 아니라 외부 자문으로 두죠. 보수와 범위는 계약서로 정하고 임기는 갈라 후속 리포트가 나올 때까지. 공개 모집으로 자문위원회를 꾸리고 은우 씨는 첫 회의 설계만 맡아요.”
은우는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건이면 하겠습니다.”
지혁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갔다.
명희가 그를 흘겨보았다.
“너는 왜 네가 칭찬받은 얼굴이니?”
“제가 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더 얄밉구나.”
문밖에서 민규가 노크했다.
“죄송합니다. 보관실 확인이 끝났습니다.”
명희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드레스는요?”
“원본 드레스는 안전합니다. 다만 재단 초기 후원 계약 원본 상자 하나가 열려 있었습니다. 사진 촬영 흔적이 있습니다.”
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계약입니까?”
민규는 태블릿을 내밀었다.
“해정공방 관련 문서입니다. 이명희 여사님이 신성문화재단 설립 초기에 해정공방에 무대 의상 복원 사업을 의뢰하려다 중단된 계약 초안입니다. 최종 집행은 되지 않았습니다.”
명희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 빠졌다.
“그 문서가 아직 남아 있었나요.”
“원본 보관 대상이었습니다.”
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누가 접근했지.”
“운영위원회 보좌진 계정이 쓰였습니다. 실제 사용자는 확인 중입니다.”
은우는 문서 제목을 바라보았다.
해정공방. 이명희. 신성문화재단. 계약 초안.
누군가가 이것을 오늘의 협업 계약과 나란히 놓으면 이야기는 쉽게 왜곡될 수 있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사적인 인연으로 지원 대상을 골랐다.
사실과 다르지만 의혹이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명희가 낮게 말했다.
“내가 짐을 준 셈이군요.”
“아닙니다.”
은우는 바로 답했다.
“여사님이 숨겼으면 짐이 됐겠죠. 지금 알았으니 절차로 풀면 됩니다.”
“은우 씨.”
“그래서 홍보대사를 받으면 안 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제가 재단의 얼굴이 되면 이런 문서 하나가 모든 제작자의 성과를 덮어요.”
명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혁이 조용히 물었다.
“대응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은우는 그가 이번에도 해결책을 먼저 내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싸움을 그녀에게 남겨두는 선택이었다.
“해정 씨에게 먼저 알립니다. 이 문서가 왜곡될 수 있다는 것까지요. 그리고 재단이 중단된 계약 초안과 오늘의 협업 계약을 함께 공개할지 판단해야 합니다.”
“공개하면 어머니 과거까지 기사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사님 동의가 필요합니다.”
은우는 명희를 보았다.
“선택하셔야 합니다. 숨기면 빠르게 조용해질 수 있지만 다음에도 같은 방식으로 흔들릴 겁니다. 공개하면 아프겠지만 기준은 남습니다.”
명희는 한참 동안 태블릿 화면을 보았다.
“내가 말하겠습니다.”
명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떨리지 않았다.
“다만 해정 씨가 원하지 않으면 공방 이름은 빼요. 내 추억 때문에 그 아이의 오늘을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보관실 복도는 홀과 달리 차갑고 조용했다.
은우와 지혁, 명희는 보존 케이스 앞에 섰다. 원본 드레스는 그대로였다. 조명도 온도계도 정해진 숫자 안에 있었다.
문제는 옆 선반의 회색 상자였다.
상자 안에는 오래된 계약 초안과 회의록 사본이 들어 있었다. 흰 장갑을 낀 재단 법무 담당자가 봉투 하나를 들어 올렸다.
“복사 방지용 얇은 종이가 한 장 빠졌습니다.”
태준의 얼굴이 굳었다.
“이미 가져갔다는 뜻이군.”
그때 소라에게서 은우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언니, 이상한 글 예고가 떠. 제목이 신성문화재단의 아름다운 우연, 며느리는 어떻게 후원 대상을 골랐나야. 아직 본문은 없어.]
은우는 화면을 지혁에게 보여 주었다.
지혁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가 막겠습니다.”
“아니요.”
은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먼저 공개합니다. 우리가 고른 사실과 고르지 않은 사실을 분리해서요.”
그녀는 명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여사님. 해정 씨에게 전화해도 될까요.”
명희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세요.”
은우가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지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주차장 경호팀이었다.
지혁은 짧게 받았다.
“말해.”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급했다. 은우에게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다만 지혁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는 것을 보았다.
“검은 승합차?”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비상문이 왜 잠겼습니까.”
은우는 그 순간 지혁의 손끝에서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보관실 복도의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지금 이곳을 보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어딘가 오래전에 닫힌 다른 문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