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좌들의 스폰서가 되었다

6화: 사람을 사러 가볼까
서아린이 마지막으로 받은 문자는 아침 여덟 시 십칠 분에 도착했다.
[전 아카샤 소속자에 대한 업무 자료 반납 및 위약금 납부를 재차 요청합니다.]
그녀는 휴대폰 화면을 끄고 낡은 사무실 창문을 바라보았다. 한때 열두 명의 관리자가 앉아 있던 공간에는 접이식 의자 두 개와 먼지 쌓인 정수기만 남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해지 통보서와 위약금 청구서가 놓여 있었다. 금액은 삼천팔백만 원.
“사람을 버린 쪽에서 장례 비용까지 청구하네.”
서아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카샤는 그녀가 살려 낸 공략팀과 계약서를 전부 가져갔다. 실적이 필요한 동안에는 천재라고 부르더니 필요가 없어지자 회사 자료를 훔친 직원으로 만들었다.
그때 닫힌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서아린 씨?”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단정한 셔츠 차림의 남자가 서류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젊었지만 낡은 사무실을 둘러보는 눈에는 구경꾼 특유의 망설임이 없었다.
“누구시죠?”
“윤성우입니다. 매니저를 찾고 있습니다.”
“구직 사이트에 올린 적 없는데요.”
“찾는 사람은 광고를 기다리지 않으니까요.”
성우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서아린은 앉지 않고 팔짱을 꼈다.
“전 아카샤와 분쟁 중입니다. 회사 자료를 빼돌렸다는 소문도 돌고 있고요. 그런 사람을 왜 찾아오셨죠?”
“소문이 아니라 실적을 봤습니다. 지난 삼 년간 아카샤 하위 공략조의 수익 중 서아린 씨가 배치한 팀의 생존율이 가장 높더군요.”
“자료를 꽤 자세히 보셨네요.”
“길드를 세울 생각이라서요.”
서아린의 눈썹이 움직였다.
“윤성우 씨는 개인 헌터로 등록되어 있던데요.”
“오늘부터 바뀔 겁니다.”
성우가 봉투에서 계약서 초안을 꺼냈다. 대표 윤성우, 전속 운영 관리자 서아린. 기간은 일 년. 기본 급여는 월 삼천만 원. 성과 배당과 별도의 운영 한도까지 적혀 있었다.
서아린은 숫자를 읽다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장난이 지나치네요.”
“장난이면 여기까지 직접 오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조건을 제시하면서 고작 개인 헌터라고요?”
“개인 헌터라서 고용하는 겁니다. 길드 이름도 아직 없고 관리할 사람도 없죠. 대신 돈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는 압니다.”
“운영 자금의 출처는요?”
“현금과 정산 기록으로 보여 드리죠. 다만 오늘 당장 일억 원을 들고 왔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서아린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허풍으로 시작한 사람이라면 꺼내기 어려운 답이었다.
“근처 카페에 가시죠. 협회 정산금과 제가 투입할 현금을 확인하고도 부족하면 돌아가겠습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외투를 집었다. 허풍꾼인지 아닌지는 숫자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카페 구석 자리에 앉자 성우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협회 정산금 입금 내역과 병원비, 월세 납부 기록이 차례로 열렸다. 잔액은 크지 않았지만 출처는 명확했다.
“현금 투입 가능액은 이백칠십만 원입니다.”
서아린은 예상보다 적은 숫자에 눈을 깜박였다.
“길드를 세우기엔 부족하군요.”
“그래서 마나스톤을 제가 보유합니다. 다음 공략에서 확보한 부산물은 현금화하고 수익의 일부를 운영 계좌로 넣습니다. 협회 보증 공략을 세 번 반복하면 한 달 운영 한도 일억 원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예상치일 뿐이잖아요.”
“맞습니다. 그러니 확정 급여와 성과 배당을 구분했습니다. 운영 한도는 공략 수익이 생긴 뒤에만 열립니다.”
서아린은 계약서를 다시 펼쳤다. 월 삼천만 원이라는 큰 숫자 아래에는 급여 지급일, 수익 배당률, 실패 시 책임 범위가 빈틈없이 적혀 있었다.
“아카샤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게 있습니다. 돈이 큰 계약일수록 빠져나갈 문장이 많다는 거예요.”
그녀는 태블릿에 여러 길드의 정산표를 띄웠다.
“저는 결재권을 가져야 합니다. 장비 구매는 대표 승인 없이 할 수 없게 하죠. 반대로 대표가 현장 수익을 개인적으로 빼돌리면 계약은 즉시 해지됩니다.”
“좋습니다.”
“너무 빨리 대답하시네요.”
“돈을 맡기는 사람이 장부를 보지 않는 건 낭비고 장부를 보는 사람이 결재권을 갖지 못하는 건 장식입니다.”
서아린의 시선이 처음으로 성우의 얼굴에 닿았다.
“길드의 핵심은 뭡니까?”
“독립 공략과 공정 정산입니다. 헌터에게 장비 비용을 떠넘기지 않고 전리품을 숨기지 않습니다. 마나스톤은 사전에 정한 방식으로 나눕니다.”
“그렇게 해서 대형 길드와 경쟁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경쟁하지 않습니다. 더 좋은 조건으로 빼앗아 오죠.”
성우는 이백칠십만 원을 그녀가 지정한 법인 준비 계좌로 이체했다. 카페의 작은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렀지만 서아린에게는 입금 알림음만 크게 들렸다.
[운영 준비금 이체가 완료되었습니다.]
“이 돈을 전부 넣고도 다음 공략을 계속할 수 있다고요?”
“마나스톤은 따로 있습니다. 현금과 신성은 쓰임이 다르니까요.”
마지막 문장은 성우가 무심코 흘린 말이었다. 서아린은 그 의미를 정확히 묻지 않았지만 기억해 두었다.
“성좌 권능을 사들인다는 말도 했죠?”
“개인 자산으로 처리할 겁니다. 길드 자금과 섞지 않겠습니다.”
성우는 신성 통장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다. 공개할 수 있는 것은 협회 정산 기록과 자신의 현금뿐이었다.
서아린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게 있군요.”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습니다.”
“그 비밀이 길드 자금과 섞이지 않는다는 보장은요?”
“계약서에 넣으세요. 제 개인 자산과 길드 자산은 완전히 분리합니다. 대신 제 개인 자산을 길드의 담보로 요구하지 마세요.”
그때 카페 입구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서 팀장님. 아직도 새 주인 찾고 계셨습니까?”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아카샤 운영전략실의 김태식이었다.
“김태식 씨는 여전히 남의 계약서를 엿보는 버릇이 있네요.”
“서아린 씨는 실적은 좋아도 조직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돈을 받고 다음에는 회사 정보를 팔 겁니다.”
서아린의 손가락이 멈췄다. 성우는 계약서를 접었다.
“아카샤는 사람을 오래 쓰는 법부터 배우는 게 좋겠군요.”
“뭐라고요?”
“필요할 때는 천재라고 부르고 버릴 때는 도둑이라고 부르는 회사라면 충성심이 아니라 공포만 남습니다. 공포는 급여 명세서에 적히지 않죠.”
김태식의 얼굴이 굳었다.
“아카샤가 이 일을 가만히 보고 있을 것 같습니까?”
“보고 있으면 더 좋습니다. 제가 얼마를 쓰는지 알려 줄 사람이 생기니까요.”
김태식은 입술을 씹고 돌아섰다. 서아린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아주 작게 웃었다.
“겁이 없으시네요.”
“겁이 없어서가 아니라 계산해 봤습니다. 지금 아카샤가 할 수 있는 건 소문과 협회 이의 신청 정도입니다.”
“그건 어떻게 아셨죠?”
“방금 저 사람이 말했으니까요.”
카페를 나서기 전 서아린은 낡은 양피지를 스캔한 사진을 펼쳤다.
“이건 아카샤의 계약 부속 문서입니다. 제가 해고되기 직전에 발견했어요.”
“고대 문자입니까?”
“일반 번역기는 문양을 장식으로 처리하지만 저는 읽을 수 있습니다.”
그녀가 특정 문장을 확대했다.
“여기에는 ‘공략권을 양도받은 자는 계약자의 성좌 후원 수익에 우선권을 가진다’고 적혀 있어요.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후원 수익의 일부가 계약자의 동의 없이 성좌 결사에 귀속된다는 조항이 숨어 있습니다.”
“헌터들은 이걸 알고 있습니까?”
“표준 계약서에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특정 공략권을 받는 팀에만 붙는 별도 조항이에요. 제가 문제를 제기했더니 자료를 훔쳤다는 누명을 썼습니다.”
“그 문서를 가져가도 됩니까?”
“계약하면요.”
“좋습니다. 계약합시다.”
서아린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아직 제 30일 계획도 듣지 않았어요.”
“들으면 더 빨라집니까?”
“첫째, 운영 준비금은 법인 설립과 사무실 보증금으로 묶습니다. 둘째, 공략으로 번 현금은 장비 임대와 인력 영입에 우선 사용합니다. 셋째, 이번 주 안에 협회가 공개한 D급 이상 공략권 세 건을 분석해 수익률과 위험도를 비교합니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넷째, 성우 씨가 직접 뛰는 공략에는 기록 담당과 정산 담당을 붙입니다. 혼자서 모든 권한을 쥐면 길드가 아니라 개인 사업자에 머물 뿐이에요. 다섯째, 성좌 계약서는 제가 검토합니다.”
말끝에 오래 쌓인 분노가 묻어났다. 아카샤가 버린 것은 관리자가 아니라 계약의 구조를 읽는 사람이었다.
“전부 수용하죠.”
“조건을 듣고도요?”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서아린은 계약서 마지막 페이지에 조항을 하나 추가했다.
‘관리자는 대표의 지시를 거부할 수 있다. 단 거부 사유와 대체안을 서면으로 제출한다.’
“이 조항을 넣겠습니다.”
“마음에 드네요.”
“대부분의 대표는 싫어합니다.”
“대부분의 대표가 아니라서요.”
서아린은 계약서에 이름을 적었다.
“서아린. 전속 운영 관리자 계약을 수락하겠습니다.”
성우도 옆에 서명했다.
“윤성우. 대표 계약을 수락하죠.”
두 사람이 손을 맞잡는 순간 성우의 휴대폰 화면이 짧게 깜박였다.
[신규 조직 설립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조직명을 입력하십시오.]
성우는 화면을 서아린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낮별 하나가 희미하게 보였다.
“아스트라.”
“별자리라는 뜻입니까?”
“길을 잃은 사람들이 방향을 찾는 표식이요. 누구의 별이 될지는 스스로 정하는 이름입니다.”
성우는 조직명 입력란에 아스트라를 적었다.
오후 세 시가 지나 서울서부 각성자협회 등록 창구에 두 사람이 도착했다. 서아린은 준비한 서류를 순서대로 펼쳤다.
“법인 대표 등록, 운영 관리자 책임 계약, 운영 준비금 증명, 공략 인력 명부입니다.”
직원이 서류를 넘기다 성우를 보았다.
“실적 등록은 확인되지만 길드 대표 자격으로는 처음이시죠? 운영금 출처 확인이 필요합니다.”
“확인해 주세요.”
성우가 단말기에 손을 대자 협회 정산 기록과 이체 내역이 함께 떠올랐다. 서아린은 그 위에 공략 수익 배분표와 개인 자산 분리 각서를 올렸다.
직원은 서류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예치금만 채우고 운영 규정은 빈칸인 경우가 많았지만 이들은 등록하기도 전에 분쟁이 생길 지점을 먼저 잘라 내고 있었다.
“아스트라 길드의 등록이 승인되었습니다.”
작은 프린터에서 등록증이 나왔다.
성우가 종이를 집어 드는 순간 새로운 알림이 떴다.
[강서 제3폐정수장 지하 복합 게이트 공략권에 대한 이의 신청이 접수되었습니다.] [신청인: 아카샤 운영법인.] [심사 전까지 신규 길드의 공략권 행사가 제한됩니다.]
서아린이 등록증을 받아 들었다.
“생각보다 빠르네요.”
“공략권을 가져가겠다는 뜻입니까?”
“정확히는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공략권을 묶어 두려는 겁니다. 이의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재심사까지 한 달은 걸릴 거예요.”
성우는 알림을 닫았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한 달 안에 아카샤가 포기할 수 없는 공략권을 따내면 되겠네요.”
“그 전에 이의 신청부터 풀어야 합니다.”
“서아린 씨가 방법을 찾고 저는 돈을 대죠.”
“대표님.”
“네.”
“돈만 대는 대표라면 제가 계약하지 않았을 겁니다. 첫 공략에 직접 들어오세요.”
성우는 등록증 아래에 찍힌 아스트라라는 글자를 바라보았다. 혼자 벌어 혼자 쓰던 시절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만든 판 전체가 수익을 내야 했다.
“좋습니다. 첫 공략은 아카샤가 못 가져가게 만들죠.”
서아린은 태블릿을 켰다. 화면에는 협회 공략권 목록과 아카샤의 이의 신청 기록이 동시에 올라왔다.
그녀가 첫 번째 파일을 열자 고대 문자 한 줄이 붉게 변했다.
“이상하네요.”
“뭐가요?”
“아카샤가 단순히 공략권을 막은 게 아닙니다. 이의 신청서에 성좌 계약번호가 연결되어 있어요.”
서아린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성우는 천천히 웃었다.
“좋네요. 돈을 쓸 이유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