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좌들의 스폰서가 되었다

5화: VIP 후원자의 위엄
이른 아침의 각성자협회 강서 지부는 한산했다.
민원실 안쪽 상담실 테이블 위로 푸른색 공문 한 장이 놓였다.
[공적 보증 긴급 게이트 배정 승인서]
[대상: 강서 제3폐정수장 지하 복합 게이트 (D-E급 위험도)]
[보증 주체: 한국각성자협회 서울서부지부]
직원 한지민이 안경을 고쳐 쓰며 서류를 성우 앞으로 밀었다.
“철혈 길드가 포기한 게이트에 대한 공적 재계약 신청이 승인되었습니다. 개인 자격 보증 공략은 지부 창설 이래 두 번째예요.”
“조건은 말씀하신 대로입니까?”
“네. 공략 실패나 이탈 시 발생하는 손해 배상 책임은 협회 보증 기금에서 선처리되며 공략 성공 시 발생하는 모든 전리품과 마나스톤은 팀에 귀속됩니다. 협회 공제 수수료 10%만 제하면 전부요.”
성우는 서류 하단에 거침없이 서명했다.
옆에 앉아 있던 이도윤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길드의 일방적인 공제 장부에 서명을 강요당하던 말단 헌터였다. 그런 그에게 협회 직인이 찍힌 정식 계약서는 낯설기만 했다.
“도윤 씨.”
성우가 부르자 도윤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네, 성우 씨!”
“기본 부산물과 일반 마수 가죽, 이빨은 협회 즉시 매입 창구로 넘깁니다. 거기서 나오는 현금은 수수료를 뺀 뒤 도윤 씨와 재욱 씨가 가져가세요.”
“예? 그럼 성우 씨는요?”
도윤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성우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보스와 정예 마수에서 나오는 마나스톤을 우선 배분받겠습니다. 그 정도면 제 몫으로 충분합니다.”
상담실 구석에서 붕대를 덧감고 있던 차재욱이 헛기침을 삼켰다.
“E급 마나스톤 몇 개보다 가죽과 독낭 부산물이 현금화하기엔 훨씬 빠를 텐데. 자네 치료비가 급하다고 하지 않았나?”
“당장 필요한 현금은 일반 부산물 지분 일부로도 충분히 메웁니다. 마나스톤은 제가 쓸 데가 있어서요.”
성우는 휴대폰 화면을 흘끗 확인했다.
[입금 기한: 금일 17:00까지 / 미납 시 집중 치료실 퇴실 조치]
병원비 잔액은 320만 원. 폐정수장 게이트에서 나올 마수 부산물의 규모를 감안하면 현금 몇백만 원은 금방 확보할 수 있었다.
성우의 진짜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보유 신성: 243]
[무신의 황혼 전용 할인권: 백전의 갑주 (1,200 신성 / 잔여 시간 18시간)]
무신의 황혼이 보낸 1회 한정 쿠폰.
그것을 사들이려면 천 단위가 넘는 신성이 필요했다. 신성을 불리기 위해서는 질 좋은 마나스톤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성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략 제한 시간은 네 시간입니다. 가시죠.”
강서구 외곽의 폐정수장은 짙은 안개와 함께 녹색의 마력 파동을 뿜어내고 있었다.
콘크리트 벽면 곳곳에 마수의 발톱 자국과 독성 점액이 눌어붙어 있었다.
철혈 길드가 위험 수당을 아끼기 위해 방치해 둔 탓에 오염 수위가 D급 경계선까지 치솟은 상태였다.
키이익!
게이트 내부의 거대한 침전조로 진입하자마자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 수십 개가 번뜩였다.
“늪지 스파인 하운드 무리다!”
차재욱이 강철 방패를 바닥에 내리찍으며 소리쳤다.
진흙탕을 박차고 튀어나온 마수들은 가시 돋친 꼬리를 흔들며 침전조 벽을 타고 쇄도했다.
성우의 시야가 푸르게 물들었다.
[투성의 감각이 발동됩니다.]
[전방 12개체의 도약 각도 및 근육 긴장도를 포착합니다.]
공기 중의 마력 흐름이 느려진 것처럼 성우의 망막 위에 선명한 궤적을 그렸다.
제일 먼저 덮쳐온 하운드의 주둥이가 성우의 턱 밑을 스치기 직전, 성우는 반 보 뒤로 물러서며 무게중심을 낮췄다.
허공을 가른 마수의 몸통이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성우의 손에 쥐인 대여 검에 은은한 붉은빛이 감돌았다.
[전쟁 신기의 파편이 무기에 깃듭니다.]
스걱!
검끝이 하운드의 목덜미 신경절을 정확히 스쳐 지나갔다.
화려한 마력의 폭발은 없었다. 하지만 검에 실린 의지와 타격력이 약점에 집중되며 마수의 목이 두 동강 났다.
[마수 처치 확인.]
[마나스톤 1개를 감지했습니다.]
“크르르륵!”
동료의 죽음에 흥분한 하운드 세 마리가 좌우와 상공에서 동시에 덮쳤다.
차재욱이 방패를 밀어붙이며 우측 마수의 진로를 차단했다.
“우측은 막았다!”
“감사합니다.”
성우는 망설임 없이 좌측과 공중의 적을 향해 몸을 비틀었다.
투성의 감각이 마수들의 다음 착지점을 오차 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성우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하운드의 가슴팍을 향해 검자루를 내질렀다. 파편의 각인이 실린 칼끝이 마나 코어를 정통으로 꿰뚫었다.
쩌엉!
단 한 합.
불필요한 동작은 단 하나도 없었다.
뒤에서 정산용 캠과 수거 가방을 들고 있던 도윤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도윤이 보아온 베테랑 C급 헌터들조차 마수 무리를 상대할 때는 마력을 난사하며 거칠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성우는 달랐다. 마력 낭비 없이 상대의 궤적을 미리 읽고 최소한의 동선으로 급소만을 도려내고 있었다.
스파인 하운드 열두 마리가 바닥에 쓰러지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분 남짓이었다.
그리고 침전조 깊은 곳, 오염된 폐수가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그림자가 솟구쳤다.
크아아아악!
천장을 뒤흔드는 포효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온몸이 보랏빛 독액으로 뒤덮인 거대한 마수였다.
[D급 변종 마수: 독혈 늪지포식자]
포식자의 등 뒤에서 수십 개의 독침이 부채꼴로 펼쳐졌다.
차재욱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독액 사출이다! 전원 산개해!”
차재욱이 방패 뒤로 몸을 웅크리며 외쳤다.
하지만 성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비스듬히 눕히며 앞으로 박차고 나갔다.
“성우 씨, 위험해요!”
도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성우의 눈동자에 붉은 선들이 얽히며 독침이 날아올 경로가 격자무늬로 펼쳐졌다.
투성의 감각이 짚어낸 단 하나의 안전지대.
성우는 빗발치는 독침 사이로 몸을 미끄러뜨렸다.
스치듯 지나가는 독풍에 옷자락이 그을렸지만 살갗에는 단 한 방울의 독도 닿지 않았다.
포식자가 거대한 앞발을 치켜들며 성우를 짓이기려 했다.
바로 그 순간, 포식자의 흉부 한가운데에서 붉게 맥동하는 보스 코어가 성우의 시야에 완벽하게 잡혔다.
성우는 대여 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쥐었다.
[전쟁 신기의 파편, 최대 집속.]
검신 전체가 핏빛으로 달아올랐다.
성우의 온 신경과 근육의 힘이 칼끝 한 점으로 응축되었다.
“끝입니다.”
번쩍!
붉은 궤적이 늪지포식자의 흉부를 대각선으로 갈랐다.
단단한 키틴질 껍질과 근육질을 마치 두부를 베듯 통과한 검날이 보스의 심장 코어를 산산조각 냈다.
콰아아앙!
거대한 체구가 중심을 잃고 오염수 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게이트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녹색 독무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D급 변종 게이트 보스를 격파했습니다.]
[게이트 폐쇄 절차가 시작됩니다.]
성우는 숨을 고르며 검을 거두었다.
손목이 뻐근했지만 몸에 큰 무리는 없었다. 파편의 반동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정확하고 깔끔하게 힘을 집중한 덕분이었다.
차재욱이 멍하니 방패를 내렸다.
“……말도 안 되는군. D급 변종 보스를 단독으로 일격에 끝내다니.”
도윤 역시 떨리는 손으로 단말기에 공략 완료 신호를 찍었다.
성우는 보스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짙푸른 마나스톤과 정예석들을 주워 들며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수거하죠. 정산할 시간입니다.”
공략 종료 후 한 시간 뒤, 협회 정산실.
테이블 위에는 도윤이 작성한 깔끔한 품목별 정산서가 놓여 있었다.
[총수익 산출 내역]
늪지 하운드 가죽 및 독낭 12세트: 420만 원
늪지포식자 희귀 외피 및 부산물: 380만 원
공제: 협회 보증 수수료 10% (80만 원)
실지급 현금: 720만 원
마나스톤: D급 변종 코어 1개, 상급 마나스톤 4개, 일반석 12개 (윤성우 전액 인수)
도윤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결과를 알렸다.
“현금 정산금 720만 원 중 재욱 님께 300만 원, 제 몫으로 150만 원, 그리고 성우 씨 몫으로 270만 원이 배정되었습니다.”
차재욱은 입금 알림을 확인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철혈 밑에서 석 달 동안 구르며 번 돈보다 오늘 두 시간 동안 번 게 더 많군. 고맙네, 성우 군.”
“정당한 몫을 나눈 것뿐입니다.”
성우는 협회 단말기로 들어온 270만 원에 기존 보유 잔고를 더해 곧바로 병원 가상계좌로 320만 원을 송금했다.
[강서연세병원: 입원 및 치료비 완납 처리되었습니다. 정상 진료가 유지됩니다.]
이어 밀려 있던 원룸 월세 45만 원까지 깔끔하게 이체했다.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던 무거운 현실의 족쇄가 단번에 풀려나가는 기분이었다.
‘현실 문제는 이걸로 정리됐다.’
이제 남은 것은 성좌와의 거래였다.
성우는 배낭에 담긴 푸른빛의 마나스톤들을 응시했다.
D급 변종 코어 1개와 정예 마나스톤 4개, 일반석 12개. 그리고 어제 도윤에게 맡겨두었던 푸른 마나스톤 3개까지 모두 성우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성우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앉았다.
그가 손을 뻗어 마나스톤 더미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환산.”
[신성 통장이 반응합니다.]
[D급 변종 보스 마나스톤을 흡수합니다. (+600 신성)]
[상급 마나스톤 4개를 흡수합니다. (+400 신성)]
[일반 마나스톤 15개를 흡수합니다. (+237 신성)]
[총 1,237 신성이 성공적으로 입금되었습니다.]
[현재 보유 신성: 1,480]
푸른 돌들이 일제히 고운 백색 가루로 부서져 내리며 사라졌다.
계좌의 숫자가 네 자릿수로 치솟았다.
1,480 신성.
성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장사가 꽤 잘됐네.”
그는 지체 없이 성좌 채널을 활성화했다.
[성좌 채널 0842번에 접속합니다.]
[채널의 성좌 '무신의 황혼'이 당신의 접속을 감지합니다.]
눈앞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거대한 붉은 황야가 펼쳐졌다.
신전 기둥에 기대어 있던 거신, 무신의 황혼이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성우를 내려다보았다.
“인간이여. 어제 보낸 특가 상품은 확인했는가? 백전의 갑주는 내 전성기 시절 방어 권능의 정수다. 1,200 신성은 거저나 다름없는 파격적인 제안이지.”
거인의 목소리는 당당했으나 그 뒤편에 자리 잡은 신전은 여전히 반쯤 무너져 내린 폐허였다.
신성이 고갈되어 소멸 위기에 처한 성좌의 절박한 영업이었다.
성우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었다.
“물건 설명에 하자는 없겠죠?”
“투신의 이름을 걸고 보증한다. 어떤 치명적인 물리 타격과 마력 충격도 한 차례 완벽히 무효화하고 반사 장벽을 형성하는 절대의 갑주다.”
“좋습니다. 구매하죠.”
성우는 시스템 창의 구매 버튼을 눌렀다.
[VIP 특별 할인 쿠폰을 적용합니다.]
[백전의 갑주 / 1,200 신성을 결제합니다.]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유 신성: 280]
쿠구구구궁!
성우의 계좌에서 빠져나간 1,200 신성이 황금빛 폭포수가 되어 무신의 황혼의 가슴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으, 으아아아악!”
거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포효했다.
신성이 주입되자마자 부서져 가던 붉은 갑주가 찬란한 신광을 뿜어내며 완벽하게 재생되었다.
폐허였던 신전의 기둥들이 우뚝 솟아오르고 메말랐던 붉은 대지에 신성한 화염이 타올랐다.
소멸 직전이던 투신의 격이 단숨에 고위 성좌의 반열로 회복되는 기적이었다.
[성좌 '무신의 황혼'이 거대한 신성의 유입에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성좌 '무신의 황혼'의 신격 복원율이 35%에 도달합니다.]
[성좌 '무신의 황혼'이 당신을 '최고 등급 VIP 후원자'로 지정합니다.]
무신의 황혼은 떨리는 거대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수백 년간 그 어떤 인간 계약자도, 대형 종교 집단의 기도도 해내지 못했던 신성 주입이었다.
그것을 일개 인간 청년이 쇼핑하듯 단 한 번의 결제로 이뤄낸 것이다.
거신의 시선이 성우에게 닿았다.
오만하던 투신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거기엔 극진한 경외와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귀하가 진정 일개 필멸자가 맞단 말인가? 이토록 순도 높은 신성을 단번에 결제하다니.”
“말씀드렸잖습니까. 물건값은 확실하게 치른다고.”
성우의 몸 주위로 붉은 기운이 휘감기더니 투명하고 견고한 신화급 마력 갑주가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권능 '백전의 갑주'가 영구 귀속되었습니다.]
[물리 및 마법 치명타 1회 절대 무효화 및 충격 반사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완벽한 방어 수단까지 손에 넣었다.
그때 시스템 화면에 화려한 금빛 창이 새로 떠올랐다.
[VIP 전용 스폰서 마켓이 개방되었습니다!]
[성좌 '무신의 황혼'의 전용 권능 라인업이 해금됩니다.]
신화 권능: 파천황의 일격 (5,000 신성)
고유 비기: 찰나의 보법 (2,500 신성)
특수 신기: 투신의 분노 주괴 (8,000 신성)
무신의 황혼이 무릎을 굽혀 성우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위대한 VIP 스폰서여. 다음에는 어떤 권능을 원하시는가? 원하신다면 내 전승 오의를 맞춤형으로 제작해 드릴 수도 있네. 다음 결제 시 추가 할인 쿠폰도 얼마든지 발급하겠네!”
성좌가 인간에게 굽실거리며 다음 결제를 유치하려는 광경.
자본주의의 힘이 신화의 법칙을 완벽히 압도하고 있었다.
성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켓 창을 닫았다.
“다음 장사 때 보죠.”
채널을 빠져나온 성우는 침대에 기대어 턱을 괴었다.
병원비와 생활비는 해결되었다. 신화급 공격과 방어 권능도 갖췄다.
하지만 앞으로 신성을 만 단위, 억 단위로 불리고 성좌들의 마켓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던전을 도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마나스톤을 대규모로 유통하고 공략권을 독점할 거점이 필요해.’
자신만의 길드.
그리고 그 막대한 자금을 체계적으로 굴려줄 전문 매니저.
성우의 머릿속에 낮에 협회 게시판과 뉴스에서 언뜻 보았던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국내 최대 길드 '아카샤'에서 토사구팽당해 쫓겨났다는 천재 길드 매니저, 서아린.
성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제 사람을 사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