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좌들의 스폰서가 되었다

4화: 얼마면 됩니까?
윤성우의 손가락이 구매 버튼 위에서 멈췄다.
[전쟁 신기의 파편 / 400 신성]
[사용자의 무기에 전장의 각인을 새깁니다.]
[한 번의 공격에 사용자의 의지와 충격을 집중할 수 있습니다.]
보유 신성은 643이었다. 400을 쓰면 243이 남는다.
성우는 휴대폰에 남은 병원 문자를 떠올렸다. 모레 오후 다섯 시. 치료비 납부 기한은 여전히 가까웠다. 신성은 병원 창구에서 쓸 수 없고 현금으로 바꿀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643을 그대로 쥐고 있어도 치료비는 해결되지 않는다. 철혈 길드가 손실액을 빌미로 공략 자리까지 끊으면 신성을 얻을 기회도 사라진다.
성우는 상품 설명을 끝까지 내렸다.
[계약 기간 없음. 사용 횟수 제한 없음. 구매 후 환불 불가.]
“환불이 안 된다는 말은 마음에 드네요.”
그가 구매 버튼을 눌렀다.
[전쟁 신기의 파편을 구매했습니다.]
[보유 신성: 243]
손바닥 안의 휴대폰이 뜨거워졌다. 붉은 선이 화면 위로 번지더니 낡은 대여 검의 손잡이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검날은 그대로였다. 손잡이를 쥔 순간 성우는 검이 자신의 움직임을 기억한다는 걸 알았다. 언제 힘을 넣고 어디를 베려 했는지 붉은 잔상이 검 안에 쌓였다.
“파편은 무구가 아니다.”
별빛 너머에서 무신의 황혼이 말했다.
“네 검에 내 전장의 흔적을 잠시 빌려주는 물건이지. 한 번의 공격에 의지를 몰아넣으면 방어가 얇은 곳을 찾아 파고든다.”
“반동은요?”
“네 몸이 견뎌야 한다.”
“그럼 물건값은 했네요.”
거인은 잠시 침묵했다.
“인간들은 보통 더 좋은 무기를 원한다.”
“저는 무기를 휘두를 사람부터 믿습니다.”
성우는 채널을 닫았다. 줄어든 숫자를 보며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지만 후회는 없었다.
돈을 써서 권능을 샀다. 이제 그 권능으로 돈이 되는 상황을 만들면 된다.
휴대폰이 곧바로 진동했다.
[철혈 길드 긴급 정산 출석 통보]
[불참 시 전리품 손실 책임 인정으로 간주]
성우는 통보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인정은 자기들 마음대로 하고.”
그는 대여 검을 허리에 찼다.
“증명은 내가 하죠.”
협회 정산실 앞에는 노을시장 공략에 참여했던 하급 각성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도윤은 서류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철혈에서 계약서를 새로 쓰래요. 사라진 보스 전리품까지 우리 책임으로 넣었습니다.”
“원본을 봤습니까?”
“서명하라고만 했어요. 안 하면 다음 긴급 공략 배정이 없다고…….”
정산실 문이 열리며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왔다. 철혈 현장관리부 간부 박명수였다.
“윤성우 맞지? 네가 사체를 날려 놓고 말이 많다는 그 E급이구나.”
“사체가 사라진 건 현장 이상으로 보고됐습니다.”
“보고는 우리가 한다. 네가 본 건 아무것도 아니야.”
박명수는 종이 뭉치를 들어 올렸다.
“서명하면 손실액은 길드가 일부 감면해 주지. 여기 있는 사람들도 같은 조건이다.”
차재욱이 벽에서 몸을 뗐다.
“일부가 얼마입니까?”
“네 치료비보다 많지는 않다.”
“그건 감면이 아니라 빚 아닙니까?”
박명수의 오른손 손가락이 세 번 접혔다 펴졌다. 성우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협회 안에서 하청 헌터를 겁박해도 됩니까?”
“겁박?”
“방금 대화는 녹음됐습니다.”
성우가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녹음 중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다.
박명수의 입가가 굳었다.
“녹음 하나로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원본 장부와 대조하면 됩니다. 공략 로그와 현장 영상도 있겠죠.”
그때 창구 안의 직원이 성우를 불렀다.
“윤성우 씨. 현장 로그를 확인했는데 변종 출현 보고가 공략 종료 뒤에 등록돼 있습니다.”
직원 한지민이 모니터를 돌려 보였다.
“게이트 내부에는 공략 시작 17분 뒤부터 야행 갈기수장으로 추정되는 마나 반응이 기록돼 있어요. 그런데 철혈의 최초 보고에는 갈기수 무리만 적혀 있습니다.”
이도윤의 얼굴이 굳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예요?”
박명수가 낮게 욕설을 뱉었다.
“현장 판단이다. 위험도가 바뀌면 누군가는 들어가야 해.”
“그 누군가가 왜 E급과 신입입니까? 변종 수당도 없이요.”
성우의 물음에 정산실 앞이 조용해졌다.
한지민이 말했다.
“최초 보고와 내부 로그가 다르면 정산 보류 사유가 됩니다. 강제 서명도 받을 수 없습니다.”
“협회가 하청 헌터 편을 들겠다는 건가?”
“규정에 따라 확인하겠다는 겁니다.”
성우는 도윤이 든 계약서를 가리켰다.
“원본 확인 전에는 아무도 서명하지 마세요.”
박명수가 성우를 노려봤다.
“네가 뭘 믿고 이렇게 나오는지 모르겠군.”
“가격표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걸 믿습니다.”
정산실에서 나온 직후 철혈 직원 둘이 전리품 보관 상자 앞으로 다가왔다.
노을시장 공략에서 직접 확보한 마나스톤과 부산물이었다. 보스 사체는 사라졌지만 일반 마수의 전리품까지 철혈이 가져갈 권리는 없었다.
“손실액이 확정될 때까지 전부 임시 보관한다.”
박명수가 상자 앞을 막아섰다.
“계약서에는 확보자 귀속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도윤이 말했다.
“길드 규정이 계약서보다 위야.”
직원 하나가 봉인을 뜯었다. 도윤이 손을 뻗자 직원이 그의 어깨를 밀쳤다.
“비켜.”
도윤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직원의 어깨가 다시 들렸다. 팔꿈치가 도윤의 턱을 노리는 움직임이었다.
성우가 한 걸음 사이로 들어갔다.
팔꿈치가 허공을 갈랐다.
“사람을 치면 압류가 아니라 폭행입니다.”
직원이 욕설과 함께 주먹을 휘둘렀다. 성우는 몸을 틀어 주먹을 흘렸다. 투성의 감각이 근육의 긴장과 호흡의 끊김을 읽었다.
성우는 대여 검을 뽑았다.
붉은 선이 검날을 타고 번졌다.
[전쟁 신기의 파편이 활성화됩니다.]
검끝이 압류 봉인 고리를 스쳤다. 붉은 빛이 한 점으로 모였다.
쩌엉!
금속 고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충격은 봉인에만 집중됐고 상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직원 둘이 굳었다.
“다음에는 사람을 노리겠습니다.”
성우가 검을 내렸다.
박명수가 앞으로 나섰다. 손에 검은 마나가 엉겨 붙었다.
“E급이 장난을 치네.”
“C급 권능을 협회 안에서 쓰시겠다고요?”
한지민이 비상 호출기를 들었다.
“박명수 간부님. 무장 해제하십시오. 강제 압류와 폭력 시도 모두 기록 중입니다.”
박명수의 마나가 흔들렸다. 카메라와 협회 직원을 의식한 표정이었다.
성우는 상자에서 자신의 몫인 푸른 마나스톤 세 개를 꺼냈다. 손끝이 돌을 스쳤지만 환산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신성이 아니라 증거였다.
그는 마나스톤을 도윤에게 건넸다.
“직접 확보한 사람이 보관하세요.”
도윤은 돌을 받아 들고도 움직이지 못했다.
“정말 제가 가져도 됩니까?”
“계약서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까요.”
박명수가 이를 악물었다.
“그 손실액을 누가 갚을 건데?”
“얼마면 됩니까?”
성우의 말에 주변 시선이 모였다.
“철갑 멧돼지 하나의 손실액을 핑계로 사람들 전리품을 전부 가져가는 값 말입니다. 원본 장부에 적힌 숫자대로 말해 보세요.”
박명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네가 그 돈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현금으로는 어렵죠. 대신 다음 게이트 수익을 협회 보증 계좌에 묶어 두겠습니다. 원본 장부가 확인되면 실제 손실만 지급하죠.”
한지민이 모니터를 확인했다.
“긴급 게이트 공적 보증 재계약 제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가능합니까?”
“개인이 신청한 사례는 거의 없지만 규정상 가능합니다. 보증금과 안전 인력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철혈에 직접 돈을 줄 생각은 없습니다. 협회가 확인한 몫만 계좌로 움직이게 하죠.”
성우는 박명수를 보았다.
“철혈이 가지고 있는 강서구 긴급 공략권을 넘기세요. 가격을 말해 보십시오.”
“길드의 공략권을 사겠다고?”
“얼마면 됩니까?”
박명수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원한 건 겁먹은 E급의 서명이었다. 그런데 성우는 손실액을 따지는 대신 거래판 자체를 사려 하고 있었다.
한지민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철혈이 포기한 게이트는 협회 보증으로 재공고할 수 있습니다. 그 방식이라면 길드와 직접 계약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그걸로 하죠.”
성우가 도윤을 바라봤다.
“이도윤 씨. 다음 공략조의 정산 담당을 맡을 수 있습니까?”
“제가요?”
“사람들이 얼마를 벌었는지 적고 무엇을 가져갔는지만 기록하면 됩니다. 모르는 건 협회에 확인하고요.”
도윤은 마나스톤을 내려다봤다. 손바닥 위의 푸른빛이 떨리고 있었다.
“저는 아직…….”
“그래서 맡기는 겁니다. 빼앗기는 사람이 장부를 쓰면 자기 몫은 알 수 있으니까.”
차재욱이 붕대 감긴 팔을 들었다.
“내가 안전 인력으로 붙지.”
박명수는 서류를 접었다.
“이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끝났다고 한 적 없습니다.”
성우는 검을 칼집에 넣었다. 붉은 각인은 이미 흐려지고 있었다.
“다음 거래를 기다리는 중이죠.”
협회 앞을 나왔을 때 해가 기울고 있었다.
성우는 병원 납부 안내를 다시 확인했다. 현금 문제는 그대로였다. 신성 통장에는 243이 남았고 손에 쥔 마나스톤을 환산하면 12가 더 늘어난다.
그 정도로는 치료비를 낼 수 없다.
그러나 오늘 얻은 건 숫자만이 아니었다. 협회 보증 계약이 승인되면 철혈의 장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공략조를 꾸릴 수 있다. 사람을 모아 게이트를 정리하면 전리품은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성우가 골목으로 들어서자 신성 통장 위에 붉은 창이 겹쳐졌다.
[무신의 황혼이 신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전쟁 신기의 파편 구매를 확인했다.]
[위대한 VIP 후원자에게 특별 할인권을 발급합니다.]
[백전의 갑주 / 1,800 신성]
[할인 적용가: 1,200 신성]
성우는 숫자를 한 번 읽고 웃었다.
“할인이라.”
메시지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붙어 있었다.
[다음 후원 전까지 단 한 번만 유효하다.]
방금 전까지 값비싼 권능을 팔던 성좌가 이제는 쿠폰을 보내고 있었다.
성우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우선은 현금부터 벌죠.”
걸음이 빨라졌다.
“그다음에 얼마인지 다시 물어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