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당한 나의 100번째 복제인간

4화: 불법 복제체 선언
포고령과 현상금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는 둔탁했다.
철커덕.
외벽 정비구역의 차압문이 열리자 우주의 한기가 들이쳤다. 정거장의 거대한 그림자 너머로 성단의 창백한 빛이 쏟아졌다. 발밑에는 작업 발판과 배관망이 앙상한 뼈대처럼 얽혀 있었다.
도하가 무릎을 꺾으며 난간을 짚었다. 얇은 비상 보호막 표면으로 하얗게 성에가 끼고 있었다.
“압력이 떨어집니다.”
서린아가 도하의 어깨를 받쳤다. 배기 밸브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 입자들이 뺨을 때렸다.
그때 정거장의 조명이 깜박였다.
푸른 안전등이 꺼지고 주황색 비상 경고등이 켜졌다. 벽면에 설치된 대형 홀로그램 통신탑이 요란한 구동음을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삐이익—
전자음과 함께 비상 방송이 외벽 스피커를 울렸다.
“아스터리온 그룹 이사회 비상대책위원회 긴급 포고령.”
이사회 비서실의 단정한 안내 음성이었다. 차갑고 망설임 없는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표준 우주 표준시 2319년 9월 3일 18시 13분을 기해 창업자 한시온 대표의 공식 사망이 확정되었습니다. 72시간 보안 지연이 만료되었으나 법적 연속성 인증에 필요한 정당한 승계 절차는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시온은 난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화면이 전환되며 거대한 글자가 허공에 투사되었다.
“현재 오르비스 외벽 및 폐쇄 구역에 출현한 개체는 원본의 기억 연속성이 결여된 비인가 복제체로 판정되었습니다. 회사의 핵심 자산 무단 점유 및 기밀 데이터 탈취 혐의로 해당 무명체 HN-100에 대해 전 은하 보안 1급 회수령을 발령합니다.”
홀로그램 화면 위로 시온의 신체 정보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신장 182센티미터. 회색 홍채. 흑발. 오른쪽 쇄골 아래의 100번째 배양체 미세 인장.
그 아래 붉은 숫자가 깜박였다.
‘생포 또는 백업 슬롯 소각 확인 시 지급: 50,000,000 크레딧.’
5천만 크레딧. 소형 전투함 세 척을 통째로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시온은 허공에 뜬 자신의 얼굴을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137년 동안 키워 온 기업이 창업자의 목에 현상금을 걸고 사냥을 선언했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자 심장의 박동이 가라앉았다. 감정이 요동칠 때마다 차가운 계산이 빈자리를 채웠다.
도하가 떨리는 눈으로 화면 속 숫자를 바라보았다.
“너도… 무명체였어?”
시온은 도하를 내려다보았다. 도하의 얼굴에 번진 불안은 자신이 처음 깨어났을 때 느꼈던 혼란과 같았다.
“그래. 5천만 크레딧짜리 무명체지.”
서린아가 팔림프세스트를 조작하며 이를 악물었다.
“포고령에 폐쇄 배양층이나 HN-012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당신을 단순 불법 복제체로 규정했어요. 회사의 치부를 덮고 현장에서 즉시 소각하려는 겁니다.”
“예상했던 일이야.”
“5천만 크레딧이면 정거장의 사설 용병들과 화물 인부들까지 전부 총을 들고 달려듭니다.”
“그래서 정답이지.”
시온이 차갑게 말했다.
“내가 진짜 후계자라면 재판을 열어야 해. 하지만 가짜 무명체로 규정하면 재판 없이 우주 쓰레기로 버릴 수 있으니까.”
그 순간 정비 구역 상공의 감시탑에서 붉은색 탐조등이 세 사람을 덮쳤다.
무명체의 조준선
위이잉—
외벽 정비 도크의 자동 격납고 문이 열렸다.
둥근 원반 형태의 외벽 초계 드론 세 대가 미끄러져 나왔다. 두꺼운 장갑판과 고압 관통 다트건을 장착한 요격용 기체였다.
드론의 렌즈가 붉게 점멸하며 시온의 쇄골 인장에 초점을 맞추었다.
‘식별 대상 일치. 무명체 HN-100. 물리적 파기 절차 개시.’
타앙! 탕!
초소형 철갑 다트가 발판 금속판을 강타하며 불꽃을 튀겼다. 파편이 시온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숙여요!”
서린아가 도하를 끌어안고 두꺼운 지지대 뒤로 몸을 던졌다.
시온은 바닥을 구르며 철제 기둥 뒤로 파고들었다. 다트 탄환들이 그가 방금 서 있던 자리를 찢어발겼다.
도하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숨이… 안 쉬어져.”
“보호막 전력이 바닥났습니다.”
서린아가 케이블을 연결하려 애썼지만 휴대용 단말 전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대로는 3분을 못 버텨요. 밀폐 구역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시온은 고개를 들어 전방을 살폈다.
작업 발판 저편 20미터 거리에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중형 화물 운송 포드가 보였다. 정거장 외벽 부품을 나르는 밀폐형 컨테이너였다. 내부 산소 순환 장치가 달려 있는 유일한 대피소였다.
하지만 드론 세 대가 교차 사격으로 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시온에게는 무기가 없었다. 전력함에 꽂아 부숴버린 암호키도 없었다. 시스템 제어권도 박탈당한 상태였다.
‘무명체에게 남은 수단은 시스템이 아니라 물리적 질량뿐이다.’
시온의 시선이 머리 위로 향했다.
발판 상공에 10톤짜리 전자석 크레인이 매달려 있었다. 수동 비상 해제 와이어가 시온의 머리 위 배관에 걸려 있었다.
“서린아.”
시온이 낮게 불렀다.
“내가 신호를 주면 도하를 데리고 저 화물 포드로 달려.”
“당신은요? 무기도 없잖아요!”
“무기는 저들이 가지고 있지.”
시온은 망설이지 않고 발판 밖으로 몸을 던졌다.
타타타탕!
세 대의 드론이 일제히 총구를 돌렸다. 시온을 향해 빗발치는 탄환이 쏟아졌다.
시온은 숫자를 세었다.
하나. 발을 구른다.
둘. 배관을 밟고 도약한다.
셋. 난간을 붙잡는다.
탄환 한 발이 시온의 어깨를 스치며 살점을 파고들었다. 타는 듯한 통증이 내달렸다. 그는 멈추지 않고 배관에 매달린 굵은 강철 와이어를 낚아챘다.
체중을 실어 와이어를 아래로 꺾었다.
끼기기긱— 쾅!
비상 잠금장치가 부서지며 거대한 강철 집게가 허공에서 수직으로 낙하했다.
콰아아앙!
작업대를 비행하던 드론 두 대가 크레인 집게에 직격당했다. 장갑판이 종이처럼 구겨지며 푸른 스파크를 뿜어냈다.
남은 한 대의 드론이 시온을 향해 총구를 조준했다.
그 순간 서린아가 뛰쳐나왔다. 그녀는 팔림프세스트의 감응 코일을 뜯어내 드론의 센서 배열판에 내리꽂았다.
치지지직!
과부하된 전류가 광학계를 태워버렸다. 드론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시온이 바닥에 떨어진 파이프를 주워 들어 추진 회전익 사이로 찔러 넣었다.
우두둑!
마지막 드론이 침묵했다.
“지금이야!”
서린아가 도하를 부축해 화물 포드의 에어락 안으로 뛰어들었다. 시온 역시 피를 흘리는 어깨를 감싸 쥐고 포드 안으로 몸을 날렸다.
치이익— 쾅!
포드의 수동 차폐문이 닫히며 내부 격벽이 밀폐되었다.
도크 7의 신호
포드 안으로 압축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쉬이이이—
차가운 산소가 폐포를 채우자 세 사람 모두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토해냈다.
도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기침을 터뜨렸다. 파랗게 질렸던 얼굴에 서서히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서린아가 시온의 찢어진 셔츠를 젖혔다. 어깨에 깊은 상처가 나 있었고 피가 쇄골의 100 인장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지혈해야 합니다.”
“살점만 조금 떨어져 나갔어. 뼈는 멀쩡해.”
시온은 이를 악물며 비상 압박 붕대를 어깨에 감았다. 고통스러웠지만 정신은 맑아졌다.
도하가 무릎을 끌어안은 채 시온의 쇄골을 올려다보았다.
“피가 나네.”
“복제체도 피는 흘려.”
“알아.”
도하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를 깨운 사람들이 그랬어. 100번째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는 괴물이라고. 이름을 수백 개씩 먹어 치운 괴물이라고.”
시온은 붕대를 묶던 손을 멈추었다.
“괴물이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그 괴물에게 5천만 크레딧의 목숨값이 붙었어.”
“왜 날 버리지 않았어?”
도하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나를 버리고 혼자 도망쳤으면 훨씬 빨랐잖아.”
시온은 도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 돈으로 내 목숨을 사냥하겠다는 자들에게 네 목숨까지 덤으로 넘겨줄 생각은 없으니까.”
그 순간 포드 조종석의 통신 콘솔이 날카로운 경고음을 울렸다.
삐- 삐- 삐-
최고 등급의 보안 암호가 걸린 붉은색 통신 파형이 화면을 채웠다.
서린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스터리온 보안국 전용 회선입니다. 외부에서 강제로 연결했어요.”
화면이 지직거리더니 묵직하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시온 대표.”
시온은 숨을 들이켰다. 수십 년 동안 들어 온 목소리였다.
“윤 국장인가.”
“그렇게 살아 계실 줄 알았습니다.”
아스터리온 최고보안국장 윤태경이었다. 규율에 얽매인 군인 특유의 건조함만 묻어났다.
“하지만 대표라는 호칭은 이제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사회 비상회의가 당신의 불법 복제체 지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습니다.”
“마르코스가 앞장섰나?”
“의장 대행께서 주도하셨습니다. 그리고 12분 뒤 정거장 외벽 전 구역에 감압 소탕 가스가 살포됩니다. 외벽의 모든 대피소 밸브가 강제 개방될 예정입니다.”
포드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12분 뒤면 이 포드조차 진공의 무덤이 된다는 뜻이었다.
“목적을 말해.”
시온이 물었다.
“도크 7에 제 직속 보안 셔틀을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그곳으로 오십시오. 제가 당신의 신병을 직접 확보하겠습니다.”
서린아가 황급히 시온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함정이에요.’
서린아가 통신기를 가리고 속삭였다.
“윤태경은 97번째 체가 죽을 때도 현장에 있었습니다. 전송 규정을 핑계로 죽음을 방치했던 사람이에요. 저 사람에게 가면 다시 금고에 갇힙니다.”
윤태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조건이 있습니다. 양자금고에서 가져간 감사원 원장과 팔림프세스트의 데이터 원본을 넘기십시오. 이사회가 당신을 소각하기 전에 원본의 백업 자산을 지키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윤태경은 여전히 도하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폐쇄 배양층의 진실도 모른 채 오직 시온-100과 도난당한 백업 데이터만을 쫓고 있었다.
시온은 붕대를 맨 어깨를 천천히 돌렸다.
“윤 국장.”
“듣고 있습니다.”
“내가 137년 동안 기업을 이끌며 배운 규칙이 하나 있다.”
“무엇입니까.”
“내 탈출로를 남의 손에 맡기는 순간 그 협상은 이미 끝난 거다.”
시온은 통신 차단 버튼을 주저 없이 내리눌렀다.
탁.
붉은 화면이 꺼지고 정적이 찾아왔다.
“미쳤어요?” 서린아가 숨을 몰아쉬었다. “12분 뒤면 외벽 전체가 진공이 됩니다!”
“도크 7로 가면 윤태경의 포로가 될 뿐이야. 그자는 나를 살리려는 게 아니라 회사의 자산인 백업을 회수하려는 거다.”
그때 시온의 손목에 차여 있던 개인 단말이 작게 진동했다.
치익.
이전에 12에서 멈췄던 카운트 숫자가 소리 없이 깜박였다.
단말 화면 위로 암호화된 좌표 하나가 새로 떠올랐다.
도크 7이 아니었다. 정거장 심층부로 이어지는 폐열 냉각 도관의 비상 통로였다.
그리고 그 아래 짧은 문장이 한 줄 새겨졌다.
‘HN-012-03 생존 확인. 13번 슬롯의 냉각을 열어라.’
포드 바깥에서 거대한 금속 갈고리가 외벽을 긁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상금을 노리는 사냥꾼들의 함선이 정비 구역 난간에 도킹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