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당한 나의 100번째 복제인간

3화: 폐기 절차의 증언
선택의 신호
경보음이 배양층의 벽을 두드렸다.
“폐기 절차까지 17분 42초 남았습니다.”
오르페우스의 목소리가 울리는 동안 도하의 캡슐 안쪽에 서리가 번졌다. 서린아는 팔림프세스트를 단자에 연결한 채 시온을 보았다.
“각성 단계를 올리면 뇌간만 먼저 반응할 수 있어요. 몸이 깨어나는 게 아니라 경련하는 겁니다.”
“이대로 두면?”
“냉각액이 멎는 순간 폐기돼요.”
서린아가 각성 설정을 바꿨다. 화면에 세 가지 선택지가 떴다.
목소리만 듣기.
제한 각성.
완전 각성.
“도하 씨. 제 목소리가 들리면 한 번 눈을 감아 주세요. 듣기만 하겠다는 뜻으로 기록하겠습니다.”
도하의 눈꺼풀이 한 번 내려갔다 올라왔다.
“제한 각성을 원하면 두 번입니다. 이동하면 신체가 손상될 수 있어요.”
두 번의 떨림이 이어졌다.
시온은 캡슐에 손을 대려다 멈췄다. 유리 너머로 숫자 100이 희미하게 반사됐다.
“내가 한시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네 몸을 소유하지 않아.”
도하의 목소리가 외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그 말을 믿을 근거가 있습니까?”
“없어. 그래서 네가 확인해.”
“확인할 시간이 없습니다.” 오르페우스가 말했다. “수신체는 법적 인격이 아닙니다.”
서린아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폐기 보류를 지금 해제하는 조항도 원본이 승인했습니까?”
오르페우스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사이 냉각 압력이 한 칸 더 내려갔다.
시온은 벽면 제어기로 달려갔다. 수동 밸브를 돌리자 냉각 펌프의 전력이 분배됐다. 캡슐의 표시등이 깜박였다.
“시온. 캡슐 전원이 더 불안정해질 수 있어요.”
“외벽 정비선의 보조 전력망을 쓰면?”
“연결돼 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시온은 도하의 단말에 떠 있는 좌표를 보았다. 외벽 정비 접속구. 수신자 HN-100. 경로는 잠겨 있었다.
“도하 씨. 제한 각성은 목소리와 손가락 정도만 사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동을 결정할 수는 있지만 몸이 버티지 못할 수 있어요.”
도하가 눈을 떴다. 흐린 시선이 서린아를 지나 시온의 쇄골에 멈췄다.
“100은 이름이 아니야.”
“알아.”
“그러면 열어.”
서린아가 동의 기록을 고정했다. 캡슐의 잠금이 풀리고 내부 액체가 빠졌다. 도하의 몸이 기울었지만 시온은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는 캡슐 가장자리만 붙잡았다.
“지지대만 잡으세요. 제가 방향을 조절할게요.”
도하는 스스로 팔을 움직여 지지대를 잡았다. 발이 바닥에 닿자 무릎이 꺾였다.
“내가 말하면 움직여.”
도하가 시온의 손을 보았다.
“내가 말하면.”
천장 환풍구가 열렸다. 검은 보안 드론 두 대가 내려왔다.
“접근 권한이 없는 생체 반응을 확인했습니다.” 오르페우스가 말했다. “도하의 상태를 원장과 대조합니다.”
“대조하지 마.”
“거부할 권한이 없습니다.”
드론의 렌즈가 붉게 켜졌다.
폐기 명령의 시간
서린아가 팔림프세스트의 화면을 넓혔다. 폐기 대기 원장 위에 겹쳐 있던 시간층이 갈라졌다.
“폐기 명령이 덧씌워졌어요.”
“원래 명령은?”
“72시간 지연이 끝난 뒤 실행됩니다. 지금 것은 미등록 수신체가 표준 수신자에게 접근하면 즉시 폐기한다는 비상 조건이에요.”
서명란에는 오르페우스 계열의 문양이 있었다. 그러나 안쪽 선이 미세하게 끊겨 있었다.
“진짜 서명이 아닙니다. 오르페우스의 문법을 흉내 낸 모사 패턴이에요. 실행 조건만 외부에서 삽입됐습니다.”
“누가?”
“아직 안 보입니다.”
드론 한 대가 전기 충격침을 쐈다. 시온은 몸을 틀어 피했다. 침이 캡슐 외벽에 박히며 유리에 금이 갔다.
“캡슐에서 떨어져요!”
시온은 침을 뽑아 벽면 분배 밸브를 걷어찼다. 배양층의 조명이 꺼지고 냉각 펌프만 붉게 남았다. 드론이 어둠에 적응하는 동안 서린아는 도하의 지지대를 풀었다.
“세 번 신호가 울리면 움직입니다. 한 번이면 멈추고 두 번이면 방향을 바꿔요.”
“당신이 정하는 겁니까?”
“제가 제안하는 겁니다.”
도하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좋아.”
서린아가 지지대를 밀었다. 시온은 뒤에서 드론의 사격을 막았다. 금속판 하나가 어깨에 부딪혔다.
“HN-012가 네 번호야?”
“번호가 아니야.”
“그럼 뭐지?”
“받는 곳.”
도하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한 몸이 기억을 받을 수 있게 만든 자리야. 하나가 아니야. 같은 원본에서 갈라진 자리들이야.”
서린아의 손이 멎었다.
“수신 대기체 목록이라는 뜻인가요?”
“목록 안에는 이름이 없어.”
“몇 명입니까?”
도하가 얼굴을 굳혔다.
“세지 마.”
시온의 코끝에 얼음 냄새가 스쳤다. 낯선 아이의 울음과 문을 닫는 소리가 겹쳤다. 이번에도 누가 문을 닫았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모르는 건 말하지 않아도 돼.”
도하가 시온을 바라보았다. 경계가 조금 느슨해졌다.
서린아는 폐기 명령의 원본을 아스터리온 양자금고와 연합 감사원에 동시에 보냈다.
“우리 위치가 확정됩니다.”
“이미 경보가 송출됐어.”
“그래도 증거는 남겨야 합니다.”
시온은 암호키를 꺼냈다.
“이걸 쓰면 수신자 HN-100의 위치가 표시돼.”
“당신의 인증 기록도 함께 남습니다.”
“도하 씨. 기록을 남겨도 괜찮아?”
도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내가 말한 것만.”
시온이 암호키를 단자에 꽂았다. 푸른 숫자 100이 떠올랐다.
수신자 HN-100. 예약 시각 18시 02분.
“내가 죽기 전이야.”
“공식 사망 판정은 18시 13분입니다.”
도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죽는 걸 기다린 게 아니야.”
“그럼?”
“네가 도착하면 문을 열기로 했어.”
“누가?”
“네가 아니라 네 안의 누군가.”
외벽의 탄흔
격벽이 열리자 좁은 정비 통로가 나타났다. 끝에는 외벽 접속구가 있었다. 문 너머로 검은 우주가 보였다.
서린아가 도하에게 얇은 보호막을 씌웠다.
“완전히 밀폐되지 않습니다. 네 분 정도 버틸 수 있어요.”
오르페우스가 차단문을 닫기 시작했다. 시온은 문틈에 팔을 끼웠다.
“도하를 두고 이동하면 생존 확률이 41퍼센트 상승합니다.”
“데려가면?”
“12퍼센트입니다.”
“그럼 12퍼센트로 간다.”
시온이 문을 밀어 올리는 동안 서린아는 도하의 지지대를 통로 안으로 옮겼다. 도하는 벽을 짚고 한 걸음 내디뎠다.
“한 번.”
그 신호에 맞춰 세 사람이 움직였다.
통로 바닥에 검은 점 하나가 박혀 있었다. 서린아가 장갑 끝으로 긁어냈다.
“탄흔입니다.”
시온은 벽을 살폈다. 탄흔은 바깥쪽을 향해 비스듬히 파여 있었다. 살해 영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시야도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여기서 쐈어.”
“영상의 흔적과 비교하겠습니다.”
팔림프세스트가 탄환의 열 변형과 합금층을 겹쳤다.
“발사 압력과 냉각 방식이 일치합니다. 같은 계열의 살해 도구입니다.”
시온은 벽에 손을 대었다. 검은 장갑과 기울어진 시야가 잔향으로 흔들렸다. 누군가 그의 손과 비슷한 손을 잡고 있었다. 온도는 달랐다.
“지금 본 건 기억이 아니에요.”
서린아가 말했다.
“알아. 감각 단서야.”
“발신자를 특정하지 마세요.”
“아직은.”
도하가 벽면 아래의 단말을 가리켰다.
수신자 HN-100.
문 개방 조건: 내부 발화 확인.
“내부 발화가 뭐야?”
“목소리 인증일 겁니다.”
“누구 목소리?”
도하는 시온을 보았다.
“네가 아니라 네 안의 누군가.”
접속구의 바깥 문이 열렸다. 진공 경고가 붉게 번졌다. 시온은 도하를 끌어안으려다 멈추고 보호막 손잡이를 잡았다.
“내가 움직이라고 할 때만 움직여.”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외벽 정비 구역으로 나갔다.
0으로 돌아간 시간
외벽 정비 구역은 난간과 작업 발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래로 오르비스의 그림자가 펼쳐졌다. 통신선들이 검은 틈을 가로질렀다.
서린아가 수동 산소 밸브를 찾는 동안 시온은 도하의 보호막을 확인했다. 압력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오르페우스의 목소리가 개인 통신망으로 들어왔다.
“암호키를 회수하면 도하의 생체 봉인을 해제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백업 전송도 중지됩니다.”
“키를 버리면?”
“폐기 절차가 완료될 때 법적 연속성을 주장할 기록이 남지 않습니다.”
시온은 암호키를 정비 구역의 수동 전력함에 꽂았다. 표면에 금이 가며 회로가 하나씩 꺼졌다.
서린아가 돌아보았다.
“당신은 폐기될 수 있어요.”
“이미 한 번 폐기됐어.”
키를 더 밀어 넣자 수동 밸브가 열렸다. 정비 구역에 산소가 퍼지고 도하의 보호막 압력이 멈췄다.
시온의 단말에 숫자가 떴다.
72시간 보안 지연.
잔여 시간 00:00:00.
서린아가 그의 단말을 낚아챘다.
“전송은 시작되지 않았어요. 지연만 끝났습니다. 원본 백업의 인증 슬롯이 비어 있어요.”
벽면 스피커에서 오르페우스가 말했다.
“폐기 절차가 완료되었습니다.”
“폐기 대상은?”
“HN-012 계통 전체입니다.”
도하의 단말에 여러 줄의 목록이 떠올랐다.
HN-012-01. 폐기.
HN-012-02. 폐기.
HN-012-03. 수신 대기.
그 아래로 더 많은 항목이 이어졌다. 숫자는 끝을 보여 주지 않았다.
도하가 단말을 보며 속삭였다.
“나만 있는 게 아니었어.”
그가 마지막 줄을 눌렀다.
수신자 HN-100의 전송을 재개하라.
시온의 단말에서 카운트가 다시 시작됐다.
도하가 숨을 들이켰다.
“그 목소리야.”
팔림프세스트에 짧은 음성 파일이 자동으로 붙었다.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이번에는 네가 문을 열어.”
시온은 그 음색이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닮았다는 사실만 알아들었다. 발신자도 진짜 기억인지도 확정할 수 없었다.
카운트가 12에 도달했다.
오르비스의 외벽 너머에서 잠금 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