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고치는 시계공의 우산

2화: 비구름 톱니의 출처
왕실 저장고의 물은 새벽이 오기 전에 모두 비워야 했다.
도겸은 수조 아래 배관을 따라 기상탑의 지하실로 내려갔다. 나림이 앞에서 랜턴을 들고, 세주는 샘플병과 압력계를 품에 안았다. 수로 벽은 원래 회색 돌이었지만, 검은 비가 흘러간 자리마다 푸른 얼룩이 생겼다.
“이건 세척수가 아니에요.” 세주가 벽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세척수에 들어가는 광석 가루는 청색인데, 이 침전물은 철과 망간 비율이 높아요. 탑의 폐수 배관이 아니라 외부 저장통에서 온 물일 수 있어요.”
“왕실 구역 쪽에 외부 저장통이 있어요?” 도겸이 물었다.
“도면상으론 없어요.” 나림이 말했다.
“그럼 도면이 또 틀린 거네요.”
나림은 랜턴을 높이 들었다. 배관이 갈라지는 부분에 새로 덧댄 황동관이 있었다. 연결부에는 낡은 천 조각이 감겨 있었다. 도겸은 그것을 알아봤다. 누나가 공방에서 쓰던 작업복의 안감과 같은 짜임이었다.
“누나가 여기 왔었어요.”
“그럴 수 있어.” 나림은 천을 떼어 들었다. “하지만 이걸로 누나가 수문을 건드렸다고 말할 순 없어.”
“그런 말 안 했어요.”
“네가 지금 찾는 건 흔적이 아니라 범인이야. 그 차이를 잊지 마.”
도겸은 답하지 않았다. 세주는 황동관 끝에 자를 대고 지름을 쟀다. “이 관은 탑의 정규 부품보다 좁아요. 압력이 높아지면 물이 역류하도록 설치한 겁니다.”
“누가 일부러?” 도겸이 물었다.
“누군가가 배수관을 임시로 이어 썼을 가능성이 있어요.” 나림이 손전등으로 관을 비췄다. “그런데 이 연결은 기술자 손을 거쳤어. 거칠게 만든 것 같아도 용접 자리는 숙련자 흔적이야.”
그때 지하의 철문이 쾅 하고 닫혔다. 경비대장과 왕실 서기관이 계단을 내려왔다. 서기관은 손수건으로 코를 가리며 말했다.
“이 구역은 왕실 관리입니다. 검사 허가 없이 배관을 열 수 없습니다.”
세주가 샘플병을 들어 보였다. “오염수가 저장고로 들어갔습니다. 이 물을 누가 마시게 될지 모르는데도요?”
“왕실 담당자가 처리할 겁니다.”
“이미 처리하고 계셨나요?” 도겸이 물었다. “그랬다면 새로 덧댄 관이 없어야죠.”
서기관이 경비대장에게 눈짓했다. “수리팀은 탑으로 돌아가십시오. 오늘의 사고는 기계 이상으로 보고할 예정입니다.”
“기계 이상이 맞습니다.” 나림이 말했다. “다만 사람이 배관을 바꿔서 생긴 이상입니다.”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도겸은 천 조각을 내밀었다. “이 안감은 기상탑 근무복에만 쓰입니다. 천에 남은 기름은 탑의 윤활유와 같은 성분이에요.”
서기관은 손수건 뒤로 웃었다. “그럼 탑 사람 중 누군가의 실수겠군요.”
“그렇게 쓰면 실수한 사람 이름도 기록에 남겠죠.” 세주가 반박했다. “아니면 책임을 떠안길 견습생 이름이.”
도겸은 주머니 속 금속 조각을 꺼냈다. “이 톱니는 우리 정비고에서 만든 게 아닙니다. 누나가 쓰던 공구 치수와 같다고 아까 말했어요. 하지만 이건 누나가 여기에 있었단 증거가 아니라, 같은 공방에서 만든 부품이라는 증거예요.”
나림이 그를 바라봤다. 도겸은 조각을 서기관에게 넘기지 않고 바닥에 놓았다. “사고를 숨기려는 사람은 그걸 가져가고 싶겠죠. 하지만 지금은 물을 막아야 합니다.”
수조 유입구에서는 검은 물이 가늘게 새고 있었다. 도겸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선임, 차단밸브 위치가 도면이랑 다르면 제가 잘못 찾아갈 수 있어요. 세주 씨, 실제 압력 흐름을 봐 주세요.”
세주는 그의 옆에 섰다. “왼쪽 두 번째 관이에요. 압력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세 바퀴를 돌리고 마지막은 반 바퀴만.”
“나림 선임은 고정핀을 잡아 주세요.”
“알았어.”
도겸은 렌치를 밸브에 걸었다. 이번에는 혼자 힘으로 돌리지 않았다. 세주가 수치를 불렀고 나림이 진동을 손바닥으로 확인했다. 세 바퀴째에서 배관이 한 번 크게 울렸다. 밸브가 닫히며 검은 물의 흐름이 멈췄다.
서기관이 말했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나머지는 왕실 정비팀이 맡겠습니다.”
“어느 팀이요?” 도겸이 물었다. “이 연결을 만든 팀?”
서기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경비대장이 계단 앞을 막았다. “더 조사할 권한은 없습니다.”
세주는 샘플병을 망토 안에 넣었다. “그럼 관측 기록은 가져가겠습니다. 왕실 구역에서 채취한 물의 성분은 시민 관측소에도 보낼 겁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기상 기록은 제 업무입니다.”
나림이 세주의 앞에 섰다. “허가된 구역에서 채취했고, 수리팀이 사고를 막았습니다. 기록을 남기지 못하게 하려면 정식 명령서를 가져오세요.”
잠시 뒤 서기관은 경비를 물리고 철문을 열었다. 그들이 지하 계단을 올라올 때까지 그는 누구와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탑의 정비고로 돌아온 도겸은 천 조각을 작업대에 올렸다. 나림이 물었다. “네 누나 작업복 안감이 맞아?”
“맞아요. 누나가 제 손목을 다친 날, 남은 천으로 붕대를 감아 줬어요.”
“그때 도희는 이미 이 탑에서 일하고 있었어?”
“아니요. 외부 공방에서 왕실 기어를 납품했어요. 탑에 들어간 지 두 달 만에 사라졌죠.”
“그럼 이 천이 말해 주는 건, 누나가 이 부품을 만들었거나 그 공방에서 누군가가 만든 걸 알았다는 것뿐이야.”
“그 정도면 충분해요.”
“충분하다고 단정하지 마.”
도겸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가진 건 작은 조각과 오래된 천 한 장뿐이었다. 누나의 흔적을 진실로 착각하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걸, 나림은 먼저 배웠을 것이다.
세주는 벽에 관측 그래프를 붙였다. “검은 비는 왕실 지붕에서만 확인됐지만, 그 물을 빼낸 압력은 시민 구역으로 넘어갔어요. 오늘 새벽에 북쪽 시장의 빗물통 세 곳이 비었어요.”
“강우가 왕실로 몰리면서 시민 쪽 습기가 빠진 거네.” 도겸이 말했다.
“그래요. 비를 한 구역으로 옮긴 만큼 다른 구역에서 빼앗았어요.”
“그럼 장치를 고쳐도 부족하겠네요. 배분 기준부터 바꿔야 합니다.”
나림은 그래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기준을 바꾸려면 탑을 멈춰야 해. 멈추면 왕실은 물론이고 도시 전체의 기상 조절이 끊긴다.”
“조금씩 바꾸면요?”
“누군가의 비가 줄어들어. 네가 고른 구역에서.”
도겸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창밖에는 비가 그쳤지만, 시장의 지붕들은 말라 있었다. 오늘은 한 번의 수리로 검은 비를 막았다. 다음에는 어디의 구름을 옮길지 결정해야 한다.
정비고를 나서자 도겸은 북쪽 시장으로 향했다. 세주의 그래프에 적힌 세 곳의 빗물통을 직접 확인해야 했다. 나림은 따라오지 않았지만, 손에 새 장갑을 쥐여 줬다.
시장은 벌써 문을 닫는 중이었다. 빗물통 하나는 바닥까지 말라 있었고, 두 번째는 꼭지에서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세 번째 통 앞에는 키 작은 아이가 빈 주전자를 들고 서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시장에서 국을 파는 상인이었다.
“오늘 비가 왔는데 왜 물통이 비었어요?” 도겸이 물었다.
“지붕에는 비가 안 왔어요. 왕궁 쪽 하늘만 검게 내려앉았죠.” 여자가 아이에게 주전자를 건넸다. “우물은 밤새 줄을 서야 하고, 통을 채울 돈은 없어요.”
세주가 눈을 들었다. “기록에는 오늘 강수량이 평균보다 높게 잡혔습니다.”
“누구 기록인데요?” 여자는 그래프를 보지 않았다. “우리 지붕에 떨어지지 않은 비를 숫자로 세면, 우리도 비를 받은 겁니까?”
도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빗물통의 배수관을 살폈다. 왕실 수로로 향하는 작은 분기구가 시장 지붕 아래 지나가고 있었다. 새벽에 닫힌 수문이 역류를 막았지만, 분기 밸브는 왕실 쪽으로 열린 채였다.
“저 밸브를 돌리면 여기로 물이 올까요?” 아이가 물었다.
“오늘은 아니야.” 도겸이 말했다. “배관에 남은 물을 빼고 다시 채워야 해.”
“그럼 내일은요?”
“장치를 고치면 비가 올 수 있어.”
“약속이에요?”
도겸은 즉답하지 않았다. “약속은 아니야. 내가 할 일이지.”
세주는 가방에서 작은 측정기를 꺼내 배관의 압력을 확인했다. “분기 밸브를 바꾸면 왕실 정원 쪽 물이 줄어듭니다. 하지만 지금 수조가 이미 오염됐으니, 오늘 밤 조정해도 영향은 제한적이에요.”
“왕실이 허가할까요?” 나림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녀가 결국 따라온 모양이었다.
“허가를 받으러 가는 게 아닙니다.” 도겸이 말했다. “오늘 수리의 일부라고 기록할게요. 내일 이 시장에서 비가 안 오면 제 이름으로 책임지겠습니다.”
“혼자 책임지지 말랬지.” 나림은 공구 가방을 내려놓았다. “세주는 압력을 보고, 나는 밸브를 잡는다. 네가 조정해.”
도겸은 그제야 도구를 꺼냈다. 그는 시장 상인에게 밤새 물을 아껴 달라고 부탁했다. 대신 세주는 새벽에 다시 와서 수질을 확인하겠다고 약속했다. 상인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내일 비가 안 오면, 다시 와서 그 말을 해요.”
그 조건을 받아들인 뒤, 도겸은 왕실로 향하던 분기 밸브를 반 칸만 돌렸다. 수로 안쪽에서 물이 출렁이는 소리가 났다. 강수량이 당장 달라진 건 아니었지만, 시장의 배수관에 고인 물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날 밤, 정비명부가 보관된 선반에서 도희의 이름이 적힌 칸 하나가 통째로 비어 있다는 걸 세주가 발견했다. 그 아래에는 검은 비에 젖지 않은 작은 종이 조각이 끼워져 있었다.
‘도겸에게. 왕궁 물을 고치기 전에, 사람들 물을 먼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