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매일 새벽 백업된다

3화: 선택하지 않은 복구
쇠사슬은 잘리지 않았다.
도현이 절단기를 두 번 물렸지만, 낡은 쇠는 휘기만 했다. 한규는 소리를 멈추라고 손짓했다. 문 뒤에서 세 번 두드리는 응답이 있었다. 한 번, 쉼, 두 번. 재민이 어릴 적 장난처럼 쓰던 신호였다. 한규는 한 발 다가갔다가, 지민에게 어깨를 붙잡혔다.
“아직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했어.”
“그 신호는 재민이 썼어.”
“그걸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도현은 단말기에 백업 예약을 띄웠다. 시작까지 6분. 지하차도 전력과 경보 장치를 어제 상태로 복구하면 문은 자동 잠금되고, 내부 센서 기록은 초기화된다. 복구를 막으면 침수 배수망의 예비 제어가 비활성화돼 인근 병원의 지하 전력 통로가 위험해진다. 지민은 병원 쪽을 먼저 지켜야 한다고 했다. 도현은 기록을 덮으면 또 누군가 사라진다고 반박했다.
한규는 손에 쥔 종이를 펼쳤다. 자기 글씨라는 확신은 없었다. 다만 숫자 15와 17의 모양이 같았다. 그가 메모해 둔 교차로 오류 코드와 같은 손놀림이었다. 한규는 문에 귀를 대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 사이로, 아주 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안에 사람이 있어.”
지민은 인명 구조 절차를 요청했다. 관제실에서는 단절 구역 진입을 거부했다. 백업 전에 현장 구조를 시작하면 안전 승인 없이 병원망을 우회해야 했다. 지민은 결국 자신이 책임자로 이름을 걸었다. “백업을 10분만 늦춰. 그동안 내가 병원망을 수동 전환할게.”
“수동 전환은 한 번도 시험하지 않았잖아요.” 도현이 말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거야.”
지민은 휴대 단말기로 병원 전력망을 차단하지 않고 예비 배터리로 넘겼다. 화면의 병상 수가 하나씩 녹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환자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도록 전류를 나누었다. 한규와 도현은 쇠사슬을 다시 물렸다. 이번엔 문 손잡이에 걸린 오래된 잠금이 풀렸다.
문이 10센티미터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밀려 나왔다. 안쪽에는 물이 무릎까지 차 있었다. 벽의 비상등은 꺼져 있었지만, 바닥에 작은 발자국이 이어졌다. 한규는 구조 로프를 허리에 묶고 들어가려 했다. 지민은 그의 산소 잔량을 확인했다. 9분. 도현은 출입기록을 촬영하면서 뒤따랐다.
통로 끝에 서아가 있었다. 그녀는 젖은 작업복을 입고, 두 손으로 문을 붙들고 있었다. 한규가 다가가자 서아는 물러나지 않았다. “당신은 왜 여기에 있어?”
“내가 이 문을 닫았으니까.”
“미래에서 왔다면서.”
“이 기록에는 그렇게 남아 있어요.”
서아는 재민이 마지막으로 구조 신호를 보낸 뒤, 지하차도에서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고 말했다. 백업망은 사고를 막았지만, 당시 시설 상태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그 구조 기록을 덮었다. 재민은 사라진 게 아니라, 내부에 남아 수동 잠금 장치를 붙들었다. 그가 지키던 문 너머에는 당시 침수로 고립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방금 신호는 누가 보낸 거야?” 한규가 물었다.
서아는 답 대신 문을 놓았다. 문 뒤쪽에서 물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지민이 로프를 당겼고, 도현은 발을 헛디뎌 물속으로 넘어졌다. 한규는 그의 작업복을 잡아 끌어 올렸다. 물살이 문에 부딪히자 잠금장치가 흔들렸다.
“백업을 중지해야 해요.” 서아가 외쳤다. “이 문이 복구되면, 지금의 상태가 사라져요.”
지민은 병원망을 가리켰다. “중지하면 예비 전력이 끊겨. 지금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어.”
한규는 서아에게 방법을 물었다. 그녀는 전체 백업 대신 구역별 상태 복구를 제안했다. 단절 구역만 현재 상태로 고정하고, 병원망은 이전 스냅샷으로 복구하는 방식. 기존 권한으로는 불가능했지만, 한규는 유지보수 장비에서 수동으로 경로를 나눌 수 있었다. 성공해도 단절 구역에 남은 사람의 기록은 영구히 복구 불가가 된다. 실패하면 병원 전력이 꺼진다.
“네가 딸이라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하길 원해?”
“아빠라는 이유로 결정해 주길 바라지 않아요.” 서아는 물속에서 흔들리는 손전등을 주웠다. “내가 여기 남을지 나갈지도 내가 고를게요.”
한규는 제어 패널을 열었다. 손목의 화상 흉터가 뜨거워졌다. 오래전 재민을 찾으려 지하차도에 들어갔다가 입은 상처였다. 그날의 기억은 남았지만,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손으로 두 회로를 분리했다. 지민은 병원 예비 전력을 유지하고, 도현은 바깥에서 수동 차단기를 잡았다. 서아는 문을 받쳤다.
한규가 복구 명령을 실행하자 화면에 선택지가 떴다. ‘전체 복원’과 ‘구역 분리’. 그는 두 번째를 눌렀다. 시스템은 경고음을 냈다. 서버가 명령을 거부했지만, 도현이 차단기를 내려 백업 경로 하나를 끊었다. 병원망은 3초간 어두워졌다가 다시 켜졌다. 지하 구역은 현재 상태를 유지했다.
문 너머에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물에 젖은 음성 기록기가 놓여 있었다. 재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규야, 문을 닫아. 밖에 사람이 먼저야.” 그 뒤로는 잡음만 남았다. 재민은 안쪽에 남아 문을 잠갔다. 한규는 그 선택을 되돌리지 않았다. 이번에 구한 사람은 없었지만, 기록은 지워지지 않았다.
서아는 구조 로프를 풀어 달라고 했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겠다고 선택했다. 새벽 백업은 계속되었지만, 이제 한 구역은 매일 덮어쓰이지 않을 것이다. 한규는 마지막 로그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아침이 밝자 지하도 벽의 낡은 시계가 3시 17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초침은 앞으로 갔다. 그 아래, 벽에 새겨진 문장이 하나씩 드러났다.
‘서아를 만나면 기억을 복구하지 마.’
그 글씨는 재민의 것이었다.
“밖으로 나와.” 한규가 말했다.
서아는 문을 붙든 채 고개를 저었다. 물이 불어나면 잠금쇠가 다시 닫힐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과거에 남겨진 사람이 아니라 미래에서 보낸 관측 기록일 수도 있다고 털어놨다. 누가 만들었는지, 실제로 한규의 딸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기억이라고 믿었던 것은 정거장 백업망에서 추출한 기록일 수도 있었다.
“그럼 네가 내 딸이라는 건 거짓말이야?”
“모르겠어요. 내가 아는 건 이 문이 닫히면 안 된다는 것뿐이에요.”
한규는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확실한 가족의 답이었지만, 지금 필요한 건 모두가 빠져나오는 방법이었다. 그는 로프를 서아에게 던졌다. 그녀는 먼저 매듭을 확인하고, 자기 몸이 아니라 문고리에 묶었다. 그 선택을 본 지민은 구조용 고정점을 하나 더 설치했다.
도현은 물에 잠긴 바닥에서 작은 금속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 안에는 구조대 배지 두 개와 젖은 음성 기록기가 있었다. 도현은 배지 중 하나를 알아봤다. 그의 어머니가 실종되기 전 달린 사원증과 같은 회사 이름이었다. 그는 기록기를 켜고 싶어 했지만, 물이 회로 안에 남아 있었다.
“지금 켜면 데이터가 날아갈 수 있어.” 한규가 말했다.
“그럼 다시 못 들을 수도 있어요.”
“건조 장비를 가져오면 살릴 수 있어.”
“새벽 백업까지 기다리면 문이 닫혀요.”
도현은 기록기를 놓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했지만, 증거를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뒤 그는 기록기를 방수 봉투에 넣었다. 먼저 사람을 밖으로 보내고, 장비는 구조대에 맡기기로 했다.
한규는 제어 패널로 돌아가 분리 복구 경로를 설정했다. 전체 복원은 병원 전력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구역 분리는 지하차도 기록을 보존하는 대신, 지하 배수 시스템을 수동으로 유지해야 했다. 지민은 병원 예비 전력이 2분밖에 남지 않았다고 외쳤다. 한규는 병원 스냅샷만 우선 복구하고 지하 구역을 분리할 수 있는지 계산했다. 명령을 둘로 쪼개려면 수동 키를 한 번 사용해야 했고, 키는 한 번만 작동했다.
서아는 문에서 손을 떼고 로프를 잡았다. “내가 이쪽에서 잠금을 풀게요. 당신은 병원부터 살려요.”
그녀가 문을 놓자 물이 밀려들었다. 지민이 로프를 당겼고, 한규는 패널에서 구역 분리 명령을 넣었다. 수동 키가 절반쯤 들어갔을 때 전원이 흔들렸다. 병원망 상태 표시가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도현은 반대편 차단기를 붙잡아야 했다. 그는 한규에게 기록기를 맡기고 스위치를 내렸다.
순간 통로가 암흑에 잠겼다. 한규는 손의 감각으로 키를 끝까지 밀었다. 기계가 낮게 울고, 패널에 두 개의 선택지가 나타났다. 병원망 복구. 지하 구역 현재 유지. 그는 둘을 동시에 실행했다. 시스템은 거부 메시지를 띄웠다. 수동 경로를 연결하려면 단절 구역의 출입 기록을 백업 대상에서 영구 제외해야 했다. 지하에서 누가 나왔는지, 누가 남았는지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이 다시는 복원되지 않을 수 있었다.
지민이 말했다. “그 기록을 시민이 선택하도록 해야 해.”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사라져.”
“그럼 네가 혼자 정하지 마.”
한규는 출입문 옆 수동 인터폰을 켰다. 관제실과 병원 대기실, 지하도에 연결된 비상 채널이 열렸다. 그는 백업이 무엇을 덮고 어떤 위험이 남는지 짧게 설명했다. 병원 전력은 20초 안에 복구해야 했고, 지하 구역의 기록은 공개될 수 있었다. 관제실에서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한규의 손은 키에 고정돼 있었다.
병원에서 먼저 답이 왔다. “전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환자 이름을 지우지 마세요.” 이어서 지하도 관리자가 말했다. “현재 상태를 남겨 주세요. 누가 안에 있는지 우리가 확인하겠습니다.” 대답은 만장일치가 아니었다. 그래도 백업이 모두를 대신해 결정하는 것보다 낫다고 한규는 판단했다.
그는 지하 구역의 현재 상태를 고정하고 병원만 이전 스냅샷으로 복원했다. 복구망이 다시 켜지자 지민은 전력 숫자를 확인했다. 병원의 녹색 표시가 돌아왔다. 지하 문은 열려 있었고, 물은 더 이상 밀려들지 않았다. 구조대가 들어와 통로를 확인했다. 안쪽에 갇힌 사람은 없었다. 재민의 구조 흔적만 남아 있었다.
도현은 어머니의 배지를 품에 넣었다. 서아는 구조대에 붙잡히지 않고 스스로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자신을 조사해도 좋지만, 기억을 강제로 복구하지 말라고 했다. 한규는 동의했다.
아침이 되어도 도시 백업은 예정대로 작동했다. 다만 지하 구역은 복구되지 않았다. 시민들이 남긴 선택과 한규의 기록은 그 자리에 남았다. 새벽 시계는 3시 17분을 지나 움직였다. 초침이 한 바퀴 도는 순간, 지하차도 벽에서 오래된 음성 기록기의 스피커가 켜졌다.
재민의 목소리가 물소리 너머로 들렸다. “규야, 네가 여기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