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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 막내아들은 펀드를 너무 잘함5화

재벌가 막내아들은 펀드를 너무 잘함

재벌가 막내아들은 펀드를 너무 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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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반려된 보고서

아침 햇살이 책상 모서리를 비추었다.

강서준은 옷장 깊숙이 넣어 둔 가방을 꺼냈다. 전날 인출한 돈 중 첫 검증 한도로 정한 현금 이십만 원 봉투를 안쪽에 넣었다. 곁에는 도서관에서 주웠던 접힌 종이와 수첩이 나란히 놓였다.

‘홍콩 법인 9월 만기. 롤오버 확약서 미수령. H.Y.’

글씨에 실린 서늘한 긴장감은 여전했다.

서준은 가방을 메고 1층 현관으로 내려갔다. 대기하던 운전기사 오성호가 문을 열었다.

“도련님, 학교로 모실까요?”

“아니요. 여의도 대한증권 본사로 가 주세요.”

오성호의 손끝이 멈칫했다. 평소의 막내아들이 여의도를 찾을 이유는 없었다.

“교수님이 금융시장 조사를 과제로 내주셨거든요. 집안 회사니까 자료 보기가 더 편할 것 같아서요.”

집안 간판을 믿고 과제나 하러 가는 모양새를 꾸며낸 것이다. 오성호의 어깨가 그제야 내려앉았다.

“알겠습니다. 모시겠습니다.”

차가 성북동 저택을 빠져나왔다. 집안의 감시선은 발걸음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회장실이나 전략실로 보고될 수 있어 알리바이가 필요했다.

여의도 대한증권 본사 앞은 아침부터 붐볐다. 1994년 6월의 여의도는 달아오른 가마솥 같았다. 정문에는 대형 입간판이 섰다.

‘종합주가지수 1,000포인트 돌파 눈앞!’
‘수출 호조와 설비 확장, 한국 경제의 대도약!’

누구도 다가올 파도를 의심하지 않는 도시였다.

서준은 오성호에게 차에서 기다리라고 이른 뒤 1층 영업부 객장으로 들어섰다. 회전문이 돌아가는 순간 거대한 전광판의 붉은 불빛이 쏟아졌다. 시세판 아래에는 주문표를 쥔 투자자들이 환호를 질렀다.

창구로 가 직원에게 대학 과제용 계열사 분석 자료를 청했다. 직원은 앳된 서준의 얼굴을 훑더니 옆에 쌓인 추천 종목 인쇄물을 툭 건넸다.

서준은 소파로 가 종이를 펼쳤다.

화려한 그래프 아래 대한건설과 대한상사의 해외 수주 실적이 적혀 있었다. 동남아 플랜트 착공과 성장 전망뿐이었다.

그러나 서준이 확인하려던 핵심 지표는 없었다.

외화 부채 비율, 단기 차입금 만기 구조, 환율 변동에 따른 금융 비용 부담 같은 위험 신호는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빚이란 영원히 만기가 돌아오지 않는 공짜 돈처럼 포장되어 있었다.

‘영업용 홍보 전단지일 뿐이야.’

서준은 종이를 접었다. 장부를 실제로 뜯어본 분석가의 원본은 더 높은 곳에 있어야 했다. 서준은 7층 리서치센터를 올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 멈추자 타자기 소리와 팩스 마찰음이 복도를 메웠다.

벽면에는 ‘대한증권 리서치센터’ 현판이 걸려 있었고 유리문에는 외부인 출입 금지 팻말이 붙어 있었다. 서준은 망설임 없이 문을 밀고 들어섰다.

자료실 복도로 발을 디디는 순간 뿔테 안경을 쓴 직원이 앞을 막아섰다.

“거기 학생, 여긴 외부인 출입 금지입니다.”

서준은 준비한 학생증을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대한대학교 경제학과 강서준입니다. 교수님 과제 때문에 기업 재무제표 원자료를 확인하러 왔습니다.”

직원의 시선이 학생증의 이름 석 자에 멎었다.

‘강서준.’

직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회장실 오너 일가의 이름을 모르는 간부는 없었다. 얼마 전 본사 전략실을 통해 회장님 막내아들이 복학했다는 소문이 은밀히 돌았던 터였다.

직원은 서준을 살폈다. 어린 티가 남았지만 눈빛만은 깊고 단단했다. 소문의 막내 도련님이 맞다면 함부로 내쫓았다가 화를 입을 수 있었다.

“저기... 강서준 학생?”

“네. 지난달 공개 배포된 산업 분석철만 삼십 분 정도 보고 가겠습니다. 업무에 방해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상대가 섣불리 내치지 못하도록 만드는 미묘한 선을 탄 대답이었다. 직원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딱 삼십 분만이에요. 저기 안쪽 서랍의 일반 열람용 파일만 봐요. 다른 연구원 책상에는 손대지 말고요.”

“감사합니다.”

서준은 자료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얻어낸 시간은 삼십 분이었다.

자료실 구석은 캐비닛 그늘 때문에 어둑했다. 묵은 종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서준은 일반 열람용 바인더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의 눈길이 멈춘 곳은 캐비닛 맨 아래 칸의 플라스틱 바구니였다. 겉면에 ‘폐기 및 결재 반려 문서 대기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준은 바닥에 앉아 서류 뭉치를 넘겼다. 잡다한 원고들을 뒤적이던 손가락이 두툼한 회색 바인더에 닿았다.

표지 상단에 타자기로 찍힌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아시아 금융기관 스프레드 추이 및 단기 외화 차입 기업 유동성 점검]
작성: 리서치센터 기업분석팀 대리 윤하린.

서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바인더를 펼치자 첫 장부터 빽빽한 도표와 통계 숫자가 쏟아졌다.

윤하린은 이미 현실을 꿰뚫고 있었다. 국내 대기업들의 외화 차입금 만기 불일치 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당사 계열사를 포함한 주요 제조 대기업의 외화 차입금 중 만기 1년 미만의 단기 대출 비중은 68%에 달함. 설비투자의 회수 기간은 평균 5년 이상으로 조달과 운용의 기간 미스매치가 극심함.’

‘홍콩 및 도쿄 금융시장의 외국계 은행들은 아시아 한도를 의식해 단기 대출 가산금리를 인상 중. 향후 국제 금리 인상 시 차환 거절에 따른 유동성 위기 발생 가능성 농후.’

서준은 숨을 죽이고 다음 장을 넘겼다. 보고서 후반부에는 계열사들의 자금 현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대한건설과 대한상사의 해외 사업장 부채 구조. 9월 만기 도래 차입금 집중.’

그리고 14페이지 하단, 붉은 펜으로 그어진 굵은 줄들이 시야를 채웠다.

‘대한상사 홍콩 법인, 9월 15일 만기 도래 5,000만 달러. 현지 금융단 신디케이트 롤오버 확약서 미수령. 만기 연장 불발 시 본사 지급보증 이행으로 인한 원화 유동성 급격 악화 예상.’

활자 위로 거친 결재 반려 메모가 적혀 있었다.

‘즉시 삭제할 것. 오너 일가의 동남아 프로젝트 기공식 앞두고 찬물 끼얹는 행위임. 전략실 보고 시 문책 우려. 발행 불가.’

붉은 글씨 아래 작은 자필 메모가 또 적혀 있었다.

‘추정이 아닌 현지 팩스 및 유선 확인 사항임. 위험을 지운다고 장부의 만기가 사라지지는 않음. H.Y.’

서준은 주머니에서 도서관 쪽지를 꺼냈다.

‘홍콩 법인 9월 만기. 롤오버 확약서 미수령. H.Y.’

두 메모를 대조했다. 알파벳 H의 긴 가로획과 Y의 둥근 필선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윤하린.

그녀는 책상머리의 낙관론을 거부하고 장부를 직접 추적한 유일한 분석가였다. 그 대가로 상부의 검열과 반려라는 벽에 부딪혀 있었다.

‘미래를 알지 못하고도 이 숫자를 찾아냈단 말인가.’

서준은 서늘한 전율을 느꼈다. 자신은 미래 기억을 쥐고 있었지만 윤하린은 오직 차가운 데이터와 분석가의 양심만으로 거대한 부채의 급소를 찾아냈다. 그녀의 보고서는 사장되고 있었지만 안의 숫자는 살아 있었다.


그때였다. 복도에서 문이 거칠게 열리며 고성이 터져 나왔다.

“윤 대리!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서준은 재빨리 보고서를 덮고 캐비닛 뒤로 몸을 숨겼다. 문틈 사이로 복도가 내다보였다. 배가 불룩한 리서치센터장이 서류 뭉치를 흔들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남색 정장의 윤하린이 서 있었다. 피로가 짙었지만 칼날처럼 차가운 눈빛이었다.

“센터장님,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다른 연구원들이 봅니다.”

“내가 지금 목소리 낮추게 생겼어? 전략기획실에서 방금 무슨 연락이 왔는지 알아? 그룹 역점 사업인데 계열사 증권사에서 찬물을 끼얹으면 어쩌자는 거야!”

윤하린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

“보고서의 목적은 찬사가 아니라 위험 측정입니다. 홍콩 현지 신디케이트 은행들이 롤오버 조건을 까다롭게 바꾸고 있습니다. 확약서도 없이 만기를 맞는 건 위험합니다.”

“회장님께서 진두지휘하고 장남이신 강태준 부사장님이 직접 챙기는 프로젝트야! 거기다 대고 부도 위험 같은 소리를 쓰면 전략실에서 가만있겠어?”

“부도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습니다. 안전판을 마련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게 그 소리지! 당장 초안 파쇄기에 집어넣어. 영업부에서 쓰기 좋게 호재 위주로 다시 써 와!”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위험을 알면서도 거짓 보고서를 쓰는 건 애널리스트가 할 일이 아닙니다.”

윤하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센터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좋아, 네 고집대로 해 봐. 이번 인사 때 자리가 어디로 가는지 두고 보자고!”

센터장은 서류철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인쇄된 종이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센터장은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복도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누구 하나 나서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자판만 두드렸다.

윤하린은 홀로 복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고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주먹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윤하린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종이를 한 장씩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서준은 문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장 뛰어나가 당신의 분석이 백번 맞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발을 떼지 않았다.

스무 살 막내아들의 개입은 윤하린을 사내 권력 다툼의 볼모로 몰아넣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값싼 동정이 아니라 숫자를 무기로 삼아 시장에서 이겨줄 운용자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서준은 수첩을 꺼냈다. 윤하린의 보고서에서 보았던 핵심 수치를 빠르게 옮겨 적었다.

홍콩 법인 만기 9월 15일. 금액 5,000만 달러. 차환 가산금리 추이. 대한상사 지급보증 조건.

기억해야 할 것은 감정이 아니라 숫자였다. 서준은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보고서를 바구니 밑바닥에 밀어 넣었다.

비상계단을 타고 1층 로비로 내려왔다. 정문 쪽에서 걸어오는 세 남자의 옷깃에 전략기획실 배지가 반짝였다.

“...리서치 쪽에서 헛소리 안 나오게 단속 철저히 하라고 민 실장님께서 지시하셨어.”

“알겠습니다. 윤 대리 건은 이번 분기 평가에서 손보겠습니다.”

민기혁의 전략기획실이었다. 그들은 이미 윤하린의 보고서를 틀어막고 강태준의 위험천만한 차입 구조를 감싸고 있었다.

서준은 모자를 눌러쓰며 정문을 빠져나왔다. 한낮의 무더운 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기다리던 세단에 올라타자 오성호가 물었다.

“자료는 잘 찾으셨습니까?”

“네. 생각보다 배운 게 많았어요.”

차가 여의도를 벗어났다. 가방 속 이십만 원은 쓰지 않았지만 얻은 것은 수십억 원의 정보보다 귀했다.

윤하린의 보고서는 짓밟혔지만 진실은 서준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전략기획실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훨씬 깊숙이 드리워져 있었다. 서준이 여의도를 찾았다는 사실 또한 오늘 저녁이면 저택의 서재와 장남 강태준의 귀로 들어갈 터였다.

‘비웃겠지.’

서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막내가 과제를 핑계로 객장을 기웃거렸다는 소식은 태준에게 하찮은 장난처럼 보일 터였다. 바로 그 방심이야말로 서준이 파고들 가장 안전한 틈이었다.

가방 속 수첩의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9월 15일, 5,000만 달러. 시한폭탄의 초침은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그 폭탄을 해체할 도구를 찾으러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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