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막내아들은 펀드를 너무 잘함

4화: 첫 종잣돈의 가격
저택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강서준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방으로 가지 않았다. 대학에서 확인한 숫자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환율 806.1원. 9월 만기. 롤오버 확약서 미수령.
그 숫자들을 확인하려면 자기 돈부터 알아야 했다. 돈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남의 부채 구조를 걱정하는 건 순서가 뒤집힌 일이었다.
방 안의 책상 서랍에서 지갑을 꺼냈다. 현금은 이십만 원 남짓이었다. 재벌가 막내라는 이름과 달리 손에 잡히는 돈은 많지 않았다.
서준은 1층 끝에 있는 김정자의 사무실로 향했다. 집안 살림을 맡은 그녀라면 통장의 위치를 알고 있을 터였다.
“도련님. 무슨 일이세요?”
“제 통장 좀 확인하고 싶어서요.”
김정자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
“용돈이 부족하신가요? 이번 달 것도 모레 들어올 텐데요.”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대학에서 자료를 살 일이 생겼어요. 제가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대학 과제라는 말에 김정자의 표정이 풀렸다. 그녀는 책장 아래쪽에서 작은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통장은 제가 보관하고 있었어요. 도련님이 병원에 가기 전에도 찾으신 적은 없고요.”
“제 명의인데도요?”
“회장님 댁 자녀분들 통장은 다 따로 보관합니다. 큰돈이 움직일 때는 도장도 필요하고요.”
서랍 안에서 봉투 세 개와 현금 봉투 하나가 나왔다.
첫 번째 통장은 대한은행 보통예금이었다. 잔액은 1,420,000원. 매달 들어오던 생활비는 20만 원과 30만 원으로 일정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정기적금이었다. 납입 원금은 1,500,000원이고 만기까지 일곱 달이 남아 있었다.
세 번째 통장은 대학 등록금 계좌였다. 잔액은 거의 비어 있었다.
“등록금 계좌는 왜 비어 있죠?”
“등록금은 회장님 쪽에서 학교로 바로 보내셔서요. 도련님 생활비와는 따로예요.”
현금 봉투 안에는 만 원짜리 스무 장이 들어 있었다.
서준은 숫자를 노트에 옮겼다.
보통예금 142만 원. 정기적금 150만 원. 현금 20만 원. 합계 312만 원.
총액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적금은 만기 전까지 묶여 있었다.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돈은 보통예금과 현금을 합친 162만 원뿐이었다.
“적금은 깨지 마세요.”
김정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요?”
“회장님께서 막내에게는 생활 걱정 없이 지내게 하라고 하셨어요. 적금까지 깨면 제가 혼나요.”
자기 이름으로 된 돈인데도 최종 결정권은 자신에게 없었다. 가족이 주는 돈과 자기 돈의 경계가 흐려져 있었다.
“내일 은행에 가서 거래 내역을 확인해도 될까요?”
“은행까지 직접 가시게요?”
“제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김정자는 보통예금 통장을 봉투에 넣어 건넸다.
“도장은 제가 가지고 있어요. 필요하면 함께 가겠습니다.”
서준은 봉투를 받아 들었다. 통장도 도장도 자기 손에 없었다. 돈의 주인이 아니라 돈의 수혜자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날 밤 노트에는 짧은 문장이 추가됐다.
생활비와 투자금은 섞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대한은행 본점 창구에는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김정자는 서준의 뒤에서 통장 봉투를 쥐고 있었다. 운전기사 오성호는 현관 앞에 차를 세워 두었다. 서준은 자신이 잔액을 확인하러 왔다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창구 직원은 통장을 받아 들고 이름을 확인한 뒤 자세를 고쳤다.
“강 회장님 댁 도련님이시군요. 잔액만 확인하시면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거래 내역도 전부 찍어 주세요. 처음 입금된 날부터요.”
“최근 내역만 보셔도 되지 않을까요?”
“날짜와 금액을 전부 봐야 합니다.”
직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통장을 기계에 넣었다. 종이에 날짜와 숫자가 한 줄씩 찍혔다.
매달 25일 생활비가 들어왔다. 30만 원인 달도 있었고 20만 원인 달도 있었다. 지출은 대부분 현금 인출이었다.
서준은 석 달 전 날짜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740,000원 현금 인출.
“이 금액은 어떤 방식으로 빠져나갔습니까?”
“창구에서 현금으로 찾으신 기록입니다. 수표는 아니고요.”
“도장은요?”
“본인 도장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그날은 자신이 병원에 가기 전날이었다. 아팠다는 기억은 있었지만 74만 원이 필요했던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김정자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련님이 그날 외출하셨던 것 같기는 해요.”
“어디에 갔는지는 모르세요?”
“저는 집에 있었어요. 운전은 오 기사님이 하셨고요.”
서준은 창구 밖에 서 있는 오성호를 바라봤다. 오성호는 은행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배려인지 지시인지 알 수 없었다.
“적금도 확인해 주세요.”
직원은 두 번째 통장을 받아 들었다.
“중도 해지하시면 이자가 거의 붙지 않습니다. 지금 해지하면 원금 150만 원만 받으실 가능성이 큽니다.”
“유지하겠습니다.”
결정은 빨랐다. 일곱 달 남은 돈을 깨는 순간 생활비와 조사비가 한 덩어리가 된다. 작은 돈일수록 회수 시점을 지켜야 했다.
“보통예금에서 86만 원을 찾아 주세요.”
김정자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 돈을 어디에 쓰시려고요?”
“학교 자료와 교통비예요. 나머지는 생활비로 남겨 주세요.”
직원은 지폐를 세어 내밀었다. 서준은 돈을 받자마자 계산을 다시 했다.
보통예금 잔액 56만 원. 손에 들고 있던 현금 20만 원. 정기적금 150만 원.
전체 자산은 여전히 312만 원이었다. 적금을 제외한 즉시 유동성은 162만 원에서 86만 원을 옮긴 뒤에도 생활비 76만 원과 새로 인출한 현금 86만 원으로 나뉘어 있었다. 서준은 새로 인출한 86만 원 중 20만 원을 비상금으로 묶고 66만 원을 실제 운용 가능 자금으로 정했다.
서준은 봉투 겉면에 66만 원이라고 적었다.
미래의 시장을 기억하는 사람이 현재의 장부에서 틀리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86만 원을 전부 운용 자금이라고 부르는 순간 이미 숫자를 부풀리고 있었다.
은행을 나온 서준은 대한대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자료실 한쪽에는 은행별 금리표와 증권사 수수료 안내서가 꽂혀 있었다. 그는 전날 보았던 외환 자료 옆에 자리를 잡고 종이를 펼쳤다.
정기적금 금리는 높았다. 반대로 현금으로 빼낸 돈은 그대로 두면 아무것도 만들지 못했다. 증권사 거래 수수료와 세금을 계산하자 소액 거래에서는 수익이 조금만 흔들려도 비용이 먼저 빠졌다.
서준은 노트에 세 줄을 적었다.
첫째. 적금을 깨지 않는다.
둘째. 가족 자금과 내 자금을 섞지 않는다.
셋째. 수익률보다 회수 가능성을 먼저 확인한다.
66만 원으로 무엇을 사든 손실이 나면 다음 자료를 구할 여력이 줄어든다. 첫 거래는 돈을 벌기 위한 거래가 아니라 시장을 확인하기 위한 거래여야 했다.
그는 윤하린의 보고서를 떠올렸다. 단기 외화 차입 기업의 차환 가능성을 점검하라는 문장. 그 자료의 출처를 확인하려면 대한증권에 접근해야 했다.
창구에서 자신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던 은행 직원처럼 대한증권 직원도 자신을 가족의 심부름꾼으로 볼 가능성이 높았다. 그 시선부터 바꿀 방법이 필요했다.
서준은 66만 원 중 20만 원만 첫 검증 한도로 정했다. 복사비와 전화비와 교통비를 합쳐도 충분했다. 나머지 46만 원은 봉투에 봉인했다.
1994년 6월 16일. 운용 가능 잔액 66만 원. 첫 검증 한도 20만 원.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돈을 굴리는 사람은 돈이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 순간도 정해야 했다.
저택으로 돌아온 서준은 방 문을 잠갔다.
노트를 펼쳐 은행에서 옮겨 적은 내역을 다시 확인했다. 74만 원 현금 인출 날짜 옆에는 별표를 쳤다.
수업 결석. 운전기사 동행 여부 불명. 사용처 불명.
박진우에게 물어보면 그날 수업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 하나로 자신의 기억 공백을 드러낼 수 있었다. 서준은 직접 묻지 않기로 했다.
가족에게 자료 구입비를 달라고 하면 몇백만 원쯤은 바로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 돈은 강문식의 돈이다. 누군가 사용처를 묻는 순간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가족의 판단이 된다.
66만 원은 작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변명할 수 없는 크기였고 책임을 미룰 수 없는 크기였다.
서준은 봉투를 서랍 안쪽에 넣었다. 그 위에 74만 원 인출 날짜와 두 번째 문장을 적었다.
돈의 행방을 찾기 전에는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다.
불을 끄려는 순간 복도에서 김정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통장 봉투는 책상 서랍에 넣어두셨대요.”
잠시 뒤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누구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회장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장은 계속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서준은 서랍 안의 봉투를 바라봤다. 은행에 다녀온 사실과 통장을 어디에 두었는지가 이미 집안의 보고 대상이었다. 자기 돈을 확인하는 일조차 완전히 사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그는 봉투를 꺼내 옷장 안쪽의 낡은 가방에 넣었다. 가족의 눈을 피하려는 행동이 아니라 돈의 경로를 섞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다음 날 대한증권에 갈 것이다. 윤하린의 보고서 원본과 홍콩 법인 자료의 출처를 확인한다. 동시에 74만 원이 빠져나간 날의 동선도 찾아야 했다.
첫 종잣돈은 66만 원이었다.
하지만 그 돈보다 먼저 찾아야 할 것이 있었다.
돈이 빠져나간 날 강서준이 누구를 만났는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