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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 막내아들은 펀드를 너무 잘함3화

재벌가 막내아들은 펀드를 너무 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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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숫자가 기억을 배신할 때

대한대학교 정문을 통과하자 눅눅한 초여름 바람이 셔츠 안으로 파고들었다.

강서준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몸은 이 길을 알고 있었다. 오른쪽의 학생회관을 지나면 경제학과 건물이 나오고 그 앞 계단을 오르면 1학년 강의실이었다. 머리로는 처음 걷는 길인데 발목과 무릎은 망설임이 없었다.

“야, 강서준!”

뒤에서 낡은 운동화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서준이 돌아보자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다.

“너 또 연락도 없이 사라졌냐? 어제 자취방에서 기다리다 라면만 세 개 먹었어.”

“미안. 집에 일이 좀 있었어.”

몸에 남은 기억이 그 남자의 이름을 꺼내 주었다. 박진우. 같은 과 동기이자 서준의 노트를 빌려 가고도 돌려주지 않는 친구였다.

“집에 일이 있기는. 너네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신문에 먼저 나겠다.”

진우는 농담을 던졌지만 서준의 얼굴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많이 아팠다는 소문은 들었어. 머리는 괜찮냐?”

“응. 이제 괜찮아.”

서준은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웃었다. 원래의 자신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할수록 몸속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 사이에 틈이 생겼다.

강의실 문을 열자 칠판 한쪽에 교수의 필체가 보였다.

‘6월 14일 콜금리 13.8%, 원/달러 802.4원.’

서준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숫자를 읽었다. 전날 신문에서 본 환율은 800원 안팎이었다. 기억 속의 1994년 6월은 큰 충격 없이 지나가는 시기였다. 금리는 높은 편이지만 기업들은 성장률을 믿고 외화를 끌어왔다. 환율은 당분간 안정적일 터였다.

그런데 칠판 아래에는 조교가 적어 둔 작은 메모가 있었다.

‘금일 오전 고시 806.1원. 전일 대비 상승.’

서준은 손가락으로 책상 모서리를 눌렀다.

806.1.

오차라고 하기에는 움직임이 컸다. 하루 만에 몇 원 오르는 일 자체가 위기는 아니었다. 문제는 방향이었다. 기억 속 기준선보다 이미 높았고 상승이 멈췄다는 흔적도 없었다.

진우가 옆자리에서 속삭였다.

“뭘 그렇게 봐? 환율이야 매일 바뀌는 거지.”

“그렇지.”

서준은 시선을 거두었다. 진우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026년의 기억이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고 기억과 현실이 다른 이유를 짐작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교수가 들어오면서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김영석 교수는 출석부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칠판의 숫자부터 바라보았다.

“환율은 숫자 하나로 경제를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오늘은 그 숫자가 기업의 빚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겠습니다.”

서준은 펜을 들었다.


김영석 교수는 칠판에 두 개의 화살표를 그렸다. 하나는 은행에서 기업으로 향했고 다른 하나는 기업에서 해외 채권자로 향했다.

“국내에서 원화로 돈을 벌어 달러로 갚는 회사가 있다고 합시다. 빌릴 때 환율이 800원이었는데 갚을 때 850원이 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몇몇 학생이 손을 들었다.

“원화 상환액이 늘어납니다.”

“맞습니다. 그럼 금리가 국내보다 싸다는 이유만으로 외화 차입이 유리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앞줄의 학생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환율이 안정적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전제는 언제나 가장 먼저 무너지는 부분이지요.”

교수의 말에 서준의 펜 끝이 멈췄다.

강문식의 식탁이 떠올랐다. 태준은 리보에 0.8퍼센트를 더한 금리가 싸다는 사실만 강조했다. 만기는 1년이었다. 플랜트가 돈을 벌기 시작하는 시점은 그보다 훨씬 뒤일 가능성이 컸다.

“강서준 학생.”

갑작스러운 호명에 진우가 팔꿈치로 그를 찔렀다.

“네?”

“기업이 1년 만기 외화 대출로 5년짜리 설비를 지었다고 합시다. 환율이 그대로라면 문제가 없습니까?”

서준은 잠깐 고개를 숙였다. 너무 빨리 답하면 의심을 살 수 있었다. 반대로 머뭇거리면 평소의 강서준처럼 보일 수 있었다.

“대출을 계속 연장할 수 있다면 당장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당장이라는 말 뒤에는 무엇이 숨어 있지요?”

“연장이 안 되면 설비가 돈을 벌기 전에 원금을 갚아야 합니다. 그러면 환율이 오르지 않아도 현금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강의실 뒤쪽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교수는 서준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금리와 환율만 볼 게 아니라 상환 시점과 현금 유입 시점을 맞춰야 합니다. 재무제표는 수익을 보여주지만 파산은 현금이 모자라는 날 찾아옵니다.”

서준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방금 답은 교과서의 범위 안에 있었다. 그러나 교수의 눈빛은 단순한 모범 답안 이상을 읽어 내려는 듯했다.

수업이 끝나자 김영석 교수가 그를 불렀다.

“자네, 오늘 도서관에 갈 생각인가?”

“네. 자료를 좀 찾아보려고요.”

“그럼 경제통계 연감의 외환 항목을 확인해 보게. 신문 기사보다 원자료가 덜 친절하지만 거짓말도 덜 하지. 다음 주까지 간단한 표를 만들어 오면 연구실 자료를 볼 수 있게 해 주지.”

서준은 감사하다고 말하려다 멈췄다. 연구실 자료는 정보망의 시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교수에게 접근하는 이유가 미래 지식을 숨기기 위한 도피여서는 안 됐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실제 자료를 읽는 습관이었다.

“해 보겠습니다.”

교수는 돌아섰고 진우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너 오늘 이상하다. 예전에는 출석만 부르면 자던 애가.”

“한 번쯤은 들어야 졸업하지.”

“네가 졸업을 걱정하는 날도 오는구나.”

진우의 웃음에 서준도 따라 웃었다. 웃음은 자연스러웠지만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수업에서 말한 1년과 5년의 차이는 집 식탁 위에 이미 현실로 놓여 있었다.


도서관 열람실은 오래된 종이 냄새로 가득했다.

서준은 경제통계 연감과 한국은행 월보를 나란히 펼쳤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숫자를 노트에 옮겼다. 3월과 4월의 환율, 단기 금리, 은행의 해외 차입 규모. 기억 속의 큰 흐름과 현재의 숫자를 한 줄씩 맞춰 보았다.

처음에는 차이가 작았다. 서준이 기억하는 4월 말 원/달러 환율은 798원대였지만 연감의 확정치는 801원대였다. 뉴스에서 말하는 반올림 오차로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5월로 넘어가자 차이가 벌어졌다. 당시 예상보다 원화 약세가 빨랐고 6월 첫째 주부터 홍콩 금융단이 한국 기업의 단기 차입에 붙이는 가산금리를 조금씩 올리고 있었다.

그는 증권사 주간 시황 자료를 찾아 서류철을 꺼냈다. 대한증권 리서치센터의 보고서였다. 대부분은 수출 증가와 설비투자 확대를 낙관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 구석에 짧은 문장이 있었다.

‘아시아 금융기관의 만기 연장 심사가 보수적으로 변하고 있어 단기 외화 차입 기업은 차환 가능성을 별도 점검할 필요가 있음.’

작성자는 윤하린이었다.

서준은 이름 아래 적힌 직급을 확인했다. 대리 애널리스트. 보고서는 전망의 강도를 낮추고 있었지만 문장 사이의 경고는 분명했다. 누군가 이 자료를 읽는다면 태준의 차입 계약부터 들여다봐야 했다.

그는 곧장 대한그룹을 검색하려다 손을 멈췄다. 검색이라는 말은 이 시대에 없었다. 신문철 색인을 찾아 기업명을 검색하고 마이크로필름을 돌려야 했다. 서준은 익숙하지 않은 기계 앞에 앉아 날짜별 신문을 한 장씩 넘겼다.

대한그룹의 동남아 사업 기사는 여러 번 나왔지만 차입 조건은 모두 빠져 있었다. 투자 규모와 준공 일정은 크게 보도되었고 금융 조달은 ‘해외 금융단과 협의 중’이라는 말로 덮여 있었다.

그때 복사해 둔 증권사 자료 사이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도서관 자료의 일부가 아니었다. 누군가 연필로 표의 숫자 옆에 표시해 둔 종이였다.

‘홍콩 법인 9월 만기. 롤오버 확약서 미수령.’

서준은 숨을 멈췄다.

글씨 아래에는 보고서 쪽수와 함께 작은 이니셜이 있었다. H.Y.

윤하린의 이니셜과 같았다. 물론 같은 이니셜을 가진 사람은 많았다. 그 종이가 그녀가 남긴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대한그룹의 홍콩 법인을 추적하고 있었고 만기 연장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준은 종이를 노트 안쪽에 끼웠다. 훔친 것이 아니라 출처 확인을 위해 보관하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설명했지만 손끝은 차가웠다.

기억 속의 1994년은 아직 태풍 전의 고요였다. 그러나 눈앞의 자료에는 바람이 불기 시작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806.1원이라는 환율도, 가산금리의 움직임도, 보고서 마지막 문장도 각각은 작은 일처럼 보였다. 작은 일들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미래를 안다는 감각이 처음으로 불편해졌다. 큰 파도가 온다는 사실을 알아도 파도가 어느 날 어느 높이로 밀려올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손을 대는 순간 파도의 모양도 바뀔 수 있었다.

서준은 노트 첫 줄에 적었다.

‘기억은 기준선이다. 결론이 아니다.’


오후가 되자 도서관 밖의 햇빛이 한층 강해졌다.

서준은 학생회관 구석의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갔다. 집에 전화할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혼자 움직이는 막내가 갑자기 경제 자료를 찾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다. 교수에게 연구 보조를 받는다는 설명을 가족에게 먼저 흘려 두는 편이 안전했다.

수화기를 들고도 한동안 번호를 누르지 않았다. 유민에게 전화해 백화점 결제가 실제로 얼마나 밀렸는지 물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 하나가 유민의 보고서와 태준의 차입을 연결하는 고리가 될 수 있었다. 아직은 유민을 위험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대신 교수의 연구실 번호를 노트에 적었다. 다음 주까지 표를 만들고 연구실 자료를 보겠다고 약속하면 자연스럽게 자료의 출처를 넓힐 수 있었다. 신문과 연감만으로는 홍콩 법인의 계약을 확인할 수 없었다.

부스 밖에서 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준아, 너 안에 있냐?”

서준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응. 금방 나갈게.”

“집에서 전화 왔어. 운전기사 아저씨가 기다린대.”

“벌써?”

“네가 재벌가 막내인 걸 잊었냐? 우리 같은 사람은 버스 시간표를 보고 너는 차 시간을 보지.”

진우가 웃었지만 서준은 웃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오늘 확인한 사실을 얼굴에 숨겨야 했다. 강문식은 막내의 질문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고 태준은 그 질문을 우연한 농담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차에 오르기 전 서준은 도서관에서 가져온 종이를 다시 확인했다. 9월 만기. 롤오버 확약서 미수령.

석 달 뒤라는 말은 식탁에서 들었다. 이제 그 말은 기억이 아니라 문서의 흔적으로 바뀌었다.

서준은 노트를 덮었다.

“오늘 집에 가면 누나한테 백화점 결제 상황부터 물어봐야겠어.”

입 밖으로 나온 말에 스스로 놀랐다. 유민에게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어도 현장의 숫자를 확인할 수는 있었다. 숫자와 사람의 말을 따로 모으고 서로 맞춰 보는 것. 그것이 지금의 서준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운용이었다.

차가 저택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대학의 게시판과 붐비는 정류장이 뒤로 밀려났다.

서준은 윤하린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아직 만난 적 없는 애널리스트. 보고서 한 장의 문장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쪽지 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두 조각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한그룹의 달러 빚은 식탁 위에 보이는 것보다 깊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기억만 믿고 기다릴 수 없었다. 서준은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다음 행동을 정했다.

대한증권에서 원자료의 출처를 확인한다. 그다음 홍콩 법인의 만기 연장 여부를 직접 확인한다.

확인할 수 없다면 확인할 수 없는 이유부터 찾아낸다.

차가 저택 대문 앞에 멈췄다. 서준은 다시 철없는 막내의 표정을 만들었다. 그러나 손에 쥔 노트의 첫 줄은 지워지지 않았다.

기억은 기준선이다. 결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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