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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 막내아들은 펀드를 너무 잘함6화

재벌가 막내아들은 펀드를 너무 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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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웃음 뒤의 기록

차창에 비친 서준의 얼굴이 흔들렸다. 여의도에서 빠져나온 차가 한강 다리에 올라섰다.

가방 안에는 윤하린의 보고서에서 옮긴 숫자가 있었다. 9월 15일. 5천만 달러. 확약서 미수령.

하지만 서준이 그 종이를 펼쳐 아버지에게 보여 줄 수는 없었다. 폐기 대기함의 반려 보고서는 공식 자료가 아니었다. 출처를 물으면 윤하린이 먼저 곤란해진다.

그 종이는 서준에게 위험을 알려 주었지만 남을 설득할 증거가 되지는 못했다. 본 사람의 이름이 지워지는 순간 숫자마저 소문으로 취급될 것이다. 서준은 수첩을 가방 깊이 밀어 넣었다.

“도련님, 학교로 바로 가실까요?”

운전석의 오성호가 거울을 보았다.

“집으로 가 주세요.”

서준은 대답한 뒤 한참을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오성호의 손이 방향 지시등을 켰다. 익숙한 동작을 보자 은행 통장의 출금 날짜가 떠올랐다.

“성호 아저씨. 제가 아팠을 무렵엔 학교를 자주 빠졌죠?”

“며칠 그랬습니다. 회복하셔서 다행이지요.”

“병원 가기 전날도요?”

오성호가 잠깐 말을 멈췄다. 서준은 되도록 무심한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그날은 은행에 들렀습니다. 그다음 학교 쪽으로 가자고 하셨고요.”

서준의 손가락이 가방 끈을 조였다.

“학교까지 들어갔나요?”

“정문 앞은 아니었습니다. 후문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내려 달라셨지요. 기다리지 말라고도 하셨습니다. 저는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고요.”

“제가 혼자 걸어갔나요?”

“그때는 혼자셨습니다. 평소엔 친구를 기다리면 제게 말씀하셨는데 그날은 바로 가라고 하셔서 기억합니다.”

은행에서 74만 원을 꺼낸 뒤 대학 후문 부근에서 차를 보냈다. 거기까지가 오성호의 기억이었다.

“내가 그때 누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어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묻는 순간 조사가 된다. 운전기사가 저택에 돌아가 이 대화를 누구에게 전할지도 몰랐다.

“요즘 과제 때문에 학교 생각만 나서요. 별일 아니에요.”

오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거울 속 그의 눈은 잠시 서준을 살폈다.

서준은 수첩을 꺼내지 않았다. 후문이라는 두 글자를 머릿속에 묶었다. 74만 원의 행방은 아직 멀었다.

원래 강서준에게 그날은 무슨 날이었을까. 누군가와 한 약속이라면 상대는 아직 스무 살 강서준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서준은 모르는 사람의 삶을 제 것처럼 판단하는 일이 잠시 두려워졌다.


저녁 식탁에는 생선 접시와 차갑게 식힌 보리차가 올라왔다. 강문식은 신문 경제면을 접어 옆에 두었고 유민은 늦게 들어와 의자를 당겼다.

태준은 서준이 앉자마자 웃었다. 누가 어디에 다녀왔는지 저택 안에서는 신문 기사보다 빨리 돌았다.

“우리 막내가 증권사 구경을 다 갔다더라.”

김정자가 물잔을 놓던 손을 멈췄다. 태준의 눈길은 서준의 가방에 닿았다.

“학교 과제예요.”

“과제라. 객장에선 무슨 종목을 찍던?”

“종목은 안 봤어요.”

“그럼 수익률이라도 구경했나?”

“기업 자료를 보러 갔습니다.”

태준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경제학과 한 학기 다녔다고 재무제표가 보이냐? 증권사는 사람들이 돈을 놓고 겨루는 곳이야. 발표 과제나 하러 기웃거릴 곳이 아니지.”

서준은 입안의 밥을 삼켰다. 홍콩 법인의 만기를 말하면 형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그러나 그 숫자가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개 자료부터 보려고요. 모르는 수치는 모른다고 적고요.”

“착하네. 모르는 게 뭔지는 아는구나.”

태준이 웃자 식탁에 짧은 웃음이 번졌다가 사라졌다. 홍명숙은 서준의 반찬 접시를 밀어 주었고 문식은 말없이 보리차 잔을 들었다.

서준은 접시를 보았다. 어머니는 방금 말을 듣지 못한 척했지만 젓가락 끝에 집힌 생선 살이 부서져 있었다. 이 집에서 태준의 확신을 거스르면 가족 누구나 불편해진다. 윤하린의 보고서를 들이밀어도 그 불편이 진실로 바뀐다는 보장은 없었다.

태준은 다시 물었다.

“그렇게 열심히 봤으면 대한상사 전망은 어떠냐?”

“자료를 더 봐야 해요.”

“그것도 모르면 왜 여의도까지 갔어? 내게 물어보지.”

태준은 접어 둔 신문 경제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대한상사의 해외 수주 기사 사진이 식탁을 향해 펼쳐졌다.

“여기 봐라. 현장 하나 열리면 협력사 수십 곳이 따라 움직인다. 네가 객장에서 본 숫자보다 이 사진 한 장이 더 정확할 수도 있어.”

서준은 사진 속 안전모 행렬을 내려다보았다. 공사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임금도 저 만기와 묶여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출처 없는 경고 한마디로 태준을 자극할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막내가 돈 냄새를 맡았나 봅니다. 용돈으로 주식 한두 장 사 보게 두죠.”

서준은 태준의 웃음을 받았다. 당장 위험을 알려 주고 싶은 충동과 아무 근거도 없이 경고했다가 모든 문이 닫힐 수 있다는 계산이 충돌했다.

“제 돈부터 잃지 않는 법을 배우는 중이에요.”

태준의 미소가 조금 굳었다.

“내가 네 돈을 잃게 할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런 뜻은 아니에요. 과제 답에도 근거가 필요해서요.”

태준은 서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서준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비밀을 감춘 채 형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문식이 신문을 다시 펼쳤다.

“태준아. 애가 공부하겠다는데 내버려 둬라.”

낮은 목소리였다. 태준은 웃음을 되찾았다.

“예. 제가 괜히 놀렸습니다.”

유민이 그 틈에 물었다.

“공개 자료만 보면 회사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는 잘 안 보일 텐데. 내일 백화점에 올래? 입점 업체 쪽 월말 결제 자료라면 보여 줄 수 있는 범위가 있어.”

태준이 그녀를 보았다.

“유민아. 막내 숙제까지 네가 해 줄 필요 없어.”

“숙제는 본인이 할 거야. 현장을 보여 주겠다는 거지.”

“결제 서류가 경제학 교재는 아니잖아.”

“돈이 늦게 도착하면 업체는 그날 직원 월급부터 걱정해. 그런 숫자도 봐야지.”

유민은 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태준도 물잔을 들며 말을 접었다.

서준은 유민의 시선을 받았다. 그녀는 식탁에서 결제 지연을 말했을 때도 숫자의 크기보다 납품 업체의 표정을 먼저 떠올렸다.

“괜찮으면 내일 들를게요. 공개할 수 있는 것만 볼게요.”

유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난 뒤 복도를 건너는데 민기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회색 양복 주머니에는 낡은 만년필이 꽂혀 있었다.

“강서준 군. 대한증권 자료실에 다녀왔다고 들었습니다.”

말투는 친절했다. 서준은 걸음을 늦췄다.

“과제 때문에요.”

“교수님이 좋은 숙제를 내주셨군요.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전략실에서 찾아 드리겠습니다.”

“경제통계 연감 외환표부터 만들고 있습니다. 공개된 수치만 있어도 꽤 오래 걸리더라고요.”

“그런 자료는 1층 객장보다 7층에 많지요.”

민기혁은 웃었다. 서준은 그가 어디까지 들었는지 가늠했다.

엘리베이터 층수까지 전해졌다. 자료실 문 앞 직원에게서 이름이 올라갔을 것이다. 서준은 자신이 어떤 바인더를 열었는지까지 말해 준 사람은 없기를 바랐다.

“직원분이 일반 열람철을 보여 주셨습니다. 삼십 분만 보고 나왔어요.”

“삼십 분.”

민기혁은 그 시간을 되새기듯 느리게 말했다.

“요즘 7층은 정리가 어수선합니다. 담당자를 붙여 드렸으면 더 편했을 텐데요. 누구와 이야기하셨습니까?”

윤하린의 이름은 절대로 여기서 나와서는 안 됐다. 서준은 손에 든 물잔의 차가운 감촉에 집중했다.

“입구 직원분이요. 이름은 못 봤습니다. 연구원분들은 바빠 보여서 말 걸지 않았어요.”

“그렇습니까.”

민기혁의 눈이 물잔에서 서준의 얼굴로 올라왔다.

“혹시 보고 싶은 기업이 정해지면 저에게 말씀하세요. 가족 일인데 제가 돕는 게 맞지요.”

“공개 자료라도 부서마다 수치가 다르면 헷갈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검증된 것부터 보시지요.”

“감사합니다. 우선 교수님께 표를 보여 드리고요.”

서준은 고개를 숙였다. 민기혁은 비켜섰다. 친절한 제안이었지만 그에게 자료를 청하는 순간 앞으로 보는 서류마다 발자국이 남을 것이다.

방으로 돌아오는 계단에서 서준은 태준의 웃음보다 민기혁의 삼십 분이라는 말이 오래 귀에 남는 것을 느꼈다.


서준은 방문을 잠그고 가방을 열었다. 현금 이십만 원 봉투는 접힌 모서리까지 아침 그대로였다. 돈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늘의 유일한 안전판 같았다.

책상 위에 아침 신문과 복사해 둔 월보 표를 나란히 놓았다. 신문은 대한상사의 수주액을 크게 실었지만 차입금 상환 시점은 한 줄도 없었다. 월보의 환율과 금리도 회사 이름을 알려 주지는 않았다. 두 자료 사이에 비어 있는 칸을 찾아야 했다.

수첩 새 장에 세 칸을 그었다.

첫째, 교수에게 제출할 환율과 단기금리 표. 출처는 연감과 한국은행 월보.

둘째, 공개된 대한상사 재무자료. 외화 부채 총액과 만기별 분류가 어디까지 나오는지 확인.

셋째, 유민이 볼 수 있다고 한 백화점 결제 자료. 납품 대금이 늦어지는 이유를 현장에서 듣기.

서준은 첫 칸의 날짜를 적다가 펜을 멈췄다. 강의실 칠판의 전일 환율과 조교가 적은 당일 고시 환율을 같은 하루의 변동으로 계산할 뻔했다. 출처와 시점을 섞으면 바르게 얻은 수치도 거짓 결론을 만든다. 그는 표 위에 기준일과 발표 시각을 따로 적을 자리를 그렸다.

홍콩 법인 5천만 달러는 적지 않았다. 그 숫자는 누군가에게 건네는 순간 윤하린의 보고서로 돌아가는 길을 가리킨다. 서준은 그 옆에 작은 표시만 남기고 수첩을 덮었다.

‘먼저 공개된 사실로 서야 한다.’

그는 이십만 원 봉투를 다시 가방 안쪽에 넣었다. 46만 원은 봉인한 채였고 적금은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투자처보다 질문할 자격이었다.

같은 시각, 본사 전략실의 불은 아직 켜져 있었다.

민기혁은 노란 메모지 위에 보고 내용을 적었다.

‘6월 17일. 강서준. 대한증권 7층. 체류 약 30분. 일반 열람철 주장.’

그 아래에는 다른 서류에서 옮긴 한 줄을 적었다.

‘윤하린 보고서 반려. 파쇄 지시 미이행.’

두 줄이 이어진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우연이라면 확인해 지우면 될 일이었다.

민기혁은 만년필 뚜껑을 닫고 수화기를 들었다.

“리서치센터에 전해 주세요. 오늘 치우라고 한 원고는 내일 아침 제가 직접 확인하겠다고.”

책상 위 메모지에는 서준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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