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

21화: 복수의 값
안쪽 문이 닫히자 바깥의 소음이 한 겹 꺾였다.
하지만 완전히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벽 너머에서 하수인의 고함이 낮게 울렸다. 서준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만큼은 구별할 수 있었다.
접수 담당자는 하수인의 장부를 책상 위에 펼쳤다. 붉은 줄이 빽빽한 페이지가 두꺼운 쇠추에 눌렸다. 옆에는 경비병이 금속 상자에 넣은 붉은 종이가 놓여 있었다.
세리아는 장부와 종이 사이에 손을 세웠다.
"따로 기록합니다. 섞이면 저쪽이 원하는 대로 됩니다."
서준은 말뜻을 전부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그녀가 두 물건을 떨어뜨려 놓는 이유는 알 수 있었다.
접수 담당자가 서준을 가리켰다. 그리고 장부를 가리킨 뒤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두 번 두드렸다. 설명하라는 뜻이었다.
서준은 동전 두 닢을 꺼냈다. 하나를 저울 위에 올리고 다른 하나를 손에 남겼다. 이어 기호 조각을 천 위에 놓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조각을 집는 시늉을 했다. 토반의 저울 앞에서 동전이 오갔던 순간을 흉내 냈다. 돈을 내고 물건을 넘겼다는 뜻이었다.
접수 담당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세리아가 서준의 손을 멈춰 세웠다. 그녀는 빈 종이를 끌어오더니 물건 그림과 동전 두 개를 그렸다. 그 아래에 짧은 선을 긋고 서준을 보았다.
거래를 직접 확인했느냐는 질문 같았다.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수인의 장부를 가리킨 다음 고정편 그림이 있는 줄을 찾았다. 그 줄 아래에 붉은 선들이 뒤늦게 덧붙어 있었다.
서준은 검지를 붉은 선 위에 대고 손가락을 뒤로 끌었다. 다음에는 장부의 빈 옆자리를 두드렸다. 물건이 들어온 기록은 없고 돈만 늘었다는 뜻이었다.
세리아의 시선이 장부 아래쪽에 붙었다.
그녀는 접수 담당자에게 확대경을 받아 들었다. 누렇게 뜬 종이 표면을 오래 들여다본 뒤 붉은 줄의 끝을 손톱으로 가리켰다.
"잉크가 다릅니다. 원래 기록 위에 나중에 덧댔어요."
접수 담당자가 장부를 빛 쪽으로 기울였다. 붉은 줄은 종이 섬유 위에만 얹혀 있었고 오래된 검은 글씨는 안쪽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서준의 가슴 안쪽이 미세하게 떨렸다.
붉은 줄을 향한 떨림은 강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을 알려 주는 감각은 아니었다. 새로 배어든 마력이 종이에 남았다는 신호에 가까웠다. 붉은 줄이 나중에 더해졌다는 판단은 눈과 상대의 움직임이 함께 만들어 낸 것이었다.
접수 담당자는 장부 모서리에 적힌 작은 번호를 찾았다. 그는 번호를 따라 서가 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하수인이 있는 벽 너머를 가리켰다.
하수인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도둑! 내 물건을 훔친 놈이다!"
낯선 언어였지만 이번에는 대강의 뜻이 느껴졌다. 서준은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하수인은 문을 두드렸다. 쇠살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걸린 장부들이 가볍게 부딪혔다.
접수 담당자는 붉은 손바닥 모양이 찍힌 새 종이를 책상 위에 밀었다. 가장자리에는 아까 보았던 것과 같은 검붉은 인주가 묻어 있었다.
그는 서준의 손바닥을 가리켰다.
서준은 숨을 삼켰다.
세리아가 종이를 낚아채 뒤집었다. 뒷면에는 서준이 알아볼 수 없는 글씨와 세로줄이 빽빽했다. 그녀는 붉은 손바닥을 가리킨 뒤 자기 목덜미에 손가락을 대고 단단히 눌렀다.
채무를 인정하는 종이라는 뜻이었다.
서준은 종이에서 손을 뗐다.
그때 문 너머의 하수인이 마르코의 이름을 내뱉었다.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서준의 손끝이 저절로 떨렸다.
마르코.
그 이름을 적고 싶었다. 손도장을 찍었던 방과 하역장 바닥을 떠올리게 만들고 싶었다. 자신이 얼마나 오래 끌려다녔는지 전부 말하고 싶었다.
세리아가 빈 종이를 한 장 더 꺼냈다. 그녀는 서준에게 입을 가리키고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한 번에 하나만 말하라는 뜻이었다.
서준은 먼저 손도장을 흉내 냈다. 다음에는 양손으로 무거운 자루를 나르는 동작을 했다. 발밑에 사람이 쓰러지는 모습도 그렸다.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원형으로 말아 마르코의 단추와 기호 조각을 번갈아 가리켰다.
세리아는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는 서준이 동작을 마친 뒤에야 종이에 짧은 글을 적었다.
"직접 본 순서만. 추측은 빼요."
서준은 그녀의 글을 읽지 못했다. 하지만 세리아가 손으로 시간의 순서를 만들었다. 손도장. 하역장. 고정편. 하수인의 붉은 종이.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르코가 자신을 속였다는 문장을 만들 수 없었다. 마르코가 어떤 조직의 우두머리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대신 자신이 손도장을 찍었고 하역장으로 넘겨졌으며 지금 하수인이 같은 기호와 붉은 종이를 들고 나타났다는 사실만 내놓았다.
접수 담당자는 기록용 종이에 서준의 동작을 짧게 옮겼다. 그러고는 다시 붉은 손도장 종이를 가리켰다.
이번에는 서준이 먼저 손을 들었다.
그는 붉은 종이를 가리킨 뒤 양손으로 X자를 만들었다. 다음에는 기록용 종이를 가리키고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채무는 인정하지 않지만 사건 기록에는 이름을 남기겠다는 뜻이었다.
접수 담당자가 세리아를 돌아봤다. 세리아는 잠시 서준을 바라보다가 그의 손목에서 동전 하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종이의 모서리에 작은 선을 하나 그었다.
기록을 남기려면 돈이 필요했다.
서준은 동전 두 닢을 모두 책상 위에 올렸다.
르네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진 것을 전부 내놓지 말라는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표정과 손짓으로 알고 있었다. 서준은 잠시 두 동전을 내려다봤다.
하나면 배를 채울 수 없었다. 그래도 둘 다 사라지면 오늘 밤 물 한 모금도 구할 수 없었다.
벽 너머에서 하수인이 웃었다.
예전이라면 동전부터 던졌을 것이다. 혹은 붉은 종이를 찢으려 들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상대가 놓은 판 위에서 움직이는 일이었다.
서준은 동전 하나를 집어 세리아에게 건넸다. 나머지 하나는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세리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녀는 접수 담당자와 긴 말을 주고받았다. 담당자는 고개를 저었고 세리아는 장부와 붉은 종이를 번갈아 가리켰다. 이어 압수품 목록을 두 개로 나누는 동작을 했다.
기호 조각을 확인하는 비용과 채무 확인서는 별개라는 뜻이었다.
몇 차례 실랑이가 오간 뒤 접수 담당자는 한 동전만 받았다. 세리아가 서준을 향해 손바닥을 펴 보였다.
"기록 수수료예요. 저 종이를 인정하는 돈이 아니에요."
서준은 말보다 행동을 확인했다. 담당자는 동전을 작은 철제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붉은 손도장 종이는 그 옆의 다른 상자에 들어갔다.
접수 담당자는 기록용 종이에 짧은 번호를 적고 푸른 밀랍을 눌렀다. 그는 그 종이와 같은 번호가 새겨진 금속패를 서준에게 내밀었다.
세리아가 금속패를 가리킨 뒤 가슴 쪽으로 당겼다. 사건이 길드 기록에 접수되었다는 뜻이었다.
서준은 금속패를 받아 손바닥에 쥐었다. 한 동전으로 산 것은 음식이 아니었다. 그래도 처음으로 누군가가 빼앗으려 한 일을 자신의 이름 아래 묶어 둔 표식이었다.
접수 담당자는 장부의 작은 번호를 베껴 적은 뒤 안쪽 서가로 들어갔다. 서준과 세리아도 그를 따라갔다. 르네는 문 앞에서 경비병에게 막혔지만 안쪽을 향해 검지를 세웠다.
한 번에 하나씩 움직이라는 경고였다.
서가 안쪽에는 먼지가 쌓인 작은 보관함들이 줄지어 있었다. 각 보관함에는 숫자와 기호가 붙어 있었다. 서준은 숫자를 읽을 수 없었지만 접수 담당자가 장부의 번호와 같은 칸을 찾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그는 세 번째 줄의 작은 함을 꺼냈다.
함 안에는 계약서가 없었다.
누렇게 빈 봉투 하나와 찢긴 실밥만 남아 있었다. 봉투 앞면에는 하수인의 장부 모서리와 같은 둥근 기호가 찍혀 있었다. 아래에는 길드의 푸른 봉인이 반쯤 눌려 있었다.
접수 담당자는 봉투를 뒤집었다. 뒷면의 인계표에는 또 다른 보관 위치가 적혀 있었다. 세리아가 글자를 읽는 동안 서준은 봉투 안쪽을 살폈다.
마력 잔류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오래된 종이가 품은 냄새처럼 약했다. 하지만 봉투의 바닥 한쪽에서만 가느다란 떨림이 이어졌다.
서준은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가리켰다.
세리아가 봉투를 받아 빛에 비췄다. 접수 담당자는 얇은 칼로 안감의 겹친 부분을 벌렸다. 그 안에서 접힌 인계표 하나가 나왔다.
세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원본은 여기 없어요. 상단 보관소로 넘어갔습니다."
그녀는 서준이 볼 수 있도록 인계표를 펼쳤다. 상단에는 둥근 기호가 있었고 아래에는 외부인 관리 번호가 적혀 있었다. 수령 확인란은 비어 있었다.
서준은 빈 칸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세리아가 그 손가락을 가리킨 뒤 고개를 저었다.
"누가 가져갔는지 입증할 서명이 없다는 뜻이에요. 원본의 행방은 적혔지만 받은 사람은 기록되지 않았어요."
서준은 B열과 3번 칸을 기억하려고 손가락으로 허공에 모양을 그렸다. 글자는 머릿속에서 금방 흐려졌다. 대신 둥근 기호와 세 줄의 표시를 자기 손등에 눌러 새겼다.
그 순간 벽 너머에서 하수인이 다시 소리쳤다.
"네가 살아서 나갈 것 같으냐!"
이번에는 말뜻을 몰라도 충분했다.
서준의 가슴에서 분노가 튀어 올랐다. 빈 봉투를 움켜쥐고 당장 하수인의 목을 찾아가고 싶었다. 마르코의 이름을 그 입에서 찢어 내고 싶었다.
하지만 하수인은 경비병들 사이에 있었고 서준은 검도 없었다. 무엇보다 방금 얻은 접수 증명과 인계표를 잃으면 다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서준은 벽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멈췄다.
그는 하수인의 얼굴 대신 빈 수령 확인란을 떠올렸다. 누군가 서명하지 않은 기록. 아직 주인이 확정되지 않은 계약. 그 빈칸을 채우는 일이 먼저였다.
서준은 돌아서서 세리아에게 인계표를 가리켰다. 이어 자기 주머니의 동전 하나와 바깥쪽을 번갈아 가리켰다.
돈을 더 내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기록을 가지고 나갈 방법을 확인하고 싶었다.
세리아는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접수 담당자에게 금속패와 인계표를 함께 내보이는 동작을 했다. 담당자는 사건 번호가 적힌 기록용 종이의 사본을 접어 세리아에게 건넸다.
세리아는 그 종이를 서준의 가슴에 대고 손바닥으로 눌렀다. 공식 기록의 증거를 가지고 나가도 된다는 뜻이었다.
서준은 접힌 종이를 빈 봉투 안에 넣었다. 봉투 안쪽의 희미한 잔류가 손끝을 스쳤다.
서가 밖으로 나오자 르네가 서준의 주머니를 먼저 보았다. 그녀는 동전 하나가 남은 것을 확인하고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세리아가 든 인계표를 가리켰다.
세리아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상단 보관소.
서준은 목덜미의 푸른 표식을 만졌다. 금속패의 세 줄이 손바닥을 눌렀다.
그때 접수실 바깥에서 카시안 로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용병 시험 접수는 곧 닫는다. 감지 보조라도 들어올 거면 지금 결정해."
르네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준은 빈 봉투를 옷 안쪽에 넣었다. 상단 보관소에 가려면 출입 자격과 힘이 필요했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동전 한 닢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감각뿐이었다.
그는 카시안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